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에세이 『집이라는 그리운 말』

『집이라는 그리운 말』 미진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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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행복은 애써 노력해야 달성하는 목표가 아니더군요. 하루를 잘 살아낸 개인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행복한 집'이라는 생각입니다. (2023.03.29)

미진 작가

첫 에세이 『집이라는 그리운 말』을 내놓은 작가 미진은 "우리 집은 좋으면서도 슬펐다"라고 고백한다. 비바람에 슬레이트 지붕이 들썩이고 송충이가 비처럼 내리던 만리동 꼭대기 집, 가을비에 세상 모든 낙엽이 모여드는 아현동의 반지하 연립 주택, 엄마의 평생 소원대로 마침내 장만한 네모반듯한 봉천동 집, 결혼 후 세입자로서 아홉 번의 이사를 하며 거쳐온 때로는 춥고 때로는 따뜻했던 집. 작가는 세상에 태어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친 몸을 누인 그 모든 집이라는 공간에 촘촘하게 엮은 그물을 깊이 내려 단단한 기억을 길어 올린다.



『집이라는 그리운 말』. 제목만으로도 아련한 추억이 가득 묻어나는 것 같아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지 소개해주세요.

'나'라는 존재를 나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책입니다. 한 송이 꽃이 씨앗 몇 개와 흙 몇 줌, 흔한 햇살에서 시작되듯, 지금의 나를 말하려니 내가 살던 집, 그곳에 살던 사람, 익숙한 음식, 뛰어놀던 동네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 책은 어렴풋한 기억의 한 점에서 시작해 현재에 이릅니다. 어린 시절 누렇게 탄 아랫목에서 누린 따뜻한 사랑과 열두 가구가 모여 살던 동네의 풍경, 반지하 집에서 보낸 사춘기, 마침내 우리 집을 가졌을 때 찾아온 감격, 그리고 어른이 된 이후 제각기 다른 여러 공간에서 겪은 춥고도 따뜻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평범해서 사라져가는 기억들을 조각조각 이어보았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가진 힘을 말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있을까요?

보물찾기 해보셨죠? 한쪽에서는 친구들이 보물 표시가 있는 쪽지를 몇 개나 찾아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데,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풀숲을 헤치고 고개를 젖혀 키 큰 나뭇가지를 살폈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런데 포기하고 돌아서는 순간, 하얀 쪽지가 삐죽 눈에 들어왔어요. 감격이었지요. 우리의 기억도 그렇습니다. 현재를 살기에도 바쁜 사람에게 지난 시절을 돌아보는 일이 무용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깨끗이 지우거나 덮고 싶은 과거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별다른 기대 없이 마음의 고개를 돌리는 순간, 분명히 여러분 중 누군가는 묵은 먼지가 내려앉은 기억의 틈새로 반짝이는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함께 보물을 찾아보자고 여러분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그 제안서와 같습니다.

『집이라는 그리운 말』을 쓰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과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오래 들여다보지 않아 흐릿했던 기억들이 또렷해졌어요. 알 수 없어 모호했던 감정들이 조금 더 이해되었습니다. 단편적인 기억들을 맥락에 맞게 줄 세우고 나니, 구석구석 찌들고 묵은 먼지를 청소한 듯 가뿐했습니다. 책을 다 쓰고 나서는 주변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몇몇 잊힌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랐어요. 그동안 까맣게 잊었어요. 누구나 기억하고 기억해야 하는 큰일은 잊고, 사소해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오래 붙들고 살았지요. 서로 다른 기억을 맞춰보는 과정이 좋았습니다. 물론 내가 웃으면서 말한 과거의 한때가 누군가에게는 힘든 순간일 수 있어 머뭇거렸고, 가끔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집이라는 그리운 말』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꼭지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길게도 짧게도 느껴지는 시간의 속성 탓일까요. 어린 시절의 기억은 느린 화면으로 또렷이 재생되는데 어른이 되고 난 후의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고래나 잡을 법한 성긴 그물이지요. 다행히 글을 쓰며 오래 들여다보니 물속 깊이 가라앉은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빠와 함께 집짓기」가 그랬어요. 마침내 갖게 된 우리 집을 식구들은 밤낮 없이 고쳤어요. 해가 있을 때는 갈라진 외벽의 틈을 시멘트로 메우고 화단을 만들었어요. 밤이 되어 실내 불빛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거실 벽과 천장에 니스칠을 했고요. 집주인이 된 아빠와 덩달아 신이 난 식구들의 설렘이 지금도 느껴집니다. 곡진 사연과 어느 만큼의 희생을 품고 완성한 집에서 보낸 시간이 짧아서 더 아쉬웠습니다. 오래 기억할 생각입니다.

책 곳곳에 사라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혹시 그리움을 달래는 작가만의 방법이 있나요?

그리움을 글로 묘사하고 그날의 상황을 그리다 보면 불쑥 해가 지듯 그리움이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그리움을 노래합니다. 그들이 쓴 책을 읽으며 그리움에 깊이 공감합니다. 아니 에르노가 말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내 것인 양 아프고, 공선옥 작가의 『춥고 더운 우리 집』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곤 합니다. 저는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그리움의 시간을 지나갑니다.

작가님이 꿈꾸는 '행복한 집'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요.

가족의 행복은 애써 노력해야 달성하는 목표가 아니더군요. 하루를 잘 살아낸 개인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행복한 집'이라는 생각입니다. 책에서 이렇게 말했죠.

노동을 한 개인들은 서로의 육체를 아끼고 정신을 놓아주었다. 지친 몸을 누이기를, 혼자서 온전히 자유롭기를,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기를, 편히 쉬기를. 각자의 방에 안전한 울타리를 치고, 우리라는 이유로 무례한 침입자가 되지 않기로 했다. 하늘을 담을 창문이 있어 바람도 달도 해도 방주인만 허락한다면 언제든 놀다 갈 수 있었다. 우리 방은 그들로 날마다 북적였다.

제가 꿈꾸는 행복한 집은 그렇습니다.

『집이라는 그리운 말』을 쓰기 전과 후에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앞으로의 계획과 함께 독자에게 바라는 말씀이 있다면요?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것이 더불어 산 사람들과 나를 둘러싼 공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책을 쓰면서 더 많은 감사거리를 발견했고, 한편으로는 조금 더 품이 넓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기대도 합니다. 과거의 추억은 고맙게도 휘발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순간마다 기억되어 다독여주었지요. 지나친 기억 속에 묻힌 아름다운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책을 썼습니다. 무심코 들어 올린 무거운 바윗돌 사이로 핀 노란 민들레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



*미진

산이 바라보이는 방에서 글을 쓴다. 싹싹 비운 식구들의 밥그릇과 밤새 쉬어 가벼워진 눈으로 책 읽는 시간을 좋아한다. 작고 평범한 것들에 감사하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들에 더 오래 시선을 둔다. <문학의봄>에서 단편 소설 「아들이 사라졌다」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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