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특집] 캐리어 사이즈만큼의 모험 - 김진영 다큐멘터리스트

<월간 채널예스> 202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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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한 달가량 'out of Seoul(서울 벗어나기)'을 하기로 했다. 'out of Seoul'은 자유롭고 무한한 나를 되찾기 위해 물리적, 정서적으로 서울을 벗어나는, 일종의 사이드 프로젝트이다. (2022.08.11)


미국 시애틀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한 달가량 'out of Seoul(서울 벗어나기)'을 하기로 했다. 'out of Seoul'은 자유롭고 무한한 나를 되찾기 위해 물리적, 정서적으로 서울을 벗어나는, 일종의 사이드 프로젝트이다. 매년 이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담아 '김다큐의 outofseoul'이라는 뉴스레터도 보낸다. 작년에는 무작정 서울로부터 도망친 것이라면, 이번에는 강제 셧다운, 일종의 '갭 먼스 (gap month)'를 가졌다. 올해 초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를 발간한 뒤, 책을 알리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러다 보니 일과 삶을 영점 조절하여 균형 있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책의 메시지와 달리, 내가 의도하지 않은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일을 거절하거나 미룰 수 있는 명분, 나를 지키고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명분을 찾아 굳이 서울에서 10시간이 떨어진 미국 시애틀로 떠났다. 

시애틀에 도착하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종이책을 단 한 권도 챙겨오지 않은 것이다. 혹시 필요하면 전자책을 볼 생각으로, 난생처음 '캐리어에 넣을 책 고르기'를 안 했는데 이건 정말로 완전한 낭패다. 내게 '캐리어에 넣을 책 고르기'는 이번 여행의 테마 혹은 관심사를 반영하는데 이번 여행은 어떤 테마도 관심사도 정해 두지 않고 최대한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 문제였다. 여행의 시시때때마다 생각나는 것들, 눈길과 마음이 가는 것들에 아무 거리낌없이 다가가보자는 마음이 컸다. 

많은 청개구리가 그렇듯, 책을 가져오지 않으니 책이 더욱 읽고 싶다. '읽기에 대한 내 열망이 이 정도였다고?' 싶을 만큼 엄청난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전자책으로 출간되지 않은 책들이 그렇게 읽고 싶다. 어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읽고 싶었다. 달리기를 잘하는 편은 전혀 아니지만 달릴 때의 기분, 바람, 냄새, 근육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정말 좋아한다. 시애틀은 화창하건 그렇지 않건 습하지 않고 잔잔한(때로는 세찬) 바람이 분다. 달리기 최적의 날씨다. 봄에 다친 발목에 불편함이 남아 있었지만 참지 못하고 나이키 런클럽의 7분, 15분 회복 러닝을 시작했다. 마라토너 최경선 코치의 안내에 따라 달리는데 마지막 카운트 다운 부분에 이르러서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거의 매일 더 자유롭기 위해 환희에 차서 달리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묘사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달리기의 고통과 기쁨의 문장들에 비추어 내 기분과 감정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하필 그 책은 전자책으로 출간되지 않아 당장 읽을 수가 없다. 서울의 내 책장 맨 왼쪽 첫 번째 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옆에 꽂혀있을 텐데 말이다. 

며칠 전 시애틀 공공 도서관에 처음 가보았다. 작년에 시애틀에서 가보고 싶은 곳 Top 10으로 소중히 아껴뒀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문을 열지 않아 들르지 못해 무척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기필코 가보리라 생각했던 곳이다. 시애틀 공공 도서관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정말 훨씬 좋았다. 아무리 디지털의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읽는 것, 읽는 것을 위한 장소, 읽는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자 내가 사랑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에 더 충만감을 느꼈다. 그 공간에,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읽기'에 대한 갈증이 조금은 풀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이곳에서 몇 권의 책을 만났다. 

<The Last Interview>는 마음 산책의 '말 시리즈'로 종종 번역이 되는 책 시리즈인데, 서가에서 우연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리고 노라 에프론의 <The Last Interview>를 발견했다(노라 에프론을 잊고 있었다니!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데,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각본을 썼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등을 연출했다) 두 작가의 인터뷰를 읽고, 전자책으로 출간된 그들의 책을 찾아 또 읽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나의 읽고 싶은 욕구를 조금씩 채웠다. 노라 에프론의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일은 정말 자아도취적인 방식으로 흥미진진했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출판물을 만드는 사람이건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나머지 세계가 전부 초조하게 다음 호를 기다리고 있다고 정말로 믿게 된다. (…) 나는 그 스피드를 사랑했고, 마감을 사랑했고, 사람들이 신문지로 생선을 포장하는 것을 사랑했다.

과거의 내가 그어둔 밑줄로부터 나는 정말로 사랑하는 것, 정말로 하고 싶은 일, 끝까지 잘하고 싶은 일의 단서를 발견했다. 시애틀 공공 도서관에서 2022년 하반기의 다짐과 앞으로 내가 정말 뛰고 싶은 트랙의 방향을 재조정할 수 있었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삶에서 딱 캐리어 하나 사이즈 만큼 떼어간 나의 일상으로 새로운 비일상의 세상을 살아보는 모험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제약과 결핍이 되기도 한다. 내가 챙겨간 것들로 일상이 더 편안해지기도 하고, 챙겨 오지 않은 것들로 비일상이 더욱 빛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결국 마음에 달렸다. 올해 'out of Seoul' 은 절반 이상을 혼자 보내고 있다. 모험이자 도전이자 휴식이자, 일탈이다. 덕분에 내 마음이 좀 더 명확해진 것 같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말로 잘하고 싶은 것들은 무엇인지. 내 삶의 방향을 끌어갈 중요한 요인들이 보다 선명해졌다. 이 선명도가 옅어지려 할 때마다 앞으로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맥락에서 벗어나 오롯이 홀로 지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내 삶이,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말이다.



*김진영

이야기를 듣고 쓰고 찍는다. 좋은 질문을 던져 세상에 흩어져 있는 이야기를 엮어내고 전달하는 일이 좋아 다큐멘터리 PD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으며 콘텐츠 기획자로, 때로는 브랜드 콘텐츠 전략가로 하는 일이 확장됐다. 다큐에세이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를 썼다.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노라 에프런 저 | 김용언 역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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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진영(다큐멘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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