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맺힌 꿈의 그림자가 유령이 된다면
『소나무극장』 홍예진 저자 인터뷰
『소나무극장』은 그간의 제 관심사 몇이 결합된 이야기예요. 아득한 꿈처럼 설레는 무대, 한국의 근대사 속 청춘의 모습, 누구나 하나쯤 품고 사는 가슴 속 미련. 이 세 가지가 이 소설의 토대를 이루죠. (2021.09.27)
“극장의 유령이 배우 한 사람을 골라 몸을 빌려 연기를 한다는 거지. 그렇게 선택된 배우가 공연의 스타가 된다는 거고. 두 사람 다 유령 얘기 몰라?”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라니. 유령이라니. 하지만 파인아트센터 아트디렉터 지은은 믿을 수밖에 없다. 제 눈으로 벌써 본걸. 배우도 아닌 자신이 왜 극장의 유령을 맞닥뜨렸을까? 놀란 건 유령도 마찬가지다.
“설마, 제가 보입니까?”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5공을 지나 현재까지 작가 홍예진은 거침없이 시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직조한다. 숨 가쁘게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긴 연극 한 편이 끝나 극장 문을 나서는 기분이 든다. 첫 장편소설 『소나무극장』을 펴낸 홍예진 작가를 만나보았다.
소나무극장에서 70년을 아무도 몰래 지내온 유령이라니. 게다가 배우의 몸을 빌려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유령이라니. 굉장히 흥미로워요.
『소나무극장』은 그간의 제 관심사 몇이 결합된 이야기예요. 아득한 꿈처럼 설레는 무대, 한국의 근대사 속 청춘의 모습, 누구나 하나쯤 품고 사는 가슴 속 미련. 이 세 가지가 이 소설의 토대를 이루죠. 『소나무극장』에서는 인석이라는 인물이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에 한이 맺혀 극장의 유령이 되어 이승에 머무는데, 저는 인석의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우리는 다 한때 꿈, 사랑, 열정 같은 걸 지니고 살잖아요? 결국 삶의 무게에 짓눌려 가슴 속에 품었던 보석을 체념하는 경우가 많지만요. 그 포기를 누군가는 잘 매듭짓지만 누군가는 그러지 못해 응어리를 묻고 살죠. 저는 그 응어리를 한으로 품고 사는 사람들이 모두 『소나무극장』의 인석 같아요. 사람들에게 맺힌 꿈의 그림자가 바로 유령인 거죠.
소나무극장은 파인아트센터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는 지은이 주인공이에요. 작가님도 실은 아트디렉터 출신이시죠?
제가 예전에 했던 일이 소설 속 지은의 직업과 같은 것인데요. 보통 무대디자이너, 혹은 무대미술가라고 하죠. 개인적으로는 무대미술가라는 말을 좋아해요. 무대미술이라고 하면 무대 위에 설치되는 세트에 국한해서 생각하기 쉬운데 무대미술은 세트 구상, 의상 구상, 조명플랜까지 짜는 포괄적인 작업을 말합니다. 물론 업계의 실상은 이 모두를 각각 다른 사람이 맡아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 공연준비를 진행하면서 서로의 작업을 조율하는 식이에요. 디자이너와 제작자의 경계가 분명할 때도 있고 불분명할 때도 있다고 할까요.
제가 공부했고 또 진행했던 방식은 세트, 의상, 조명 등의 전체 기획을 무대미술가가 짜고, 이 세 분야 각각의 전문가나 제작자와 협의하면서 무대미술 담당이 감수를 하는 것이에요. 이 작업을 전문용어로 세노그라피(scenography:무대미술)라고 합니다. 그 일을 하던 시절에 만난 사람, 공간, 에피소드 등이 『소나무극장』을 쓰는 동안 영감이 되어주었습니다.
상당히 스케일이 큰 소설이에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5공까지 등장하거든요. 작업이 만만찮았을 것 같아요.
처음부터 그렇게 여러 시간대를 드나들려는 계획을 한 건 아니었어요. 쓰다 보니 인물이 살아온 시대적 배경을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인물이 겪었던 사건 사고에서 오는 정서를 독자에게 설득해야 공감대가 이루어지겠더라고요. 소설의 재미는 인물에의 몰입으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요. 아울러, 현존하는 많은 나라가 식민과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경험이 있잖아요. 그 여파는, 식민 제도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이념 대립으로 죽고 죽이는 시대가 아닌 지금까지도 남아 사회를 흔들어대고요. 과거는 잊고 앞을 보자고 부르짖어봐야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제 사고방식이 소설을 통해 드러났을 테고요, 한편으로는 중간 지대를 좀 돌아보고도 싶었어요. 역사를 다룰 때 우리는 자주 양극단에 시선을 주잖아요? 친일파인가 독립투사인가, 혹은 좌익이었나 우익이었나 등으로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생존이 우선인 유동적인 모습을 지니고 사는 게 일반적이죠. 그런 점을 다루고도 싶었어요.
소나무극장의 유령, 즉 1929년생 차인석이 소나무극장에 붙박여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참 애잔해요. 무엇이 그를 그곳에 붙잡았던 걸까요?
이 소설을 시작할 때 씨앗이 된 아이디어는 무대의 정령들에 관한 상상이었어요.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서서 관객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에겐 특별한 영이 있다고 느끼곤 했거든요. 소설을 시작해 써나가던 중인데, 고인이 되신 박완서 작가님의 글 한 꼭지를 읽다가 마음에 훅 들어오는 대목을 접했어요.
많이들 아시다시피 박완서 작가님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그 빛나는 시절에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보냈죠. 그리고 그 경험을 소설에 고스란히 재현했어요. 그런데 훗날 돌아보니 청춘을 청춘답게 보내지 못한 것이 노년에 이르러 더욱 사무치고 서럽다고 적어 놓으셨더라고요. 그 글을 오래 곱씹었어요. 청춘이란 무엇인가, 꾸준히 사랑받으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해낸 소설가로 살았으면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던 황혼기의 상흔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하고요. 이 사유가 전쟁을 겪은 세 인물의 청춘을 소나무극장 속에 구현하는데 일조한 배경이 되어주었습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 우종은, 유령에 씌어 열연을 펼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받아들이겠다고 해요. 혹시 작가님은, 유령 작가가 작가님의 손을 빌려 엄청난 작품을 써준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재능을 걸고 하는 일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한 번쯤 해볼 법한 생각 아닐까요? 가령 저처럼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글이 잘 안 풀리고 자기 글이 재미없다고 여겨질 때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명작을 써냈으면!’ 하고 중얼거려 보기도 한단 말이죠. 유령과 악한 악마는 성질이 다른 것이니까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잠시 내 영혼을 내주어도 될 것 같고요. 다만 그 원고가 제 영혼이 아닌 유령에 의해 쓰였다는 걸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조건 하에서요. 아무리 필생의 역작을 써냈더라도 그 글을 써낸 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아는 이상 진심으로 기쁠 창작자는 없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은 속여도 스스로를 속이진 못하잖아요. 대답을 이어가다 보니 저는 우종과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장편소설로 독자들과 만나는 건 처음이시잖아요. 감회가 남다르실 듯해요.
솔직히 말하면 이제야 비로소 소설가가 된 것 같아요. 저도 단편으로 데뷔를 했고, 훌륭한 단편을 쓰는 작가들도 많지요. 제게도 감동과 전율에 사로잡혀 읽고 소중히 여기는 단편들이 있기도 하고요. 그래도 전 장편을 써내고 싶었어요. 저 자신과의 약속 또는 야망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제가 제 스스로를 소설가라고 여길 수 있게 자의에 따라 만든 일종의 통과절차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장편소설을 써낸 건 그런 점에서 제게 의미가 큽니다. 물론 이건 제 자신에게만 들이대는 기준일 뿐이고, 단편도 계속 쓸 거예요. 장편과 단편의 매력이 다르니까요.
다음 책 계획에 관해서도 들려주세요.
그동안 써놓았던 단편들을 모아 소설집을 내고 싶어서 원고를 다듬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다음 장편소설을 구상 중인데요, 현실과 판타지가 접목된 이야기입니다. 학교생활 부적응자인 두 여자아이가 방과 후 인근 계곡에 놀러 갔다가 이상한 지대를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죠. 저는 아이디어를 꼼꼼히 적어두었다가 꺼내 쓰는 식으로 소설을 쓰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씨앗이 되는 이미지를 오래 생각하면서 한 세계를 제 안에 어느 정도 구체화 시켜놓고 그다음에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식의 작업이 좋더라고요. 가변의 여지가 있는 테마파크로 들어가 디테일과 스토리를 불어넣는 식으로요. 여백이 있는 테마파크, 흥미롭잖아요. 빨리 입장하고 싶어요.
*홍예진 소설을 쓰고 주변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경희대학교 산업디자인과, 프랑스 파리 ESAT(Ecole Superieure des Arts et Techniques) 무대미술과를 졸업한 뒤 아트디렉터로 활동했으며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2014년 단편 「초대받은 사람들」로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문학공모에서 대상을 받으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앤솔러지 [소설 뉴욕]에 단편 「미뉴에트」를 발표했으며, 재미 작가 프란시스 차의 「살아가는 동안」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2021년 가을 장편소설 『소나무 극장』(폴앤니나) 출간을 앞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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