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찍힌 노동자가 바라보는 노동의 세계
『일할 자격』 희정 저자 인터뷰
이 책은 자격이 박탈된 인물들의 소외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온 사회적 시선을 의심하고 뜯어보며, 그간 우리가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일할 자격의 타당성'에 대해 묻는다. (2023.05.10)
다양한 노동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노동과 관련한 열네 권의 책을 펴낸 기록 노동자 희정은 이번 책 『일할 자격』에서는 노동 시장의 문턱을 넘지 못하거나 그 경계에 서 있는 인물들을 만난다. 게으르고, 불안정하고, 늙고, 의지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좋은 노동자와 나쁜 노동자를 가르는 자격을 탐구하는 이 책은 자격이 박탈된 인물들의 소외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온 사회적 시선을 의심하고 뜯어보며, 그간 우리가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일할 자격의 타당성'에 대해 묻는다. 일터의 한가운데에서 잠시라도 나태하고, 아프고, 무기력한 상태를 경험한 사람에게, 나태하고, 아프고, 무기력할 언젠가가 두려워지는 사람에게, 그러니까 일터에 서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킬 책이다.
이전까지는 직장 내에서 부당한 일을 겪은 이들을 주로 만나오셨다면, 이번 책 『일할 자격』에서는 직장 문턱조차 넘기 어려운 이들에 주목하셨습니다. 이 책을 집필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해요.
제가 직장 문턱을 넘기 어려운 이들의 존재를 인지한 것은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작업을 하면서부터였어요. 그전까지는 해고나 산재로 인해 일터에서 튕겨 나온 이들을 주로 인터뷰했었고, 그들이 다시 돌아가려는 일터의 절대성을 별로 의심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성소수자들의 노동을 기록하면서 직장 문턱이라는 경계가 크게 와닿았지요. 누가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지의 문제는 그 공간이 무엇으로 유지되고 있는지의 문제와 맞닿아 있거든요. 이 문제를 조금 더 파고들어 보고 싶었고, 그게 일할 자격을 묻는 일까지 이어졌어요.
'정상 노동자성'을 의심하고 뜯어보는 책이지만,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의 위계를 전복해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인터뷰이를 대하면서 찾아오는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것이 어쩌면 작가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런 부분을 어떻게 마주하며 책을 쓰셨을지 궁금해요.
조심스러운 일이었어요. 조심스러웠지만 쓸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인터뷰에 응해준 이들이 이 기록의 의미와 기획 의도에 크게 공감을 해주었기 때문이에요. 자신들도 고민해왔거나 할 말이 있던 주제다라는 반응. 그렇게 용기 내준 사람들이 있어서 저도 선뜻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고요. 또 다른 측면에서는, 혼란과 갈등은 믿음이나 존중과 대척점에 있는 말이 아니라 생각해요. 오히려 기록자의 혼란이나 내면의 갈등은 인터뷰이를 믿거나 존중할 때 나오는 태도라고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기록자에게 어떤 동요도 끼치지 못한 인터뷰나 기록 과정은 오히려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그런 면에선 저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책에는 나와 연결된 정체성을 위주로 담아주셨다고 하셨는데, 혹시 이 책에 다 담지 못한 다른 낙인찍힌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있을까요?
실제로 인터뷰를 하고도 책에 담지 못한 내용이 있어요. '단순 반복 노동'이라 불리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도 그중 하나인데요. 사람들이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암묵적으로 단순하고 하급한 노동이라 치부하는 특정 노동이 있잖아요. 어떤 노동을 단순한 일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일을 단순하고 반복적인 하위의 노동이라 여길까? 제가 계속 의문를 품는 질문이거든요. 단순 노동을 구분하는 사회적 기준을 통해 이 세상이 노동을 조직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고 싶달까요.
『일할 자격』을 쓰시고 나서 맞이하게 된 변화가 있을까요?
노동 사안을 기록하는 내내 자신에게 꾸준히 물었던 것이 "나는 왜 노동에 관해 쓰는가"였어요. 제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부제가 이렇거든요.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
책의 제목은 『일』(이매진, 2007)이고요. 책을 쓸 때마다 그 답을 다양한 버전으로 찾아 나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번 책을 쓰고 나서는 조금 다른 결의 답을 찾았어요. 이 말을 하면 『일할 자격』 담당 편집자 선생님이 남사스러워하실 것 같기도 한데. 그분 후기에서 이런 글을 보았거든요.
"책이 내내 주목하는 '노동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원고 밖의 내게도 매시 매초 당면한 주제여서 한 줄 한 줄이 거울처럼 나의 노동을 비추며 말을 걸었다."
나는 왜 노동에 대해 쓰는가. 그건 매시 매초 당면한 나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어요. 조금 더 애틋하게 그리고 후련하게 노동에 관해 글을 쓸 것 같습니다.
노동에 관한 심도 있는 글을 쓰시는 만큼 작가님의 책을 읽을 때면 '노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새롭게 환기되는데요' 이 물음의 답이 결코 하나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번 책을 마무리하시고 난 시점에서는 혹시 어떤 대답을 들려주실 수 있으실지 여쭙고 싶어요.
『일할 자격』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이 세상이 그간 잡스럽다고 여긴, 생산력과 효율이 떨어진다고 여긴, 사랑과 헌신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일들을 호명하며 묻죠.
"우리에게 '이것이 노동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권한이 있을까."
타인의 노동을 세상의 잣대로 가르는 행위를 멈춘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우리의 노동이 무엇인지' 결정할 권리와 힘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노동을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 그래서 노동에 관해 쓸수록 노동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노동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을 믿으니까요.
노동절을 맞아 『일할 자격』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실까요?
책 속의 한 문장을 함께 읽고 싶어요.
휠체어 이용자와 속도를 맞춰 걷는 이가 없다면, 광장에 나온 장애인의 연설을 귀 기울여 듣는 이가 없다면, 그들이 광장에서 돌아간 집에 저녁 식탁을 차리는 이가 없다면, 그 식탁을 차리는 이의 성별과 노동을 말하는 책이 없다면, 그 책을 책방 책장에 꽂아 정돈하는 이가 없다면 세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것이 노동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권한이 있을까. 이 질문은 세상을 작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그 작동 체계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 선택하게 한다.
처음 노동 기록을 시작했을 때는 책을 통해 "인간답게 일하고 싶다"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일터에서 배제된 소수자 정체성에 관한 기록을 하면서는 "나답게 일하고 싶다"고 말했고요. 여러 권의 징검다리를 건너와 이번 책에서는 "일의 세계 안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우리의 오롯한 권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일할 자격』이 던지는 화두를 계속 이어가 보고픈 독자분들을 위해 추천해주실 다른 콘텐츠가 있을지도 궁금해요.
지인으로부터 이번 책을 보고 떠올랐다며 <콩트가 시작된다>라는 일본 드라마를 추천받았어요. 청춘을 소재로 한 드라마인데, 등장인물들이 꿈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이런 대사가 있다고 들었어요.
"우린 실패한 게 아니야. 시간이 다 된 거지."
드라마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일할 자격』이 결국 일할 자격이 아닌 살아갈 권리에 관해 말하는 책이라 생각하는데, 그렇기에 추천을 받은 것 같아요. 같이 보고 싶습니다.
*희정 "직장 문턱을 넘지 못해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농담처럼 스스로를 소개해온 희정 작가는 '일하는 사람인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자는 마음으로 이번 작업에 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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