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환(58)이라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전설의 록밴드 ‘들국화’의 멤버하면 충분히 기억할 이름이다. 우리 대중음악사에 천연히 빛나는 명반 들국화 1집에서 작곡하고,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했던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행진」과 「그것만이 내 세상」만큼이나 전파를 자주 탄 수록곡 「세계로 가는 기차」는 그가 만들었고 노래까지 불렀다.
그의 들국화 활동은 짧았다. 집안문제로 6개월 후 도중하차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곤 어떠한 음악관련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뉴욕의 생활인’에 머물며 뮤지션의 궤적과는 끝일 것 같았던 그가 2009년 가을, 고국에 돌아와 올해 얼마 전 <Long Way Home>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했다. 들국화 앨범 발표시점을 따지면 26년만의 컴백이다.
앨범에는 들국화 시절의 동료인 최성원과 주찬권이 함께 했다. 들국화의 향수를 불러 모을 만한 1980년대 록, 재래식 록의 전형이다. 그는 앨범에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록 앨범을 낸 것에 흡족해했고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는 환경이 되기를 희망했다. 점잖은 어른의 여유 속에서 그는 인터뷰 질문마다 찬찬히 그리고 공손하게 답했다.
2009년 10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들국화 멤버들은 다 봤나요.
“네, 다 봤죠. 일단 귀국한 이유는 작년 2010년이 들국화 1집을 발표한 지 25주년이 되는 해였어요. 제가 1집을 내고 바로 미국에 간 까닭은 아버지와 형이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가정 분위기 상 음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제 개인적으로도 자유로워진 면이 있어서 귀국을 생각하며 들국화의 재결합을 기획하게 된 것이죠.
우선 작년 10월에 귀국해서 최성원, 주찬권씨는 만나서 음악을 다시 하기로 상의를 끝냈어요. 하지만 전인권씨는 몸 상태가 워낙 안 좋으니까 이야기에 진전이 없더라고요. 해결점이 안 나왔던 것이죠. 대화를 나누다보면 화제가 자꾸 엉뚱한 길로 빠지고 단절되다보니, 역시 “아직은 시간을 요하는 구나, 좀 더 기다려야 하겠구나.”라고 느꼈죠.”
(기획은 예전에도 들었는데, 막상 결과물이 안 나와서 아무래도 전인권씨의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은 했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답했다)
앨범이 나오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들국화 앨범 발매가 계속 지체되는 순간에 옛날에 음반사를 운영하셨던 분들을 찾아뵈었어요. 일단 들국화 1집을 내주신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님을 뵙는 것이 순서인 것 같아서 방문했었죠. 그런데 다들 하시는 말씀이 워낙 음반시장이 침체되어 있어서 함부로 음반을 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고 꺼려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 외에 제가 아는 회사들을 연결해 봐도 유통만 하고 발매는 안 한데요. 그래서 결국에는 되든 안 되는 부딪혀 보자는 생각에 인디 앨범회사에 접촉하고 데모 음원을 보냈는데 첫 번째로 ‘루비살롱’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바로 진행이 된 것이죠.”
22년 만의 귀국이었습니다, 뉴욕에서 어떻게 지내셨나요.
“집안이 보수적인 것도 있었고 당시에는 군인들이 정치했던 시기라 한 대수 선배님 같은 경우처럼 대중문화의 특정 인물들은 추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선배들의 곤란도 봤었고, 사실 들국화 1집을 내면서 들국화가 그렇게 유명해질지도 몰랐어요. 또 뭔가 뉴욕 같은 도시에서는 많은 것을 간접적이라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공부를 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돈을 들여서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안 되었죠. 미국에 막상 도착해보니 적응하느라 5~10년은 그냥 지나가더라고요 정신없이. 안착을 하고 난 뒤에야 공연도 많이 가고,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LP나 CD를 사서 접하지 못했던 음악도 들었죠.”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혹시 들국화의 멤버 조덕환이라고 하면 알아보던가요.
“아니요.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죠. 제가 캘리포니아 쪽 여행도 가서 느꼈지만 뉴욕과 캘리포니아의 차이점은 우선 캘리포니아는 한인 인구도 많고 전반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이에요. 날씨도 그렇고, 일도 8시간 이상 안 주고. 그런데 제가 있던 뉴욕은 워낙 생활이 빨리 지나가기도 하고 일단 한인들이 일을 엄청 많이 해요. 저조차도 10시간 정도 일을 했었고. 지금은 2세들이 성장해서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제가 갈 때에는 정서적인 생활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한국에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랬죠.”
솔로 앨범을 다 완성하고 첫 느낌이 어떻던가요.
“제작 기간이 쉽게 말해서 진통의 과정이었지만 하여간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릎을 다쳐서 6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도 했고요. 저는 약간 대기만성적인 완벽주의가 있어요. 대중이나 음악 평론가 분들께서 들국화 1집을 명반이라고 칭찬을 해주시지만 저는 만족을 못했어요. 이번 앨범도 저는 90퍼센트만 만족합니다. 시간과 돈을 충분히 투자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회사가 인디 레이블이다 보니 긴축하고 축소했음에도 잘 끝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나머지 아쉬운 10퍼센트를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보컬을 더 손보고 싶었죠. 그리고 제가 코러스도 했지만 백 코러스를 활용해서 곡을 부분적으로 살리고 싶었는데 그 점은 아쉽죠. 하지만 90퍼센트도 감사해요. 총 13곡을 만들었는데 시디 용량이 원래 89분이잖아요. 나중에 다 만들고 녹음한 트랙을 합쳐보니까 105분인가 해서 두 곡을 빼야 했어요. 그 두 곡은 추후에 싱글로 나올 텐데. 아마도 원래 영어버전이었던 「Ordinary man」이랑 컨트리 곡인 「고향 가는 길」 이 두 개가 싱글로 나오게 될 것 같아요.”
이번 솔로 앨범에 수록한 들국화 시절의 옛 곡들을 듣다보니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기타 연주가 인상적이던데요.
“네, 아주 엑설런트한 연주가 나왔죠. 이번 앨범에는 기타리스트가 3명이었습니다. 슬라이드 기타는 (블루스 밴드 ‘써드 스톤’의) 박상도가 연주하고, 김대순이라는 친구하고, 저도 연주하고.”
「Ordinary man」은 대중적으로도 듣기에 참 좋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음악으로 돌아오는 마인드를 담았기 때문에 타이틀곡을 「수만리 먼 길」로 하고 싶었어요. 헌데 회사에서는 「Ordinary man」이 더 대중적이라는 의견이 많아서 그 곡으로 가게 된 것이죠.”
간접경험이 있었지만 음악에 다시 손을 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들국화 1집에서도 조덕환은 안 부른 건 아니지만 메인 보컬이 아니었음에도 이번 앨범에서는 다 직접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생을 했을 듯싶네요.
“별로 큰 고생은 안 했어요. 그야말로 두성을 쓴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비틀즈나 롤링 스톤스처럼 샤우트 창법이었으니까요. 음만 조절하면 되는 거니까 샤우트 창법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보컬의 측면에서 조금 힘들었던 곡은요.
“제가 전인권과는 다르게 조금 키가 낮아요. 로큰롤 스타일은 상관없어요. 그냥 샤우트로 지르는 거니까. 롤링 스톤스나 비틀즈 스펙트럼이 저에게 맞죠. 그런데 조금 그 음의 스펙트럼에서 범위가 올라가는, 예를 들어서 허성욱 추모곡으로 만든 「제한된 시간 속에서 영원의 시간 속으로」는 녹음할 때 조금 힘들었어요. 호흡을 조절하는데 애를 먹었고, 곡이 감성적인 스타일이기도 했고.”
들국화 1집에서 조덕환이 작곡한 곡은 「세계로 가는 기차」,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축복합니다」, 모두 3곡이지요. 「세계로 가는 기차」는 직접 불렀구요, 그런데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는 전인권을 보컬로 염두하고 만든 곡인가요.
“「세계로 가는 기차」는 1집 나오기 두 달 전에 만들었어요. 그 때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잠실 체육관이 기초공사를 하면서 올라가고 있었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첫 번째 세계적인 축제인데 젊은 나로서는 이 축제가 성공리에 끝나기를 바랐어요. 그러한 마인드를 표현한 곡인데, 아직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어떤 분들은 ‘세계로 가는 기차’ 만들고 정말 세계(미국)로 갔구나 그런 소리도 하시고 (웃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는 그렇지는 않아요. 그것도 20대 때 만들었으니까 오래되었어요. 그 곡은 내용 개념이 남자의 노래이니까 이상적인 여인상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죠. 그것은 꿈속에만 있다.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감성에서 표현된 것이에요. 「축복합니다」도 20대에 만든 곡이지요.”
신보의 「Highway song」은 어떤 곡인가요.
“한국에 5년에 한 번씩 나왔어요, 가끔 친구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만든 곡이에요. 엄청나게 한도 끝도 없이 고속도로를 뚫어 놓았더라고요. 미국보다 더 하더라고요. 바닷가가 펼쳐진 고속도로나, 일산가는 길에 통일로, 자유로 같은 도로를 달려보고, 길 사정을 보고 신나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어요. 스피드광이 좋아하는 곡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곡 마지막에는 속도조절하고 조심하라는 표현도 넣었는데. (웃음)”
「수만리 먼 길」앞에 감성적인 연주곡 「Prelude」를 배치한 의도는요.
“그것은 미국에서 맥주 한잔 하며 통기타로 연주하면서 곡의 패턴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외로운 정서를 표출하려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친구도 없다보니 외로웠죠. 그런 의미에서 나중에 편곡할 때는 만돌린 연주도 들어있는데요, 동구 쪽, 이를 테면 러시아 집시의 애환의 감성으로 편곡을 한 것입니다.”
연주에서 만족하는 곡은 어느 곡인가요.
“글쎄, 만족이 간다고 말하기가 그런데요. 들국화 1집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네 멤버들이 싱어송라이터 감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비틀즈,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s, Nash And Young), 이글스의 영향이 있었지요. 즉, 다양성을 부여할 수 있었던 거죠. 대중의 각 사람마다 감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 다양성이 종합적으로 어필이 되어서 살찌고 풍만한 앨범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앨범도 그런 측면을 의도했고요.”
물론 미국에서 기타는 집에서도 틈틈이 연주하셨겠지만 실전에 들어가서도 감이 빨리 돌아오던가요.
“생활이 안정되면서 악기를 모았어요. 앨범이나 악기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 중에 하나였고. 집에서도 일 끝나거나 주말이 되면 기타도 자주 연주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고 보니 탁월하게 연주하는 유명한 친구들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그런 수준까지 어떻게 다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이 앨범은 전체적인 스케일이 제 머릿속에서 나온 거니까 멜로디 메이킹 부분이랑 큰 틀에서 조언만 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파트들은 각 세션들이 즉흥 연주로 알아서 하라고 말했죠.”
이전 멤버와 같이 연주를 했는데 느낌은 좋았는지요.
“드럼은 전부 주찬권 드럼이에요. 최성원은 프로듀서다, 뮤지컬이다 뭐 좀 한다고 다른 쪽에 가 있었다고 베이스를 10년간 안 쳤었데요.(웃음) 옛날에는 기타를 손가락으로 쳤는데 이제는 피크로 친데요. (웃음) 최성원 연주는 4~5곡 살리고, 나머지는 후배들 연주로 메웠죠.”
최성원, 주찬권이 참여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허성욱과 전인권이 없는 들국화 앨범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죠. 들국화는 들국화고. (웃음) 최성원과 주찬권이 도와줘서 고맙게는 생각했죠. (최성원씨의 근황을 물었더니) 이번 달에 「사람의 풍경」이라는 제목의 싱글? 나왔어요. <기타가 웃는다>라는 영화에 삽입된 곡이고. 곡은 다른 분이 만들었는데 최성원 자신이 보컬로 해서 노래가 아주 좋아요. 곡도 최성원 스타일로 아직도 예쁜 목소리가 살아있더라구요.”
많은 후배들이 앨범에 참여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이 있다면요.
“오늘도 연습하고 왔지만 밴드 멤버 4명이 민주적으로 잘 상의해서 연주를 하기 때문에 저는 매우 편해요. 제가 리더 격이자 디렉터 역할이긴 하지만 평화적으로 잘 해나가고 있어요. 그 중에 베이스 치는 한두수라는 친구가 아주 예뻐요. 실력도 대단하고. 제가 가장 아끼는 멤버에요.”
들국화 1집으로 활동한 기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1987년 봄에 미국을 갔으니까요.
“활동 기간이 표면적으로는 1년이지만 미국으로 떠나는데 준비하느라 6개월 동안만 활동했습니다. 아직 좋아하는 팬들이 잠재적으로 있다는 것을 다니면서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들국화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들국화 1집은 동아기획을 살린 앨범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앨범입니다. 음악을 다시 하고 싶은 미련도 많았을 텐데요, 한국에 오고 싶은 마음은 계속 들지 않았나요.
“가는 길은 쉬울지는 몰라도 돌아오는 길은 쉽지가 않아요. 다 정리해야 하고, 부인도 설득해야 했고요. 5년 정도마다 한국에 오고 그랬는데 그때마다 한국에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너 왜 나왔어! 빨리 미국으로 들어가!” 그러세요. (웃음) 아버지는 한 번도 웃는 모습이 없으세요. 이번 신보의 「아버지 웃고 살아요」도 그런 의미로 20대 때 만든 곡이에요.”
들국화 때 작곡한 3곡을 다시 수록하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의 존재감을 상기시킬 필요도 있었겠지만, 음악적인 이유가 더 컸을 것 같습니다.
“들국화 1집 때는 허성욱은 어렸고, 최성원이 전인권의 목소리에 동반자 역할을 하면서 작곡과 편곡을 두 사람이 거의 도맡았었죠. 그래서 이번 앨범에서만큼은 순수하게 저만의 감성 을 살린 편곡으로 다시 해보고 싶어서 약간 새로운 버전의 곡으로 재창조했습니다.”
들국화에서 6개월 동안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요.
“저도 참 희한한 사람인 것이 하도 서양음악을 많이 듣다보니 들국화가 유명해진 밴드가 되기 전까지도 웬만한 우리 음악에 만족할 수 없었어요. 창작도 안 되면서 욕심은 많아가지고. 같이 앨범내고 한동안은 공연도 했는데 양이 안 찼던 거죠. 그러다 미국 갈 준비를 하고 떠나게 된 것이고. 기억나는 순간은 이태원 지하 록 클럽에서 공연을 했던 것이에요. 당시에 주찬권이 ‘믿음소망사랑’이라는 밴드에 있었고, 3인조 하드록, 헤비메탈 밴드였던 ‘솔로몬’이 있었는데 거기 기타가 지금 ‘백두산’의 김도균 씨에요. 믿음소망사랑, 솔로몬, 그리고 저희 들국화 그리고 ‘시인과 촌장’이 연주했지요.”
들국화 1집 재킷을 만들 때 비틀즈 의 <Let It Be> 앨범 재킷을 염두에 둔 건가요.
“아닙니다. 워낙 비틀즈가 유명했는? 그럴 수는 없었죠. 저희는 그냥 삼청동에 가서 포토그래퍼가 4명을 찍어서 그렇게 나온 거지(웃음), 뭐 의도하고 그런 것은 없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그 당시 일반적으로 밴드 구성이 4명이었고 그런 앨범들이 많았어요. <Let It Be>를 겨냥한 것이 아닌데 대중은 그렇게 생각하시더라고요.”
들국화 1집 재킷에는 주찬권이 없습니다. 정식 멤버가 아니었던 거죠.
“주찬권은 정식 멤버가 아니라 세션이어서 1집 재킷에는 실리지 못했죠. 들국화는 처음에 포크 록 개념으로 시작해서 드러머가 없었어요. 물색은 했지만 적합한 사람을 못 구했죠. 기타 최구희도 세션이구요. 정식 멤버는 전인권(보컬), 최성원(베이스), 허성욱(건반) 그리고 저(조덕환 기타)였습니다. 드럼이 없었어요.”
수요자가 접했을 때 어떤 기분으로 신보를 들어 주었으면 하나요.
“들국화 1집은 다양성이 있었어요. 여러 사람이 작곡했기 때문에 순서도 중요했거든요. 저도 한국, 미국 있으면서 컨트리부터 해서 프로그레시브 록, 블루스, 얼터너티브 록, 모던 록까지 들으면서 쌓아온 다양한 장르의 소스가 담긴 다른 느낌의 곡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온라인 음원 시대니까 원하는 곡만 클릭해서 들으면 그만이지만, 특히 우리 때, LP시대에는 처음부터 끝가지 들어야 했죠. 저는 아직은 아날로그 세대이기 때문에 의미에 따라서 순서대로 배열하고, 앨범을 쭉 들으면 흐름이 다르니까 다양한 성향까지 만족할 수 있기를 바라요. 어떤 사람은 이 곡이 좋을 수도 있고, 저 사람은 저 곡이 좋을 수가 있는 것이죠. 들국화 1집의 콘셉트를 살리려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2009년 가을에 한국에 와서 1년하고도 5개월 정도 지났는데 한국 음악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요.
“미국, 유럽 특히 영국이나 일본과 한국과 차이점은 저 나름대로 보니까 우리나라는 패션이 다원화 되어있지 않아요. 미국에 와서 보니 물론 댄스나 힙합이 주도하는 현실이긴 하지만 대중이 다양하게 음악을 즐기는 환경이 자리 잡혀 있어요.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정서가 굉장히 풍부해요. 우선 맨해튼에도 워낙 록 클럽이 많고, 하다못해 댄스나 힙합을 해도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우리나라는 그냥 MR 틀어놓고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미국처럼 제가 좋아하는 포크도 좋고 그런 정서를 대중들도 다양성을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문화적으로 풍만한 삶 속에서 살 수 있는데, 우린 너무 10대 위주의 소스로 치우쳐 있는 분위기가 강하다는 것이죠.”
조덕환 밴드와 들국화에 대한 구상 그리고 그 이외에 구상하는 계획은요.
“제 밴드는 아직 이름은 못 지었는데, 키보드 드럼 베이스 기타 2명해서 5인조로 활동할 예정이에요. 제가 될 수 있으면 어쿠스틱 기타로 하고. 들국화는 들국화대로 계획 중인데 그 이외에는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조덕환을 음악으로 인도한 가수나 앨범이 있다면.
“외국음악은 워낙 많으니까 한 사람을 뽑기가 힘드네요. 한국 음악 선배로서는 포크 쪽에서는 유일하게 김민기 선배랑 한대수 선배. 당시에 포크 뮤지션이 많았지만, 특히 창작세계가 달라요. 뭔가 수준이 다르다고 할까. 두 분을 존경하죠. 그리고 제가 포크도 거치고 록도 거치고 왔다갔다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그 시절의 록 밴드 중에서는 역시 신중현 선배님은 특별한 분이시죠. 저는 당시에도 대부분의 선배들에게 의문을 가졌어요. 예를 들어서 중학교 3학년인가 고등학교 1학년인가 옛날 시민회관에서 플레이보이 컵 쟁탈 공연을 보면 ‘키보이스’나 ‘히식스’ 같은 밴드들이 사이키델릭을 하는데 정말 잘해요. 그런데 음반 나온 걸 들어보면, 이거는 완전 가요로 가는 거예요.”
기성 음악계의 관행이 있었겠죠. 아직 당시에는 폭넓은 대중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시기였을지도 모르구요.
“그래도 1980년대에 들어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나요.”
그게 들국화가 시작인 거죠. 언더그라운드적인 록 본령이라는 점에서요.
“당시 군사정부 시절이고 광주 민주화운동도 있어서 그런 흐름 속에서 운동권의 좌절을 거치면서 청년 세대들에게 어필했던 측면이 있지 않나 싶어요. 아마 전인권의 포효하는 소리와 들국화의 가사 말들이 결합하면서.”
마지막 한마디 하신다면요.
“흠. 이번에도 공연을 왔지만 한국도 에릭 클랩튼처럼 나이를 불문하고 록도 롱런을 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창작과 앨범을 꾸준히 낼 계획이 있고 앞으로 들국화 같은 밴드가 나와 주길 바라고도 있어요. 다만 음악 패션이 한 곳에 치우치기 보다는 다원화되어서 포크와 록이 많이 들리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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