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식물에게도 권리가 있으니까요 (G. 허태임 식물분류학자)

책읽아웃 - 황정은의 야심한 책 (304회)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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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잖아요. 한 종이고. 그래서 저는 만난 식물을 앞에 두고서는 "나는 호모사피엔스, 그리고 허태임이라는 개체"라고 인사해요. (2022.11.03)


저녁 7시 40분. 강행군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 오늘 봄꽃을 만난 게 마치 먼 나라의 일처럼 아득해져서 나는 무언가를 불러내본다. 존경하는 신경 의학자 올리버 색스는 노년에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나의 생애 (My Own Life)'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이른 봄꽃을 시작으로 식물의 개화와 개엽이 숲을 차츰 초록으로 채울 것이다. 꽃을 틔우고 꿀을 빚고 열매의 육즙을 채워 씨앗을 지키는 식물의 생애. 그것을 기록하는 나의 생애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다.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서 '이 아름다운 행성'을 오늘도 내일도 내내 조화롭게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여장을 푼다. 

밤 9시 남쪽 밤하늘에 등장한 오리온자리가 총총 핀 남도의 봄꽃 같다. 오래지 않아 꽃들의 북진이 시작될 것이다.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에서 읽었습니다. 허태임 학자가 자신과 식물과의 관계를 연애라고 이름 붙인 까닭인지, 이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는 일이 제게는 조용하고 애틋한 사랑을 목격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보러 내가 가야 하고, 새벽 숲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 핀 그를 만나 다음 해에도 그의 자리가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무사해서 꼭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그를 그 자리에 가만히 두고 오는 식물학자의 마음을 같이 겪는 일이기도 했고, 또한 식물을 만나러 가는 그의 길에 조용히 동행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쓴 작가를 오늘 만나보겠습니다.



<인터뷰 – 허태임 식물분류학자 편>

오늘은 전국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를 모셨습니다. 식물 분류학자로서 '식물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일'을 하는 사람,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을 쓴 허태임 작가님입니다.

황정은 : 먼저 작가님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은 어떤 책인가요?

허태임 : 제가 하는 일이 식물 옆에 머물면서 식물들의 면면을 관찰하는 일이에요. 그걸 하다 보니까 제가 "내가 하는 일이 뭐, 풀에 대한 기록(草錄)이고 나무에 대한 기록(木錄)이지"라고 습관처럼 말했어요. 그러다 보니 책 제목도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책에 나오는 내용들이 제가 하는 일이자 제 생활들이에요. 책의 세 개의 꼭지에서 첫 번째가 저의 일상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두 번째가 식물에 대한 이야기들, 세 번째가 어떻게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거쳐서 제가 가장 책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거든요. 책 읽고 나서는 '나만의 초록목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 기대했습니다.

황정은 : 책이 출간되고 많이 바쁘셨을 것 같은데요. 라디오를 비롯해서 다양한 매체와 인터뷰도 하셨고, 지난달에는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컨퍼런스에도 참여를 하셨고, 용인에 있는 남사도서관에서 강연도 진행하실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활동들을 하면서 힘들 때도 또 즐거울 때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허태임 : 본의 아니게 책 나오고 여기저기 관심도 많이 받고 연락도 많이 받았어요. 근데 제가 극내향인이에요. 수줍어서 사람들 앞에 서는 거 별로 안 좋아하고 말주변이 그렇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본의 아니게 또는 의도 하에 사람들 앞에 설 일들이 있었거든요. 가서는 잘 해내고 오는데, 돌아오면서는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역시 사람들 속에 있는 것보다 식물 옆에 있는 게 좋구나.' 물론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도 좋지만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또 '빨리 식물 옆에 가야지' 이런 생각이 들어가지고요.(웃음) 근데 불러주신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눴던 게 좋았어요. 책이 나오고 나니까 또 다른 어떤 공동체, 연대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책 읽어보신 분들과. 책은 또 책의 운명이 새롭게 펼쳐지는 것 같고요. 

황정은 : 그렇죠. 

허태임 : 거기에서 만난 분들이 책 가지고 와서 무명작가인 저한테 사인도 요청하시고, 이러이러한 내용이 좋았다는 것도 얘기해 주시고, 그러면서 '아, 이런 느낌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황정은 : 독자를 처음 경험하신 거네요.

허태임 : 네, 그렇죠.

황정은 : 어떠세요? 

허태임 : 분석하자고 그런 건 아닌데, 독자층이 조금 나뉘어요. 앞서 책이 세 개의 꼭지로 나눠졌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세 개의 꼭지로 딱 나뉘는 게 있어요. 

황정은 : 첫 번째 챕터 좋아하는 분, 두 번째 챕터 좋아하는 분... 각각 따로군요.

허태임 : 네, 그게 신기하게도 그루핑(grouping)이 돼요. 1부는 문학하시는 분들이 많이 좋아해 주셨어요. 그리고 2부는 식물에 관심 있는, 식물 쫓아서 다니시는 분들. 또는, 요즘에 한창 반려 식물이나 정원 일 많이 하시는 분들께서, 식물에 조금 초점 맞추는 분들이 좋아하셨고요. 3부는, 제가 제일 애착가는 챕터이기도 한데, 특히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많이 공감을 해줬어요. 그러면서 이런 표현도 저한테 해줬어요. '가치 있는 소비'. 책 한 권을 의미 있게 자기가 소비를 했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참고로 3부가 인간에 의해서 많이 훼손된 자연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황정은 : 그렇습니다. 요즘 20~30대들이 기후 위기라든지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그 챕터에 많이 공감을 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1부 2부 3부 고르게 다 좋았는데, 3부에서 그런 글들을 한 꼭지 한 꼭지씩 읽어나가면서 '허태임 작가님이 이 챕터까지 독자를 이끌어 들이려고 앞에 그렇게 아름다운 문장들을 쭉 쓰셨구나'하는 생각이 확 들었습니다.(웃음) 바로 본격적으로 이 얘기를 하고 싶으셨구나, 라는 짐작을 했는데 맞았군요.(웃음)

허태임 : 맞습니다.(웃음) 제가 사실 (출판) 계약을 덜컥 해놓고 원고가 쌓이지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본업이 있으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연재처를 마련을 하고 원고를 쌓는 일에 몰두를 했습니다. 근데 제가 원고를 쓸 때마다 제가 정말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 지금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많이 적게 되더라고요. 그랬더니 주변에서 연재글 읽어보신 분들이 '이거 너무 환경 운동가로 가는 거 아니냐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근데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그거여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원고가 쌓이고 나니까 고르게 모였더라고요. 너무 편중되진 않았지만, 작가님 말씀처럼 사실은 '1부와 2부를 통해서 3부까지 부디 제발 도착해 주세요'라는 생각으로 글을 썼습니다.(웃음)

황정은 : 1년의 절반 이상을 숲에서 보낸다고 쓰셨는데요. 최근에 다녀온 숲은 어디였나요? 거기에서 어떤 식물을 만나고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허태임 : 지금이 숲이 겨울을 준비할 때예요. 그래서 황량하기도 하죠. 우리 주변보다 숲 속은 더 일찍 가을이 와요. 특히 산은 봄은 더디게 오지만 가을은 빨리 찾아오거든요. 

황정은 : 왜 그럴까요? 볕이 덜 들기 때문인가요?

허태임 : 산은 아마도 고도 차이 때문에, 또 제가 다니는 산들이 대부분 1200~1300미터 이상의 산들이어서 이미 9월 말에 산정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었거든요. 그래서 이 무렵은 그렇게 산 위를 가는 것보다 조금 저지대나 조금 남쪽으로 따뜻한 지역에 가서 식물을 관찰해요. 지금부터 12월까지는. 지난 주말에는 쉬는 날 제가 관찰하고 싶은 남쪽의 식물이 있어서 부산 '이기대'라는 곳에 다녀왔고요. 해운대의 마천루 같은 빌딩이 조망하고 있는 게 오륙도라는 섬이 보이는 라인인데, 그 해안 라인이 이기대예요. 이기대라는 곳에 희귀 식물들 몇 종이 모여 있어요. 제가 관찰을 해야 될 궁금한 식물이 있어서 갔었는데 찾지는 못하고 왔습니다. 이건 주말의 일이고, 지난 주 중에는 수목원 주변에 제가 사는 집 근처 산들을 좀 다녔어요. 백두산부터 백두 대간 따라 내려오는 큰 산들이,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그 구간 사이에 수목원이 있어요.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정상들을 이은 그 능선을 마루금이라고 하는데 딱 그 구간에 제가 살고 있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동네 뒷산 같은 개념인데...

황정은 : 정말 큰 동네 뒷산이네요.(웃음)

허태임 : 네, 그 산들 한 세 군데를 다녔습니다.(웃음) 이건 업무로 다녔고요.

황정은 : 어떤 식물을 만나러 간다고 늘 만나고 오는 건 아닌가 봐요.

허태임 : 아니죠. 제가 수목원에서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가 올해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우리 산에 얼마나 많은 식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 그래서 한 산을 정해놓고 그 산 안의 식물들을 다 조사를 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그 사이 사이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다 가서, 최대한 누락되는 거 없이 식물을 다 관찰하면서 기록을 하는 일이거든요. 그건 어떻게 보면 한 장소에 있는 식물들을 다 밝히는 거고, 그래도 큰 부담은 없어요. 가서 보이는 식물 기록하면 되니까요. 두 번째가 사라져가는 식물들을 쫓아다니는 일들이거든요. 그 일을 제가 중점적으로 하고 있고. 그런데 그 식물들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문헌 조사나 기존에 있던 식물 표본들을 다 뒤져서 머릿속으로 먼저 분포점들을 다 그리고 나서 찾아가는 타겟형 조사거든요. 

황정은 : 있을 만한 장소를 짚는군요. 

허태임 : 네. 어떤 환경에서 산다는 걸 알면 제가 위성 지도를 띄워놓고 가늠이 돼요. 이쯤 가면 있겠구나. 예를 들어서 10곳을 목표로 하고 간다, 그러면 3.5가 만날 수 있는 확률입니다.(웃음)

황정은 : 저는 그것도 경이로운데요. 짐작만으로 찾아가는 거잖아요.

허태임 : 그런데 10번을 가서 10번을 실패할 수도 있고, 그런데 10번을 가서 한 번을 만날 수 있다면 가야 되잖아요. 그래서 두 번째 이 업무가 조금 부담이 많이 돼요. 그런데 그 식물들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뭐, 말로 표현을 못 하죠.

황정은 : 산에서 그런 식물 만나서 기쁘면 뭐 하세요?

허태임 : 인사 먼저 해요. 똑같이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잖아요. 한 종이고. 그래서 저는 만난 식물을 앞에 두고서는 "나는 호모사피엔스, 그리고 허태임이라는 개체"라고 인사해요. 제가 오래 쫓아다닌 벌깨풀이라는 식물이 있는데요. "벌깨풀, 너는 꿀풀과에 속하는 식물 한 종이지, 너는 지금 여기 살고 있구나" 이렇게 인사를 하는 정도입니다.(웃음) 

황정은 :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식물의 사진을 찍으시잖아요. 사진을 찍기 전에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허락을 구한다는 서술이 나오더라고요. 저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로빈 월 키머러 생각도 나고. 『향모를 땋으며』에서 원주민 얘기도 나오지 않습니까. 어떤 의례인지 궁금하더라고요.

허태임 : 앞서 말씀드렸듯이 한 종으로서 생명체예요. 그러면 그 친구한테도 어떤 권리가 있을 거고, 제가 식물권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는데, 식물에게도 권리가 있으니 저한테는 의식 같은 거예요. 해도 되겠냐고 묻는 것도. 저는 어쩔 수 없이 식물을 채집을 해야 해요. 기록으로 남겨야 되고 채집이 연구의 한 방법이기도 해서요. 그런데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채집은 지양하자는 주의고, 저는 채집할 때도 그 군락에서 사는 개체 수를 보고 "여기에서 이 부분은 제가 가지고 가서 연구를 좀 해도 될까요?" 동의를 구하고 채집을 합니다.(웃음) 그래서 제 주변에 같이 다니는 팀원들은 저한테 '식물 또라이'라고 그래요.(웃음)

황정은 : 좋은데요, 저는? (웃음) 그 산속에서 식물 앞에서 "이만큼을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식물 분류 학자의 모습이 확 상상이 돼서 제가 다 좋습니다.(웃음)



*허태임

식물분류학자. 대학에서 목재해부학을, 대학원에서 식물분류학을 공부했다. 「한반도 팽나무속의 계통분류학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DMZ자생식물원을 거쳐 현재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보전복원실에서 우리 땅에서 사라져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1년의 절반 이상은 전국 곳곳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로 살아간다. 식물과 관련한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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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허태임 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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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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