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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은 하나의 물음으로 시작한다

서평가 금정연의 『28』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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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가 계속해서 암시하듯 언젠가의 광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물론 현실의 광주와 소설의 화양을 일 대 일로 비교하는 건 무리다. 끈을 자른 재형의 선택과 화양을 봉쇄한 정부의 선택 또한 같지 않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일이다.

재형은 스승 누콘의 손에 구조됐다. 마야가 그를 찾아냈다. 그를 깨운 것도 마야였다. 눈뜨고 가장 먼저 대면한 것 역시 마야의 다갈색 눈이었다.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이었다.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이었다. 조심스레 물어오는 눈이었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p.12)
재형은 답하지 못한다. 설원에서 굶주린 늑대들을 만났다고, 제 손으로 직접 개들과 이어진 끈을 잘라버렸다고, 개들이 늑대를 끌고 달아나준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재형의 잘못이 아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재앙이다. 평범한 불행이다. 자연스러운 선택, 차라리 본능이었다. 늑대가 물고 썰매개가 달리는 것처럼. 하지만 재형은 자신의 선택을 참을 수 없다.

한국으로 돌아온 재형은 수도권 인근의 소도시 화양에서 유기동물 보호소를 운영한다. 속죄라고 해도 좋고 밥벌이라고 해도 좋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산다. 유기견을 구조하고, 동물을 치료하고, 그 밖의 사소하고 중요한 일들로 시간을 채워가면서.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을 간직한 채 꾸역꾸역 살아간다. 어떤 소설의 인물들이 그런 것처럼. 어떤 사람들이 오늘도 그런 것처럼. 결국 그들이 괴로운 것은 그들이 인간인 탓이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 (p.28)
그러던 어느 날, 화양에 정체불명의 인수공통전염병이 발생한다. 욕심 많은 개 번식업자의 집에서 시작된 ‘빨간 눈 괴질’이 순식간에 도시를 뒤덮었고, 사람들이 가뭇없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빨갛게 부은 눈으로 온 몸에서 피를 쏟으며. 예고 없이 찾아온 재앙으로 화양은 무간지옥이 된다.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재형의 은밀한 소망이 이제 이루어지려 하고 있었다.

응급실 간호사가 죽었다. 119 구급대원이 죽었다. 경찰과 아파트 경비원이 죽었다. 회사원이 죽고 자영업자가 죽고 학생이 죽고 취업준비생이 죽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도. 재형은 죽지 못했다. 아직은 아니다. 그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알래스카에서 돌아온 날부터 매일 꾸는 꿈. “강아지 마야와 눈밭을 뒹구는 열다섯 살 소년으로 시작해서 마야의 다갈색 눈이 ‘내 아이들을 어쨌어?’라고 묻는 데서 끝나는” 늘 같은 꿈. 마야에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 아이들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이 될 것이었다. 아마 재형은 개죽음이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나빠진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화양은 삶보다 죽음이 더 흔한 도시가 되었고, 백신은커녕 발생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한 정부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화양을 봉쇄한다. 언젠가 재형이 살아남기 위해 썰매개와 그를 잇던 끈을 자른 것처럼. 그렇지만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좀 더 악랄한,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요 며칠 군인들은 ‘유기견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개를 향해 총을 쏴댔다. 대로에서 행해진 밤낮 없고 공공연한 발포였다. 살 처분의 일환이자 밤마다 산골짜기에서 울리는 총성의 가림막이기도 했다. 풍문에 의하면, 산골짜기 총성은 야음을 타 화양을 탈출하려는 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며칠 새에 수십 명이 죽어 암매장 당했다고 했다. 부풀려진 면이야 있겠지만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총력으로 화양을 봉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면 발포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p.280)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가 계속해서 암시하듯 언젠가의 광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물론 현실의 광주와 소설의 화양을 일 대 일로 비교하는 건 무리다. 끈을 자른 재형의 선택과 화양을 봉쇄한 정부의 선택 또한 같지 않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일이다. 살기 위해 개들을 희생시켰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유기동물을 구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도, ‘인간의 탈을 쓴 채’ 비인간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말이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세계는 분명 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냉혹한 세계겠지만, 적어도 수백 수천의 생명을 간단하게 살처분하는 세계는 아닐 테니까. 복잡한 인간들의 문제로 어지러운 세계는 아닐 테니까.

과연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세계는 괴롭다. 봉쇄된 도시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서로를 때리고 강간하고 죽이기 시작한다. 재형을 돕는 신문기자 윤주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간호사 수진이라는 화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차라리 (또 다른 화자인) 늑대개 링고를 응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는 동안에도 재형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사이코패스 동해와 가족을 잃은 119 구조대원 기준의 폭주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간다. 시민들과 군인들의 대치가 절정에 이르는 장면에서는 분통이 터진다. 재형이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재형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하더라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리하여 다다른 소설의 마지막, 그는 하나의 선택을 한다. 언젠가 설원에서 했던 것과는 다른, 그렇지만 여전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또한 그것은 마야의 질문에 대한 재형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저 반대편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인간을 넘어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희망을 놓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거기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이기심으로 참혹하게 죽어간 동물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이야기기도 하다. (p.494 ‘작가의 말’)
그리하여 『28』 은 하나의 질문으로 끝난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라는 이제는 익숙한 질문. 그것은 재형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이 아니다. 작가의 말을 따라 “육식하는 자로서, 생태계 최고 포식자로서, 저들의 삶을 지배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변덕쟁이 폭군으로서”, 혹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의도했건 아니건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배신하고 다치게 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반드시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재형의 답은 하나의 모범답안일 뿐이다. 좀처럼 손에서 놓을 수 없지만, 책장을 덮은 후에는 조금 혼란스러워지는 『28』 의 이야기를 나는 그렇게 읽었다.

교훈은 이렇다. 서둘러 자신만의 대답을 준비할 것. 재앙은 스스로를 예고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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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정유정 저 | 은행나무
작가는 리얼리티 넘치는 세계관과 캐릭터 설정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무저갱으로 변해버린, 파괴된 인간들의 도시를 독자의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5명의 인물과 1마리 개의 시점을 톱니로 삼아 맞물린 6개의 서사적 톱니바퀴는 독자의 심장을 움켜쥔 채 현실 같은 이야기 속으로 치닫는다. 극도의 단문으로 밀어붙인 문장은 펄떡이며 살아 숨 쉬는 묘사와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며, 절망과 분노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은 강한 감동을 안겨준다. 이 소설은 모든 살아남고자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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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금정연

이런저런 매체에 책에 관한 글(90%)과 책에 관한 글이 아닌 글(10%)을 납품하는 소규모 자영업자이자 LG 트윈스 팬. 지은 책으로 『서서비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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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저16,02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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