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혁 시인 “두꺼운 편지로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첫 산문집 『뉘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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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내가 본 풍경, 사람, 장소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제목이 ‘뉘앙스’였어요. 뉘앙스라는 말이 굉장히 작고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모든 걸 아우르는 둘레의 말로 느껴졌거든요. 차선책은 떠오르지 않았어요. (2021.12.27)


“내내 건강하시기를.” 

성동혁 시인이 산문집에 사인을 하며 보탠 말이다. 몸이 오랫동안 아파본 사람은 인간에게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같이 체험한다. 성동혁 시인과 인터뷰하기로 한 날은 12월 3일이었다. 산문집 『뉘앙스』를 펴내고 독자들과 마주하는 날. 앞 시간을 비워 놓기로 했는데, 이틀 전 그는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인터뷰는 일주일 뒤로 미뤄졌고 다수의 독자와 약속한 소규모 북 토크는 담당교수의 허락을 받고 겨우 외출할 수 있었다. 성동혁 시인은 소아 난치병 환자로 병동에서 긴 시간을 보냈으며 여전히 투병 중이다. 



이 언어로 쓸 수밖에 없는 글

오늘 컨디션은 어떤가요?

괜찮아요. 요즘 운전을 못해서 편집자님이 저희 집까지 와주셨어요.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고 그래요.

지난주에 정말 오랜만에 독자들을 만나셨어요. 항상 산소통을 갖고 외출해야 해서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일단 몸이 너무 힘들었어요. 북 토크를 진행하는 장소에 올 때까지도 정말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생기더라고요. 사람들로부터 오는 기운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이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가까이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와서 좋은 기운으로 며칠을 보냈어요. 그리고 시집 낭독회랑은 또 다르더라고요. 

어떻게 달랐나요?

좀더 밝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떤 게 더 좋고 낫다의 의미는 아니고요. 행사할 때마다 꼭 와주시는 독자 분들이 계신데요. 산문집을 내고 건네 받는 질문들이 좀더 밝고 거리가 가까운 것 같아요.

시인을 인터뷰할 때도 비슷한 것 같아요. 시집보다는 산문집을 두고 하는 질문들이 더 편해요.

맞아요. 그럴 거예요. 시집을 냈을 때 이 시를 해석해달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가끔 SNS로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분들도 계세요. 이런 질문을 받기 싫다는 건 아닌데요. 이 언어로 밖에 쓰지 못해서 시를 썼는데, 자꾸 설명을 요구 받으면 마음이 복잡해져요. 제가 이 시에 관해 뭔가 설명할 수 있었으면 글을 안 썼을 것 같거든요. 잘 설명해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좀 난감할 때가 있어요.

주로 많이 받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제 시 중에 숫자가 들어간 시들이 있어요. 이 숫자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데요. 독자 분이 읽어주시는 해석이 이 시의 답이고, 이런 해석들로부터 시가 더 풍성해질 수 있다고 말씀 드려요.

『뉘앙스』는 성동혁 시인의 세 번째 책이고 첫 번째 산문집이에요. 10년간 쓴 글들이 묶였어요. 

아카이빙한 원고가 많았어요. 예전에 쓴 글들은 버리고 요즘 쓴 글로만 채울까 고민했는데요. 어릴 때 썼던 조금 밝고 맑았던 글을 지금은 쓸 수 없잖아요.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예전에 쓴 글도 수록했어요. 전체 원고의 반 정도가 오래 전에 쓴 글이고 나머지 반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쓴 원고예요. 원래 저는 표지부터 제목, 목차, 시인의 말까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글의 순서를 항상 제가 짜왔어요. 순서를 남에게 맡긴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뉘앙스』는 편집자님이 글의 순서를 짜주셨어요.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거든요. 편집자님이 너무 훌륭하게 이질적인 모습이 전혀 없이 매끄럽게 잘 만들어주셨어요.

첫 장을 열면 “아무 말 하지 않고도 모두를 말하는, 뉘앙스”라고 써 있습니다. 어떻게 나온 제목인가요?

시집 『6』도 그렇고 『아네모네』도 그렇고 저는 책을 쓸 때 제목을 먼저 정해요. 산문집도 마찬가지였는데요. 10년 동안 내가 본 풍경, 사람, 장소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제목이 ‘뉘앙스’였어요. 뉘앙스라는 말이 굉장히 작고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모든 걸 아우르는 둘레의 말로 느껴졌거든요. 차선책은 떠오르지 않았어요.

전작 시집 『아네모네』가 2019년 ‘올해의 북 디자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죠. 표지에 시집 제목 없이 김현정 작가의 목탄 시리즈 「파도」를 책 전체에 감쌌어요. 『뉘앙스』의 표지 그림도 직접 선택하셨나요?

네, 이번 책에 실린 작품도 제가 제안 드렸어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데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작품이에요. '알렉스 카네프스키(Alex kanevsky)' 작가의 화집을 너무 사고 싶었는데 한국에서는 판매하지 않아서요. 책 표지로 꼭 넣고 싶어서 원고를 다 묶지도 않았는데 편집자님께 연락 좀 해봐달라고 부탁했어요. 다행스럽게도 흔쾌히 수락해 주셨고요. 이 그림을 제 책이 싣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웃음)



옆 사람도 같이 건강해야죠

의도하지 않았는데 굉장히 천천히 읽히는 책이었어요. 빠른 템포로 넘어가지 않았어요.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뭔가 휘발되지 않고 남는 감정들이 있다면 감사하겠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두 권의 시집을 냈을 때 친구들, 친척들이 “그런데 네 시는 잘 모르겠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가 마땅히 답할 말이 없더라고요. “이렇게 읽으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해석해드릴 수도 없으니까요. 내가 너무 동떨어진 일을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간혹 들 때가 있었는데요. 『뉘앙스』를 내면서는 제 친구들이 이 책을 두꺼운 편지라고 생각하고 읽어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주변에 문학을 전공한 친구들이 거의 없거든요.

아픈 이야기, 힘든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가 많은데 글들이 우울하거나 침체되어 있는 느낌을 받지 않았어요. 감정선의 기복이 크지 않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덤덤한 마음이 들면서 또 평온해졌어요.

책을 정리하면서 친구에게 선물할 수 있는 책, 친구와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병원에 계시는 분들, 환자들, 보호자들, 의료인들이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이 책이 어떤 의료계의 문제를 파헤치고 공론화하는 책은 아니지만 ‘이런 환자도 있구나, 이런 보호자, 이런 의료인도 있구나’라는 걸 알면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번 책에 유독 친구에 관한 글이 많죠.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제가 학교 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부모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혹시 학교에서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건강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를 굉장히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그 나이에 보여줄 수 없는 의젓함을 가진 친구들이 정말 많았어요. 늘 제 가방을 들어줬고 저희 집에 와서 저를 데리고 가줬고, 소풍 같은 행사 때도 엄마는 걱정이 돼서 저를 안 보내려고 했거든요. 그러면 친구들이 걱정 말라고 동혁이 제가 챙길 테니까 소풍 보내달라고 설득하고 했어요. 저한테는 친구들이 가족 같은 개념이에요. 엄마도 제 친구들을 아들처럼 생각하시고요.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척 따뜻해졌어요.

너무 고맙고 미안한 친구들이에요. 얼마 전에 한 친구한테 연락이 왔는데 자주 못 가봐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되게 속상해요. 괜찮거든요.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30대 들어서 친구들한테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야, 내가 성공해서 효도할게”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효도라는 게 다 지나고 나서야 더 잘할 걸 후회하잖아요. 저도 그럴까 봐 걱정해요. 뭔가 더 고맙다는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거 같아서요. 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너무 다 착해요. 그 친구들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제가 더 아프지 않고, 내 삶을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성인이 됐지만 주치의가 바뀔 수 없어 어린이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계시죠. 아이들을 위한 동시를 쓰신 적도 있고 동화를 써보고 싶으시다고요. 병원에서 아이, 부모 들을 만날 때 어떤 대화를 나누나요?

늘 하는 이야기가 “부모님이 잘 지내야 아이가 이 기운으로 또 잘 지낸다”는 말이에요. 저희 집 식구들은 다 무뚝뚝하거든요. 엄마도 무덤덤한 성격이신데 제가 정말 그 힘으로 버텼던 거 같아요. 아시겠지만 부모님이 감정기복이 심하면 아이도 그걸 느끼고 힘들어 해요.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다 보면 가끔 너무 과민한 부모들을 볼 때가 있어요. 비교적 작은 시술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요. 부모님들도 물론 힘드시겠지만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에게 대해주는 게 좋아요. 그리고 청소년기가 되면 병원에서 아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걸 이야기해 줘요. 아이들도 자신의 병을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요.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육체적으로는 너무 건강한 사람인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사람은 다 다른 거고, 누가 더 건강하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요. 그냥 몸의 형상이 다 다르고 뭔가를 더할 수 있고 덜할 수 있는 편함과 불편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하죠. 저렇게 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과연 건강한 걸까, 남의 건강을 해치면서 사는 삶이 자신이 건강한 삶인가. 저는 건강은 같이 안고 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나만 건강하게 산다고 해서 건강한 삶이 아니잖아요. 내가 건강해서 옆 사람도 같이 건강할 수 있어야죠. 육체적으로는 좀더 발달된 사람일 수 있겠지만 건강의 개념은 다른 것 같아요.

시집 『6』과 『아네모네』가 좋아서 『뉘앙스』를 펼쳤을 독자도 있겠고 ‘뉘앙스’라는 제목에 이끌려 책을 읽고 계실 독자도 있을 거예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낭독회에서 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진심을 담아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정말 정말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올 겨울을 잘 마무리하시고 진짜 평온하셨으면 좋겠어요.




뉘앙스
뉘앙스
성동혁 저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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