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그린커, 정신 질환에 대한 낙인을 추적하다 - 『정상은 없다』
『정상은 없다』 출간 기념 서면 인터뷰
한국은 다름이 같음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사회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경우에서처럼, 차이는 사실 성취로 가는 길입니다. (2022.08.30)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지금, 정신 질환에 대한 중요한 연구서가 국내 출간됐다. 『정상은 없다』는 문화 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 교수가 '정신 질환'의 문화적 낙인을 추적한 책이다. 정신 질환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눈 문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는 '자본주의', '전쟁', '의료화'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낙인을 형성하는 역사적, 문화적 힘을 분석한다.
'정상성'이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그린커 교수는 정신 질환을 '스펙트럼'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정신 질환은 하나의 스펙트럼상에 존재하는 '정도'의 문제일 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환상이라는 관점이다. '비정상'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정신 질환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요인임을 질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연구서이지만, 그린커 교수의 자전적인 이야기도 담겼다. 전작 『낯설지 않은 아이들』에 이어 이번 책에도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딸을 통해 경험한 일들이 함께 녹아있다. 또한, 대대로 정신과 의사를 지낸 전문가 집안에서 자란 그가, 증조할아버지대에 강력했던 '낙인'을 4대에 걸쳐 지워나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그간 한국에서 최초로 자폐 스펙트럼 역학 연구를 시행하며, 한국 사회에 지속적인 관심을 이어왔던 그린커 교수를 서면으로 만났다.
교수님은 그간 한국의 자폐 스펙트럼 역학 연구, 남한의 탈북민 연구 등 한국과 인연을 맺어 오셨습니다. 이번 한국어판을 출간하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한국 출판사들이 자폐증에 관한 책 『낯설지 않은 아이들』과 『정상은 없다』를 출간해 주신 것에 무척 감격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지난 20년 동안 한국에서 보인 괄목할 만한 성장 중 하나는 정신 건강 관리에 대한 - 특히 자폐증을 비롯한 발달 장애와 관련한 - 인식 증대 및 교육과 치료의 증가입니다. '낙인'은 여전히 큰 문제입니다. 전 세계 어디서든 그렇죠. 그러나 한국에서의 변화는 놀랍습니다. 그러한 변화에 작은 역할이나마 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역할을 했다면, 그건 순전히 한국 출판사들이 과감하게 도전하여 제 책을 출판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정신 장애'가 아닌 '정신 질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사한 교수님들이 오래전에 '장애'는 제한적이고 문제가 있는 단어라고 가르쳤습니다. 첫째, '장애'는 '정상적인' 정신 같은 것이 있음을 암시하는 단어인데, 우리는 정상적인 정신이 어떤 상태인지 사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둘째, 장애는 신체 또는 정신의 '정상적' 기능 중단을 암시하는 반면, '질환'은 아픔이나 손상의 실제 '경험'을 암시합니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등장인물처럼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을 읽거나 TV드라마를 시청할 때, 우리는 '장애'를 넘어 실제 인간 삶의 모든 측면들을 봅니다. 이 두 드라마 모두 등장인물을 단순화하지 않고 복잡미묘하게 묘사하고, 자신의 장애와 연관된 고통을 줄이고 어른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폐인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교수님은 한국에서 최초로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대규모 역학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셨습니다. 낙인의 양상이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은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1990년대 당시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정신 의학과 교수들은 한국에서 자폐증이 극도로 드물다고 생각했고, 21세기의 첫 10년까지만 해도 많은 교수가 여전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일산에서 동료들과 진행한 연구에서, 우리는 전 세계 어디서든 자폐증 진단을 받으면 어떤 이점이 있냐에 따라 진단율이 크게 영향받을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자폐증 증상이 '애정 결핍'으로 잘못 설명되었고, 특히 어머니들에게 화살을 돌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자폐증 진단을 기피했습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자녀의 고통 때문에 괴로운데 수치심과 낙인으로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더욱이 미국이나 영국 등에 비해 한국의 특수 교육이 드문 상황이어서, 어차피 서비스도 받을 수 없다면 자폐증 진단을 받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서울에서 일부 어머니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경계선 아이들' 같은 문구에서처럼 자폐증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러한 진단을 비밀에 부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에서도 세계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자폐증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을 보십시오! 자폐증 진단은 더 이상 그렇게 수치스럽거나 무서운 상태가 아닙니다.
정신 질환을 뇌나 유전의 문제로 파악하는 정신 의학의 접근 방식을 비판하셨습니다. 정신 의학 관계자들은 명확한 진단명과 생물학적 요인을 밝히면, 낙인이 오히려 줄어들 것이라 주장하는데요. 이에 반대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왜 많은 사람이 정신 질환을 생물학적이거나 순전히 신체적인 질환으로 재구성하려고 하는지 이해합니다. 다리가 고장 난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치료를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정신 건강 관리는 수주, 수개월, 또는 수년간 지체하곤 하죠. 생물학적 모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낙인을 줄이고 사람이 아닌 신체 기관으로 책임을 돌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내가 아니라, 내 뇌가 문제예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정신 질환에 대한 의학적 모델이 가진 문제 중 하나는, 정신 질환뿐 아니라 '모든' 질환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요인 - 생물학뿐 아니라 어린 시절, 트라우마, 빈부, 친구 관계, 교육 등 - 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의학적 모델은 사람의 신체를 고치는 데 초점을 두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고칠 필요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자폐증에 대한 낙인 감소는 의학적 발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한국 사회에서의 태도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신 질환을 '의학적'인 것으로 생각할 때 낙인이 커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몇 연구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정신 질환이 있는 누군가를 화학적 불균형이나 비정상적인 뇌 순환을 겪는 사람으로 표현할 때, 그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 그 사람을 인간들 간의 차이의 스펙트럼상에 있는 누군가가 아닌 손상된 사람으로 볼 이유를 제공할 위험이 있습니다.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들이 의학적 치료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그러나 의학은 그저 많은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암 전문가가 종양 세포에 대해 말해줄 수 있지만, 사회가 그 사람의 결과들 - 수입, 교육, 가족, 종교, 그 밖에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 - 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낙인을 포함한 사회적 스트레스가 모든 건강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을 그의 뇌로 환원하는 것은 그의 유전자나 인종, 성별로 환원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고 비인간적입니다. 정신 질환의 생물학적 모델은 때로 득보다 해가 많을 수 있습니다.
정신 질환을 모든 사람이 지닌 정도의 차이로 파악할 때, 오히려 심각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됩니다. 이 반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람들이 정신 질환의 스펙트럼상에 있다고 보는 관점의 이로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러한 관점이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환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불안'을 예로 들어봅시다. 불안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발달시켜온 것입니다. 만일 불안이 없다면 인간은 죽게 될 것입니다. 도로를 건널 때 좌우를 살피거나 교통 신호를 준수하지 않을 터니까요. 그러나 불안은 때로 우리가 집에서 나가거나 일자리를 유지하거나 사회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심신을 쇠약하게 하고 크나큰 고통을 경험하게도 하죠. 우리는 삶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경험과 지장을 주는 경험 사이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순간이 어느 때인지를 판단하고, 가용한 최선의 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신경다양성에 대한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신 질환에 대한 포괄적 수기가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세분화된 주제(ADHD, 조현병 등)와 사회적 맥락을 밝히는 책(여성과 우울증)이 출간되고 있는데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미국에서는 어떤 추세로 정신 질환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스스로를 신경다양성 옹호자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대한 치료를 받으려는 것은 점점 약점보다는 강점이자 회복력의 증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시작되는 '정신 질환과 지적 장애' 상태에 대한 인식의 증대는 조기 개입 프로그램과 학교의 지원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젠더플루이드는 병의 징후가 아닌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유명인들은 유례없는 수준으로 자신의 정신 질환을 인정합니다. 이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때 아르헨티나에서 정신 분석가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미국의 교수로서 저는 '정상'을 규칙이 아닌 예외로 보고 자신의 정신 건강 필요에 대해 개방적인 학생들을 볼 때면 기운이 납니다. 그들은 남들이 자신을 정의하게 하지 않고 본인이 스스로를 정의합니다. 그들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었던 말들을 자신들을 위해 재전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영우'의 가장 멋진 점은 그녀가 직접 스스로를 자폐인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낙인을 줄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재판에서 그녀는 배심원단에게 말합니다. "저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어 여러분이 보시기에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을 사랑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정의하게 두기보다 스스로를 정의하죠. 그것이 신경다양성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자폐증이 있는 젊은 성인을 자식으로 둔 부모로서, 저는 자폐증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도 흥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우영우 변호사를 보죠! '자력으로 살아남기'라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역설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모험을 하라고, 심지어 실패하라고 권장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 딸이 운동이건, 학교 수업이건, 일자리건, 뭔가를 시도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을 수없이 봤습니다. 이저벨이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다들 자신이 이저벨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그린커 씨, 이저벨은 자폐증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저벨에게 기회를 주세요"라고 말하죠. 이저벨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아닌 경우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영우가 하는 일이죠. (자신을 보호하려고만 하는) 아버지와 언쟁을 벌이며 피난처와 보호는 사실 비인간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잖아요. 모든 사람이 실패하고 좌절감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 성장할 존엄성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자폐증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우영우 같지는 않죠! 그러나 신경다양성에 기회를 주는 것이 항상 완전한 '포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포함'이라는 것이 동화의 다른 말일 뿐이라면 말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장애를 '극복'하고 '우리'처럼 되어 봐"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보수도 훨씬 덜 받고 채용도 훨씬 덜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지적 장애와 심각한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대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편의를 누리면서 일하기, 자원자로 일하기, 시간제로 일하기 같은 다른 형태의 성공에 가치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심지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덜 효율적인 방식으로 일하기도 포함될 수 있죠. 성공과 의미 있는 삶으로 가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낙인이 자본주의의 '생산적이고 자립적인 인간형'과 연관이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한국에서는 기업 채용 과정에서 '인성 검사'를 실시하는데요. 해당 검사의 목적은 "반사회적 성격 결함자, 정신 질환 환자"를 걸러내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이 같은 사례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고, 미국의 참고 사례도 궁금합니다.
고용주들은 종종 자기들처럼 보이고 자기들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채용합니다.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거죠. 그러나 그런 회사들은 다양성과 창의력이 부족합니다. 우영우처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사고하는 사람이 부족한 거죠.
더욱이 정신 질환은 보편적인 형태의 질환입니다.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을 전혀 채용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위해 일해줄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정신 질환을 정의하는 방식에 의거한 어떠한 검사로 회사가 성공적으로 일할 직원과 그렇지 않을 직원을 '선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틀렸습니다. 그런 선별은 회사에서든 군대에서든 혹은 대학에서든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회사 내에서 정신 건강 관리를 권장하는 것이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한 회사 중역의 말에 따르면, 건설 업종에서는 고용주가 직원들에게 정형외과 관리를 받도록 권장한답니다. 이를테면 인지 기술 사업체에서 사람들에게 정신 건강 관리를 받도록 권장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영화와 TV 프로그램도 정신 질환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정신 질환의 특성을 매력적인 캐릭터로 재현하는 문제 등 논의가 풍부하게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가진 매력 중 하나는 남들과 너무도 다른 누군가가 그럼에도 의미 있는 삶을 찾는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영우의 경우는 최고 학력과 최고 점수, 최고 직업의 이상을 이루었고요. 달리 말해, 한국을 포함한 많은 사회의 경직성과 순응성을 고려할 때, 이것은 순응성이 곧 승리로 가는 유일한 길을 아님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이질감'(극복해야 할 차이)이라는 개념에서처럼 다름이 같음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사회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경우에서처럼, 차이는 사실 성취로 가는 길입니다.
저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대단히 좋아하지만,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더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는 등장인물들이 단순화된 캐리커처가 아니며 치료를 받을 만큼 강한 인물들로 보이기 때문이죠. 제 마음을 끈 순간은 '정상적인' 동생 문강태가 자폐인 형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과 똑같이 자신도 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입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의지했고,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그런 의지입니다.
(한영번역/질문 : 양승진, 영한번역/답변 : 정해영)
*로이 리처드 그린커(Roy Richard Grinker)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고 하버드대학에서 사회 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인류학, 국제 문제, 인문 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자폐증, 남한의 탈북민 및 중앙아프리카를 연구해 온 문화 인류학자다. 한국에서 최초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대규모 역학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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