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 이인규, 둔촌주공아파트 40년의 생애를 들여다보다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둔촌주공아파트 단지에서 사랑했던 것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충분한 녹지와 놀이터, 안전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보행로는 사실 둔촌주공뿐만 아니라 도시의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하잖아요.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걸을 때만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가 있다. 깊이 뿌리내린 커다란 나무와 만남의 장소인 놀이터 미끄럼틀, 주민들을 따르는 길고양이들. ‘둔촌주공아파트’에 대한 10년간의 프로젝트를 이어온 이인규 작가를 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났을 때, 그는 단지의 곳곳을 익숙하게 들여다보며 아파트가 축적해온 세월을 가늠했다. 단지의 배치와 놀이터, 고양이 밥을 주는 주민을 눈여겨보면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둔촌주공아파트’가 재건축이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인규 작가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둔촌주공에 각별한 애정을 지닌 사람들을 모아 추억을 기록했고 사진을 찍고, 가정을 방문해 아파트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아파트에 대한 애정은 사라지지 않아 ‘둔촌주공아파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그 과정에서 ‘단군 이래 최대 단지’라는 수식어로 탄생한 둔촌주공아파트의 40년이 사회 전체의 문제와 맞물려 있음을 알았다. 그 탐구의 결과가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다. 집을 재산가치로만 보는 재건축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가치를 상상해야 할까? 그 단서가 둔촌주공에 있다고 이인규 작가는 말한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약 10년 간 한 아파트의 생애를 들여다봤어요.
처음부터 10년씩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둔촌주공아파트가 엄청나게 큰 아파트 단지다 보니까 담아야 할 이야기가 워낙 많았죠. ‘어 이게 안 끝나네’ 하면서 10년이 흐른 것 같아요. 인생의 사분의 일을 바친 셈이니까 ‘이게 나한테 무슨 의미일까’ 종종 생각해 보거든요. 프로젝트 기간은 10년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아파트에서 살면서 애정을 쌓아온 건 제 인생만큼이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님은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자란 ‘아파트 키드’죠.
둔촌주공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중학생 때까지 살다가 1997년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어요. 그때가 가장 슬펐던 것 같아요. 떠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떠나야 하는 느낌이었거든요. 학교는 아직 둔촌동으로 다녔으니까 계속 경계를 오가면서 아파트 단지를 그리워했죠. 다행히 이모가 둔촌주공에 살고 계셔서 잠시 얹혀 산 적도 있었죠. 그때부터 아파트가 재건축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진을 남기기도 했어요.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 가족의 울타리 없이 세입자로서 아파트에 다시 들어오게 됐어요. 그러니 제 입장도 달라지더라고요. 오래도록 산 입주민과 새로 들어온 세입자들의 입장이 다르다는 걸 알았어요. 그 경험을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네 번째 책 『가정방문』에서 정주와 적응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했고요. 결과적으로는 양쪽을 다 이해하게 된 경험이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를 쓰는 데 도움이 됐어요.
둔촌주공아파트를 더 깊게 알기 위해 건축학과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그 공부의 결과가 이번 책인데요.
처음에는 둔촌주공아파트가 얼마나 좋은지 입증하고 싶었어요. 모르는 분야니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원에 가게 됐죠.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하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더라고요. 지도교수님인 박철수 교수님이 “그럼 인규 씨가 궁금한 것, 알고 있는 것을 다 써보세요.” 하셔서 쭉 적어보니 구석구석 궁금한 것이 많더라고요. 교수님이 대다수 아파트 단지들이 40년 정도 되어서 재건축을 하고 있는 시점이니, 둔촌주공아파트의 생애 전체를 다뤄보는 게 의미가 있겠다고 하셨죠. 신기하게도 파고 들어갈수록 둔촌주공아파트의 문제가 다른 대단지와 엮여 있다는 게 보이더라고요. 하나의 대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것이 신기했고, 여러 겹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한국 근현대 주택사를 연구하신 박철수 교수님과의 인연도 각별했다고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할 때,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는데 자연스럽게 아파트에 관심 있는 분들과 인연이 생기더라고요. 그중 ‘살구나무 아랫집’이라는 계정을 쓰는 분이 엄청난 자료들을 올리시더라고요. ‘와, 정말 대단한 덕후다’ 했는데, 어느 날 메시지가 온 거예요. 박철수 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둔촌주공아파트의 기린 미끄럼틀 사진을 책에 쓸 수 있는지 문의하셨어요. 그 후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교수님을 찾아뵈었죠. 참 신기한 사제지간이었어요.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주제에 관해서 할 말이 있으면 트위터 메시지로 새벽까지 수다를 떨기도 했거든요.
논문을 쓰는 동안에도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았는데요.
논문을 본격적으로 쓸 때, 아파트가 하나둘 철거되기 시작했어요.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과정이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철거도 힘들고 공부도 힘드니까.(웃음) 논문이 나오고도 계속 재건축에 대한 새로운 이슈가 터지는 바람에 책 출간이 늦어졌죠.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통해 사라지는 것을 기록하고 주변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번에는 연구 대상으로서 아파트를 바라보셨는데요.
둔촌주공 프로젝트로 아파트 안을 보았다면, 논문은 울타리 바깥에서 아파트를 바라보는 느낌이었어요. 사실 프로젝트를 하면서 혼란들도 있었거든요. 단지에서 자라난 사람들과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 좋으면서도 ‘우리끼리는 좋은데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대단지에 산다는 것이 사회 전체로 보면 특수한 경험이잖아요. 다른 환경에 살아온 사람에게 둔촌주공의 경험을 들려주면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같은 서울 안에서도 각자의 경험이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혼란이 공부를 하면서 정리된 것 같아요. 지금은 둔촌주공아파트에서 경험한 좋은 것들이 특정 계층만이 누릴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필요한 것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요. 아파트 단지의 삶을 경험해본 사람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아파트 사람들은 왜 저럴까 의문을 품었던 분들도 이 책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1960년대 개발 정책을 검토하면서, 둔촌주공아파트가 사실은 ‘체제 순응적이고 정권 친화적인 중산층 집단’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임을 아셨죠. 자라난 환경을 바깥에서 바라본 경험은 어땠나요?
내가 이래서 나이브했구나.(웃음)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산 이웃들이 다 정말 순했거든요. 온실 속의 화초 같달까. 스스로도 나 왜 이렇게 세상을 모르지 했는데, 자료를 보면서 체제 순응적인 환경이 주어져서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대단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특정 계층이 폐쇄적으로 모여 살았던 것이 문제라는 것도요. 오히려 특수한 조건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주어진 대로 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고요.
둔촌주공아파트가 지어질 당시, 대한주택공사의 설계방식을 보고 놀랐어요. 천편일률적으로 아파트를 찍어냈을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녹지와 지형을 고려하고 놀이터와 보행자 도로를 충분히 두었는데요.
우리가 자라날 때는 아파트를 비하하는 말을 많이 들었잖아요. 미디어에서 매일 성냥갑 아파트라고 하면서 빨리 재건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도 모르게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당시의 자료를 보면, 대한주택공사가 모더니스트 건축 집단으로서 전문가의 의견도 들으면서 주택 품질을 높이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지금은 이렇게 녹지 공간과 놀이터가 많은 환경이 없죠. 요즘 아파트 단지에 둔촌주공아파트 같은 나무가 우리 주변에 있기는 쉽지 않고요. 오히려 둔촌의 환경이 지금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가치를 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둔촌주공아파트가 우리가 지금 사는 환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맥락을 이해하는 지층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둔촌주공아파트의 분위기도 재건축을 기점으로 달라졌는데요. 무려 20년을 끌었죠.
재건축이 20년까지 걸린 건, 단지가 너무 컸기 때문이에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가 알려지고 많은 분들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는데요. 다른 프로젝트들은 책 한 권에 아파트에 대한 기록부터 재건축 후까지 다 담겼더라고요. 왜일까 생각해 보니 규모 자체가 달랐어요.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는 지나치게 커서 그 안에 너무 많은 이해관계와 과정이 필요했던 거죠.
“사실 재건축을 추진하는 이들에게서도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에 대한 공감을 얻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139쪽)고요.
당시에는 재건축을 추진하는 분들이 제가 사랑하는 장소를 없애려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재건축 조합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그분들도 저처럼 여기를 사랑했던 사람들임을 알게 됐어요. 금전적 이득도 있겠지만, 노후를 위해서 평생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재건축이 되어야 하는 현실적인 사정들이 있더라고요. 재건축을 단순히 재산을 뻥튀기하기 위한 행위로만 바라볼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조합도 그 안에 너무나도 다른 성향과 목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고요.
문제는 재건축 과정에서 실제 거주하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영되는가예요. 투기 목적으로 들어오는 세력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재건축 과정을 지켜보면서, 실제 거주하기를 원하는 조합원들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저는 조합원이 아니지만, 이웃이 힘들어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럼 재건축을 둘러싼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보통 미디어에서 조명하는 건, 분양가를 둘러싼 잡음이에요. 그 원인으로 정부 규제, 조합의 욕심, 건설사의 입장 등을 짚지만, 20년의 타임라인을 쭉 보면 너무 많은 문제가 켜켜이 쌓여 있어서 어느 하나로 특정할 수 없어요. 조합만 욕심을 부린다고 말하기에는, 그간 조합원들이 왜 누군가를 불신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해되고요. 이게 조 단위의 사업이잖아요. 조합원이 중심이 되지만 이분들이 큰 규모의 사업을 꾸려갈 전문성이 있지는 않거든요. 그럼에도 사유재산권이 침해되는 게 싫어서 공공의 개입을 절대로 반대했어요. 그 부분이 이상했어요. 결국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사업이 위기가 고조됐을 때, 공공의 힘을 빌리려고 했거든요. 대단지 집단이 한 동을 차지할 정도로 커서 목소리가 크고 투표권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책을 읽고 ‘역시 아파트가 크면 힘도 크구나’ 하고 장점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더라고요. 사실 저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특정 집단이 뭉치는 게 사회 전체로는 큰 문제라는 점을 짚고 싶었어요.
재건축 과정에서 대단지 안에 살던 동네 고양이와 나무들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도 짚으셨습니다.
지키려면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더 안타까웠죠. 실제로 전문가와 공무원이 작성한 환경영향평가 보고서가 남아 있어요. 그 보고서를 보니 지적한 문제들이 나중에 실제로 다 터지더라고요. 한 서울시 공무원은 둔촌 습지를 지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디테일한 지시를 썼고, 주민들은 단지 내 고양이와 나무를 지켜달라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재건축 과정에서 온전히 반영되지 않는 걸 보고 허탈하기도 했지만, 자료를 살펴보며 위로가 되기도 했어요. 나만 이상하게 느낀 게 아니구나,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목소리를 내면 조금이라도 바뀌는구나. 그게 희망처럼 느껴졌어요.
언론의 보도도 급격히 달라졌다는 점을 짚으셨습니다. 둔촌주공아파트가 만들어질 초기에만 해도, 진정 서민을 위한 아파트인지 비판의 목소리가 언론에서 나왔지만, 현재 대부분의 언론들은 재산가치에 초점을 맞추는데요.
한 시대가 공유하는 상식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느낌이 들어요. 그런 감각을 만들어가는 것 중 하나가 언론인데, 대다수의 관심이 돈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요.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을 둘러싼 기사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지키려는 가치가 돈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물론 가끔 사회 문제로서 사안을 다루려는 기자님들도 있었지만요.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하면서 많은 언론, 방송 인터뷰를 했는데요. 그렇게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구성원들이 계층적으로 동질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중산층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갈 수 있고, 그렇기에 중산층한테 도움이 되는 말들을 반복하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특정 계층의 목소리만이 크게 들리는 거죠.
현재 지어지는 아파트와 비교할 때, 둔촌주공아파트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제가 둔촌주공아파트 단지에서 사랑했던 것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충분한 녹지와 놀이터, 안전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보행로는 사실 둔촌주공뿐만 아니라 도시의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많은 사회적 자본들이 대단지쪽으로 쏠리고 있고, 일부 사람들만 그것을 누리죠. 둔촌주공에 있었던 경험들이 사회 전체로 넓어졌으면 해요.
재건축과 재개발이 이미 익숙해진 시대잖아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주거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하면서 만난 많은 분들이 ‘살던 집과 동네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집과 동네를 잃어버리는 것이 보편적인 경험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저 역시도 사는 곳이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불안한 느낌은 아니었겠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많은 일들을 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사람들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시간이 주는 가치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현재 둔촌주공아파트에 대한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다고요.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하는 10년 동안 제가 생각한 것을 풀어낼 예정이에요. 많은 분들이 이 프로젝트를 왜 시작했는지, 저라는 사람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궁금해 하시더라고요. 제가 둔촌주공아파트의 환경에서 받은 영향과, 이렇게 집을 상실하는 현상이 보편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재건축 하면 모두 전과 후를 비교하지 실제로 단지 울타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잘 모르잖아요.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있었던 사람으로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그런 소회를 담고 싶어요.
*이인규 2013년부터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하고 기리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에서 둔촌주공아파트의 40년 생애를 다룬 논문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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