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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자라도록 하십시오. 나무는 수액을 억지로 내지 않으며, 봄의 폭풍 속에서도 의연하게 서 있습니다. 혹시나 그 폭풍 끝에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갖는 일도 없습니다. 여름은 오게 마련이며, 근심 걱정 없이 조용하고 침착하게 서 있는 참을성 있는 사람에게만 여름은 찾아옵니다. 저는 괴로움을 참아가며 끈기 있게 매일 익히고 있으며, 그 괴로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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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말마따나, 나무처럼 자라고 싶습니다. 억지가 아닌, 의연하게, 불안감 없이, 조용하고, 침착하게, 때론 괴로움에 감사하며. 그러나 많은 우리,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곤 세상을 탓합니다. 그렇게 자랄 수 없는 이유, 나무처럼 살 수 없는 이유. 나무처럼 자란다는 것은 판타지로 치부합니다. 이 거친 야만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루저로 낙인찍습니다.
그러나 나무처럼 자라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숲학교가 있습니다. 충북 괴산, ‘여우를 기다리는 숲’이 있고, 거기에 조응하는 숲학교 ‘오래된 미래’가 있습니다.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공간. 매달 만나서 숲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힘도 오래된 미래에 보태졌습니다.
그 숲학교의 교장선생님, 김용규. 대기업 산하의 벤처기업 CEO라는 ‘남들 보기에만 버젓한’ 신분(?) 버리고, 숲으로 간 숲사람. 그 이야기, 『숲에게 길을 묻다』에 잘 나와 있고요.(//86chu.com/Article/View/14817) 백오산방, 지었습니다. 용규 교장선생님, 숲사람으로 삽니다. 그 숲사람의 이야기, 『숲에서 온 편지』를 통해 들려줍니다. 지난 5월13일, 서울 동교동에 충북 괴산에 있는 숲학교가 잠시 옮겨왔습니다. 용규 교장선생님이 서울을 방문한 거죠. 앞선 4월 <아침마당>에 출연하더니, 책 출간과 함께 서울 나들이가 잦아졌습니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비밀(?)을 도시에 알려줍니다. 독자들, 귀를 쫑긋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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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고 있는 알량한 평안과 안정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끝내 알지 못한다. 그대로 앉아 있어 유지되는 달콤함이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곳곳에 감추어진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는 일은 강렬한 유혹이다. 다가서 만져보고 냄새를 맡으며 찔리고 뒹굴어야 알아지는 아름다움이 지천에 널려 있다.”(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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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삶에게 말하기를 : 이 자리의 삶을 받아들이기
최근 ‘여우숲(
//foxforest.kr)’을 개장한 용규 교장선생님.
“스님처럼 살고자 했던 평화는 사라지고 사람 사는 갈등을 겪고 있다”면서도
“그게 삶임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운을 뗍니다. 폭풍 끝에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없는 나무와 같은 자세입니다. 그의 책에는 산과 바다, 바람소리, 자자 등의 개가 등장합니다. 마을 어르신들, 그를 ‘개사돈’이라고 부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수컷 산이가 일곱 집과 사돈을 맺었기 때문인데요. 교장선생님은 책에 ‘개 같은 부모되기’라는 글을 썼습니다. 암컷 바다가 새끼를 낳고, 최적의 자리를 잡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묘사한 글입니다. 개 같은 부모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은 나를 위해 그랬을 텐데,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용규 교장선생님의 농사 중 하나, ‘토종벌 농사’ 사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는 염려합니다. 지구상에서 벌이 사라지고 있음. 그는 3년 째 꿀을 못 뜨고 있습니다. 벌에게 빌고 있을 정도입니다. 36통 정도였던 벌통이 2통만 남은 현실. 우리가 벌에 대해, 곧 다른 생명과의 공생에 무심한 것에 대한 자각. 아인슈타인은 말했다지요. 벌이 사라지면 3년 내 생명의 1/3이 사라진다고. 약간 과장한 것도 있겠지만, 모든 생명은 그렇게 연결돼 있습니다.
담쟁이덩굴의 사진을 타고, 말합니다.
“이름을 아는 것은 백 개중의 하나를 아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열망, 꿈, 상처, 결핍, 분노 등을 함께 이해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는 말씀. 따라서 식물 이름을 아는 것, 중요하지 않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식물을 바라보는 것. 천천히 바라보면서 그것의 열망과 결핍이 무엇일까, 생각하기.
“담쟁이덩굴은 나무일까요, 풀일까요? 구별할 때 가장 쉬운 것이 나이테 여부입니다. 나이테는 한 켜 한 켜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여기, 담쟁이덩굴이 전도양양해 보이나요? 그렇지 않죠. 헌데 왜 우리 삶은 안 보이고 남의 삶은 보일까요? 나무를 보면 어떻다는 것이 보이면서 나의 삶은 왜 보이지 않을까요?”
절벽에 핀 민들레 사진이 이어 등장합니다. 절벽과 같은 삶의 자리에 있다면, 우리는 부모나 나라 등을 원망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헌데, 이 민들레, 꽃을 피웠습니다.
“신은 모든 생물에게 선물과 형벌을 내렸는데, 나무나 풀이 받은 형벌은 뭘까요? 움직일 수 없다는 거죠. 대신 스스로 밥을 만들 수 있는 선물을 내렸습니다. 인간은 특히 필요할 때만 먹는 게 아니고 저장하고 상속하려고 해서 더 불행하고요. 다만 나무나 풀이 받은 선물에서 스스로 못하는 게 있습니다. 밥을 만드는데 중요한 재료가 있는데, 스스로 할 방법이 없어요. 질소입니다. 세포 구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대기 중 질소가 78%에요. 산소가 21%이고. 돈이 지구상에 엄청 많은데, 우리가 가난한 것처럼 양분을 만드는데 중요한 질소가 대기 중에 대단히 많은데, 나무가 이것을 흡수할 수 없는 거죠. 신은 참 재밌습니다.”
그렇다면, 나무와 풀, 어떻게 해결할까요? 더불어 사는 방법으로 해결합니다. 식물은 양분의 75% 정도를 직접 흡수하고 나머지는 뿌리에 흘려서 미생물이 모이게 합니다. 그렇게 미생물이 많이 모여서 질소를 내고, 식물은 형벌을 극복하면서 살아납니다. 이것이 숲의 삶의 방식과 인간의 삶의 방식이 가장 큰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미국이 엄청난 달러를 찍어내지만, 세계의 절반 이상이 가난과 고통 속에 삽니다. 숲과 다른 인간의 현실입니다.
인류의 현실, 최근 나온 책을 통해 더 극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죽는가』. 전 세계 식량의 3분의 1, 쓰레기통으로 갑니다. 유럽, 매년 300만t의 빵을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2000년 영국 통계를 보면, 매일 버리는 바나나는 160만개, 햄은 100만 조각입니다. UN 식량특별조사관이었던 장 지글러는
『굶주리는 세계, 어떻게 구할 것인가』를 통해, 5초마다 열 살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는다고 말합니다. UN 세계식량농업기구는 상시적으로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사람의 수가 2010년, 9억2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숲은 공생하지만, 인간은 인간에게조차 가혹합니다. 세계 농업은 지구 인구인 70억보다 훨씬 많은 120억을 먹일 수 있는데도 굶주림과 죽음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가슴 아픈 현실. 지글러는 굶주림과 죽음의 배후로 거대 금융자본과 다국적기업을 지목했는데요. 그것들, 결국 인간 욕망의 거대한 결정체이자 지금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죠.
“인간에겐 어떤 형벌이 내려져 있나요? 우리는 이 자리에서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 자리의 장미를 부러워합니다. 지금을 살지 못하고 미래를 삽니다. 그리고 과거를 살죠. 과거와 미래를 갔다 왔다 할 뿐이에요. 나무와 풀은 철저히 지금을 삽니다. 제가 숲을 바라보는 렌즈는 나무와 숲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다는 형벌만 이해해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생깁니다.”
숲이 삶에 말하기를 : 삶의 주인 되기
용규 교장선생님, 도토리 나무의 씨앗을 보여줍니다. 그리고선 나무와 식물은 씨앗이었고, 우리도 씨앗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까지 자라는 것, 씨앗의 힘이 그만큼 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씨앗은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을 품고 있습니다. 녹지 않은 언 땅을 뚫고 일어섭니다. 씨앗 속에 힘이 있으며, 숲에 가면 그것을 느껴보길 권합니다.
민들레 이야기 한 꼭지. 민들레에게 필요한 것은 바람입니다. 바람은 기압차 때문에 부는 것이며, 어떤 식물은 바람을 매개로 수정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몸으로 바람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최근 바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온도의 움직임도 그렇습니다. 꽃이 한 방에 피었다는 느낌, 가졌는데요. 왜 그랬을까요? 최근 3년의 기온 변화를 이들도 읽고 있다는 겁니다.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이 나뭇잎에 걸린 것을 사진으로 포착했습니다. 바람이 부는데도 안 떨어져서 민들에게게 물었어요. 넌 왜 안 떨어지니? (웃음) 떨어지지 않는 장치를 갖고 있는 겁니다. 씨앗 하나에 타고 오르기 위한 장치, 부착하기 위한 장치 등도 있습니다. 어딘가에 떨어지면 삶의 터전으로 삼으려고 부여잡는 장치를 스스로 만듭니다. 씨앗이 이렇게 의지를 가진 것임을 아는 순간, 우리는 민들레를 그냥 꺾을 수 없어요.”
말하자면, 삶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에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진 않습니다. 결핍 혹은 과잉이죠. 용규 교장선생님에 의하면, 그걸 넘어서는 것, 생명에게 부여된 몫입니다. 주어진 생명으로 살아내는 것.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만의 무엇을 찾아가는 것. 그는 숲이 그것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소나무의 예. 소나무는 그늘에서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빛이 좋아야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늘에 갇히면 소나무는 시듭니다. 토양이 척박해도, 빛만 좋다면 소나무는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들이 자라면 그늘이 질텐데, 소나무는 숲을 어떻게 이룰까요?
“일단 떼로 자라는 방법을 취합니다. 솔방울이라는 열매 속에는 소나무씨앗이 있어요. 인편이라고 부르는데, 그 속에 씨앗이 하나씩 들어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방식은 떼를 이루어 살면서 그해 새로 나온 삶을 지키고 삽니다. 3년 정도 되면 솔잎을 떨어트리는데, 그 솔잎이 화학물질을 품고 발산하면서 쌓입니다. 다른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걸 타감 작용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미생물들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인간이 군불을 떼기 위해 개입하거나 다람쥐 등이 씨앗 등을 심어놓습니다. 소나무들이 모인 가운데, 층층나무가 자랍니다. 적당히 우거진 곳에서 삶이 이루는 층층나무는 가지를 돌려서 내는 선택을 합니다. 해를 포착하기 위해 잎을 만들고, 우산살 모양으로 꽃을 터트립니다.
“담쟁이덩굴은 왜 중력방향과 다른 쪽으로 자랄까요? 물이 부족한 상태로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늘고 얇은 줄기로 지름보다 수천 배, 수만 배에 달하는 길이까지 키를 키울 수 있는 거죠. 혼자 하느냐. 아닙니다. 도종환 선생의 「담쟁이」라는 詩를 보면 알 수 있죠.”
숲에서 빛이 비치는 시간, 짧습니다. 나무에겐 잠깐의 꿈이죠. 그 빛을 만나는 것.그래서 비어있는 공간을 향해 가지가 더 강렬하게 휘어지기도 합니다. 숲에는 그래서 나무와 나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는데도, 그 공간에서 자기 하늘을 엽니다. 공간을 만듭니다. 그리고 여우숲에 있는 한 나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위 위에 자라난 나무입니다.
“태어난 자리가 바위 위라서 바위를 끌어안는 선택을 합니다. 거꾸로 자라는 선택을 했죠. 나이에 비해 키는 작습니다. 이 나무를 처음 만났을 때, 타고 오르는 덩굴을 제거해주고자 했는데, 어떤 음성이 들여옵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니? 왜 네가 내 목생(木生)에 개입하려 하느냐? 미안하다 느티나무야. 그 뒤부터 이 나무를 보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삶은 이렇게 살아내는 것인데.”
두릅의 사진도 등장합니다. 두릅엔 가시가 있습니다. 또 장미, 산초나무, 산딸기, 복분자 등 짐승이나 사람이 좋아하는 건 가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선인장의 가시는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서라 다르긴 해도, 식물은 제 스스로 지킬 힘이 있을 때는 스스로 가시를 떨굽니다.
“가시는 무수한 상처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시 많은 사람이 있을 텐데, 뒤에 있는 상처를 바라보고 안아줘야 해요. 가시가 없어도 되는 날이 올 것임을, 나와 지내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해주면 돼요. 저도 옛날 가시가 많은 사람이었거든요.(웃음)”
숲이 삶에 말하기를 : 조급해 하지 않기
향기가 별로 없는, 달개비의 모습이 나옵니다. 여름에 꽃을 피웁니다. 대부분의 꽃이 한낮에 꽃을 피우지만, 달개비, 이른 아침부터 피웁니다. 미약한 향기 때문인데요. 기압이 낮을 때 그 향기를 소구하고 어필하고 싶어서 이른 아침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선 12시 전, 꽃의 기능을 정리합니다. 한낮에 꽃 피는 게 대중적이라면 달개비는 그런 선택, 하지 않습니다.
밤에 피는 야화, 달맞이꽃.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저녁에 꽃을 피웁니다. 한낮이 레드오션임을 알아챈 겁니다. 벌과 나비를 겨냥해봤자,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녁 무렵 나방도 존재함을 알고 미약한 향기로 그들을 겨냥합니다. 잎을 열어두고 잠자리도 주고 꽃가루받이를 합니다. 대부분의 꽃이 한낮을 겨냥할 때 달맞이꽃은 달뜨는 시간을 선택합니다.
용규 교장선생님이 가장 좋아한다는 산국, 야생국화. 가을에 서리를 기다려 꽃을 피웁니다. 싱싱함을 잃지 않습니다. 서리가 내리면 생산보다 소비가 많을 때인데, 벌들 입장에선 상강이 마지막 분투의 계절입니다. 마지막 축제의 시간, 살아남은 꽃들은 모든 곤충을 독점할 수 있는데요. 산국은 작디작은 꽃을 극복하기 위해 짙은 향을 냅니다. 별의별 곤충이 찾아옵니다. 서리를 기다려 꽃을 피우니 온전히 우주에 살아있는 곤충을 독점하는 셈입니다.
목련은 향기가 정말 곱고, 이른 봄, 늦겨울에 꽃을 피웁니다. 앞선 해 6월부터 잎눈을 만들어서 겨울을 견뎌내기 위한 장치를 차곡차곡 만듭니다.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합니다. 때가 되면 제 꽃, 피웁니다. 이들 모두 조급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꽃을 피우는 식물입니다. 그들은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꽃을 피우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철새가 텃새보다 곱게 웁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철새처럼 살면 좋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하루가 더 고마워지거든요. 날아가다가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곱게 웁니다. 그래야 짝짓기도 할 수 있고요. 좋은 詩가 나오려면 생명과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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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덩이에 갇힌 시간도 내 삶의 귀중한 일부임을 인정할 것. 그 처한 곳에서도 삶을 누릴 것. 포박된 삶의 고통과 갑갑함을 기꺼이 껴안고 삶을 지속할 것.… 하루하루가 아픈 나날일지라도 때를 기다려 오늘을 열고 닫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 것.”(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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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삶에 말하기를 : 숲의 방식으로 성장하기
“숲은 개별생명체의 집합이 아닙니다. 개별생명체만 보면 숲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인간은 한계를 지닌 성장을 합니다. GDP(국내총생산)를 얘기하려면 세금계산서를 주고받아야 하지만, 숲은 그렇지 않습니다. 숲공동체가 마음과 노동을 나누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용규 교장선생님, 다시 벌을 꺼냅니다. 그들은 육각형의 집을 건축합니다. 주어진 공간에 효율적으로 많이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죠. 벌들은 건축학교에 다니지도 않고도 효율적인 공간 활용법을 익혔습니다. 벌이 인류보다 더 위대한 이유입니다. 천연재료만 썼고, 지속가능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육각형의 집, 벌 한 마리가 꿀을 가득 채우려면 8천 송이를 헤매고 다녀야 채울 수 있습니다. 꿀 한 숟가락에는 얼마나 많은 벌들의 노고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숲은 알려줍니다. 밥상 위에 올라가는 것에 어떤 노고가 있는지 생각해야 함을.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이 사유이고, 누군가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죠. 벌의 노고를 기억하면서 꽃향기의 삶의 의지를 기억하면서 먹을 때 그것이 약이 됩니다. 8천 송이를 헤매는 벌이 집을 잘못 찾아가면 꿀은 없습니다. 벌은 열심히 일할 때 3개월을 삽니다. 한 번 실수할 때마다 수명은 줄어들죠. 벌은 언어를 가지고 회의도 합니다. 8자 춤을 추면서 의사소통도 하고요. 감탄하면서 살기에도 삶은 유한합니다.”
그는 숲에 들어가서 알게 됐습니다. 자신이 억눌림이 많은 인간임을. 부러진 날개가 있음도 발견합니다. 자신을 들여다봤더니, 희(喜)와 락(樂에) 반응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았기에 조금씩 변모해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파악할 것을 권합니다. 나는 어떤 감정에 나를 표현하지 못하는가. 기쁨이 있을 때 표현하고, 분노할 때 분노하는 것. 스스로 바꿔야 할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
숲이 삶에 말하기를 : 지속가능한 성장의 비밀 ‘Share and Share’
“왜 우리는 휴대폰을 2년마다 바꿔야 할까요? 거래가 돼야 하기 때문이죠. 미래 자원을 당겨쓰는 겁니다. 그러나 숲은 선순환 구조를 만듭니다. 비결은 나누고 또 나누는 겁니다.”
숲의 생명들, 자신이 이룬 성과를 빼돌리지 않습니다. 이룬 모든 성과를 숲에 되돌립니다. 쓰러진 나무의 단면을 자르면 무수한 미생물과 생명이 있는데, 죽은 나무는 누군가의 집이 되거나 알을 품게 해줍니다. 숲에는 미생물과 곤충, 애벌레 알이 있어서 봄이 침묵하지 않고 다시 옵니다. 생명은 순환 반복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숲의 방식입니다.
“숲을 닮은 삶을 살면 좋겠고, 숲을 닮은 지속가능한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코스모스는 우주라는 뜻인데, 꽃 한 송이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말, 거짓이 아니에요. 코스모스꽃이 별 모양이라는 것 아시나요? 하트 모양의 꽃도 한 두 개가 아니에요. 이름의 강박 아닌 가슴으로, 너는 어떻게 여기서 삶을 시작했니? 넌 왜 이리 향기가 좋니? 물어보세요. 자주 천천히 걷고 숨 쉬고 숲을 대하고, 나도 생명, 저이도 생명, 그리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삶이, 도시가 힘들다면 여우숲, 권합니다. 커피 만드는 제가 조언 한 카페 ‘여우비’에서 맛있는 커피도 마실 수 있고요. 뭣보다 그곳엔 숲이 있습니다. 그는 농작물을 돈으로만 사려는 사람에겐 팔지 않습니다. 꿀 한 숟갈에 담긴 꿀벌의 노고와 수백만 송이 꽃들의 향기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꿀을 팝니다. 정성스레 가꾼 산마늘도 은은한 향기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잎을 팔지 않습니다. 그것, 자존감입니다. 저도 그런 커피, 건네고 싶네요. 커피 생산자와 커피를 키운 대자연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에겐 더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고 싶습니다. 여우숲에 가면 스스로를 노래하는 삶을 살고 있는 숲사람을 만날 수 있고, 숲이 건네는 말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연히 이런 말, 튀어나올 거예요.
“오늘도 아, 자연이 스승입니다.”(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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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들을 단지 권력투쟁의 도구로 삼다보면, 인간이 자신을 자연세계의 일부로 여겼던 때가 그리 예전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쉽다. 세상은 여전히 경제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힌트를 준다. 울창한 숲을 산책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잃어왔는지 상상할 수 있다.” (『워크 Work: 열심히 일하면 어디까지 올라갈까?』,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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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에서 온 편지 김용규 저 | 그책
저자 김용규는 숲과 더불어 지내면서 자연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일을 하며 숲 해설가로, 농부로, 숲학교 교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각각의 이름을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연인이다. 저자는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무자비한 착취를 버리고, 살아 있는 생명과 조화를 이루고 배려하며 살아갈 때 진정 아름다울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