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성의 날] 『버자이너』 - 박나영 휴머니스트 편집자
세계 여성의 날 특집 - 『버자이너』
편집하는 내내 여성의 몸을 여성의 삶을 관점으로 다름아닌 여성 과학자, 성소수자 과학자가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동적으로 느껴졌어요. (2024.03.08)
채널예스 여성의 날 특집 기획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욕망을 숨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여성들은 선입견을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소설, 영화, 과학,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형성을 부수고 다채로운 욕망을 보여주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은 자신의 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한다. 과학 저널리스트 레이철 E. 그로스도 산부인과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질염에 걸린 후, “여성의 몸은 해저나 화성 표면보다도 탐구가 덜 된” 현실을 마주한다. 그렇게 시작된 책 『버자이너』는 여성의 몸에 ‘수치심’을 가한 과학의 역사이자, 새로운 지식을 향한 여성, 성소수자 과학자들의 분투기다. 박나영 휴머니스트 편집자는 이 책을 발견한 순간, 이것이 주변 여성들의 이야기임을, SNS를 달구는 여성들의 분노를 설명할 책임을 알아챘다. 그렇게, 2024년 세계 여성의 날, 성별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를 이끌 책이 도착했다.
SNS에 올린 편집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해저와 화성 표면보다도 덜 탐구된 여성의 몸’이라는 문장에 꽂혀 계약을 결심하셨다고요.
이 책을 발견할 당시에도, SNS에 주기적으로 여성들의 경험담이 올라왔어요. ‘산부인과에 가도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자궁내막증 원인을 아직도 모르다니 이 정도면 연구를 안 한 거 아님?’ 분노를 담은 이야기가 몇만 회 공유되는데도, 매번 답을 알 수 없다는 막막함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이 흩어지는 목소리를 한자리에 모을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아마존에서 이 책을 발견했죠. 그간 이어져 온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 같았어요.
계약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없었나요?
사실 이 책이 저의 첫 외서 기획이라 마음을 졸였어요.(웃음) ‘앤드루 카네기 메달’, ‘PEN/에드워드 윌슨 과학저술상’ 최종 후보작인 만큼, 저작권료가 높고 다른 출판사에서도 오퍼를 넣었다고 해서 '놓치면 어떡하지’ 걱정을 많이 했죠. 편집부와 마케팅팀과 계속해서 회의하고 설득하면서 최종 계약까지 3달 정도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버자이너』를 편집하며 많은 여성 질환들이 원인도 모른 채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셨다고요. 충격과 분노의 연속이었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분노와 배신감이 컸던 것 같아요. 굉장히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실제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친언니가 이미 꽤 커져 버린 자궁근종을 뒤늦게 발견해서 산부인과를 한창 들락거리고, 제가 수술 보호자로 들어가기도 했었는데요. 지인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생리불순이나 부정출혈을 겪는다는 얘기를 듣는 건 부지기수고요. 주변 여성들의 삶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는 것, 그에 비해 많은 것들이 가려져 있고 사소한 문제로 여겨진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책은 분노에서 멈추지 않고, 희망으로 나아가요. 여성의 질환이 백인 남성의 시선에서 다뤄져 왜곡이 많았다는 문제제기에 더해, 실제로 여성의 문제를 새롭게 밝히는 과학자들이 있고, 혁신을 가져오기 시작했음을 알려주거든요. 편집하는 내내 여성의 몸을 여성의 삶을 관점으로 다름아닌 여성 과학자, 성소수자 과학자가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동적으로 느껴졌어요.
특히 놀라웠던 사실은 무엇이었나요?
여성을 배제한 의료 현황을 보고 충격을 받았죠. 일상에서 체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거든요. 예를 들어, 1993년이 되어서야 여성도 임상 시험에 넣어야 한다는 규정이 처음 생겼대요. 그전까지는 항상 ‘남성’만을 보편으로 써왔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여성 연구자들은 ‘왜 내가 보는 해부학 교과서에는 음경은 4페이지나 되는데, 음핵은 한 문장에 불과할까’라는 질문을 던졌어요. 음핵이 표면에 나와 있는 작은 기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여성 연구자가 음핵 안에는 전체 신경과 연결된 굉장히 복잡한 구조라는 것을 밝혀냈어요. 질염도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는데, 질 미생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연구하여 새로운 치료법으로 삶을 개선했죠.
책을 만드는 수많은 과정 중 디자인 의뢰와 시안 공유의 순간이 특별히 흥미로웠다고요. 시안만 6개를 받았다고 하셨는데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디자이너님과 함께 ‘버자이너’가 상징하는 이미지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열띤 토론을 했어요. 처음 시안에서는 버자이너를 랩으로 꽁꽁 싼 모양의 재킷을 씌웠어요. 그 주변에는 여성의 몸을 억압해 온 해부학 용어들이 테이프처럼 붙어 있죠. 그렇게 여성의 생식기를 입막음하는 재킷을 벗기면, 래핑이 찢어진 모습이 나와서 여성에게 가해진 수치심을 찢어버리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했어요. 최종 표지는 래핑이 찢어진 모습이 표지가 됐죠.
또 다른 시안은 책 표지 위에 투명한 PET 재질의 커버를 한 번 더 씌우는 방식이었는데요. PET 표지엔 프로이트, 다윈과 같이 여성의 몸을 제멋대로 정의했던 과학자들과 그들이 상징하는 의료 기구나 이미지들이 인쇄되어 있고, 그걸 벗겨내면 여성의 신체를 새로운 관점으로 연구했던 여성 과학자들만 남게 됩니다. '과학의 아버지들을 추방'한다는 책의 부제를, 물리적인 방식으로 그대로 구현한 것이죠.
이 책은 세계 여성의 날에 독자들을 만날 예정이에요. 이 책이 독자에게 어떻게 전해졌으면 하나요?
여성의 날에 출간을 맞추기 위해 설 연휴까지 반납하고 달려왔는데요.(웃음) 책 출간의 계기가 된SNS에서 여성의 고통을 이야기했던 독자분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여성을 위한 의학이 조금 더 일찍 연구되었다면 삶의 질이 훨씬 좋아졌을 것 같아서 늘 아쉬웠거든요.
『버자이너』는 ‘여성’과 ‘남성’을 갈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생물학적 결과를 보면 성정체성, 염색체, 생식기 등의 명확한 경계가 거의 없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어요. 여성의 몸을 연구한 결과가 남성에게도 도움이 되고, 모든 인류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고 말해요. 이런 사실들을 함께 읽으면서 희망적인 이야기를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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