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대의 기록법] 이자연, 어제 본 그 콘텐츠 나만 불편한가요?
요즘 세대의 기록법 4편
밥 먹으면서 프로그램 하나 볼 뿐인데,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른 여성들이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차오르죠. 마음이 막 웅장해져요. 전에 없던 신인류 같고 든든하잖아요. 그럴 땐 정말 어디에 외치고 싶어서 쓰게 돼요. (2021.08.18)
“당신이 좋아했던 여자들은 아직 TV에 나오나요?” 『어제 그거 봤어?』라는 제목을 보고 책을 펼쳤다가, 프롤로그의 질문에 순간 마음이 내려앉았다. 일상적으로 보는 TV프로그램이지만, 사라지는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담이라며 여성 출연자에게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던 예능 프로그램, 라이벌 구도로만 그려졌던 드라마 속 여성들의 관계. 콘텐츠를 여성주의 관점으로 보는 대중 문화 평론가이자 미디어 에디터로서 이자연 작가는 여성을 몰아세우는 콘텐츠에서 소속감을 갖기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불편함을 인지한 순간, ‘어제 그거 봤어?’라는 단순한 물음은 강력한 문제제기와 연대로 변화한다. 우리는 무엇을 봐온 걸까?
시트콤 <하이킥>, <나 혼자 산다>부터 드라마 <런온>, <SKY캐슬>까지, 『어제 그거 봤어?』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폭넓게 다룬다. 이자연 작가는 콘텐츠의 전편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감상을 기록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여성을 납작하게만 그리는 콘텐츠는 왜 불편한지, 드라마에서 평범한 여성의 등장은 왜 새로운지. 이자연 작가의 기록법을 보고, 어색한 웃음으로 흘려 보냈던 어제의 콘텐츠를 다시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새롭게 보고 쓸 때, 우리가 좋아했던 여성들은 생명력을 얻을 테니 말이다.
『어제 그거 봤어?』라는 제목이 직관적이고 재밌었어요. 같이 보자고 말을 건네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제목 짓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너무 어렵게 느껴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너무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 제목을 찾기 위해 정말 애썼어요. 편집자님과 계속해서 말을 모으던 중 친구가 지나가듯 말하더라고요.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어제 그거 봤어?” 아니냐고요. 그때 귀가 번뜩였어요. 그러고 보니 이 말은 대화를 시작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주요 화두를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으로 끌고 가겠다는 선명한 의지로 비춰지기도 하고요. 책 내용을 상징할 수 있는 일상어라는 생각에 최종으로 선택하게 됐어요. 지금은 엄청 마음에 들어요.
영화와 달리, TV 콘텐츠는 편수가 긴 경우가 많잖아요.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 수없이 반복해서 보셨을 것 같은데요. 글을 쓴 과정이 궁금했어요.
콘텐츠 기록은 저에게 아주 일상적인 습관이에요. 어떤 콘텐츠든 보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꼭 노션에 적어놓아서 정리된 내용을 기반으로 원고 방향을 잡았어요. 그 기록이 맞는지 사실관계를 점검해야 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동안 모든 콘텐츠를 계속해서 다시 봐야 했어요. 정말 신기한 게 아는 내용이더라도 다시 보면 또 이입하게 돼요. 그러면 저는 콘텐츠를 보고, 이입해서 울고, 쓰다가 다시 또 보고 울고 쓰기를 무한 반복해야 하는 거예요. 생애 손에 꼽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만큼 강렬한 몰입을 경험했어요. 어떤 날에는 저녁에 일을 시작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새벽 4시더라고요. 힘들었지만 정말 순수하게 행복했어요. 그렇게 쓴 책이에요.
매 글 끝에 질문이 덧붙여진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렇게 구성한 이유는요?
매거진 에디터로 7년 간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질문하는 삶에 가까워졌어요. 작은 일에도 그 근원을 궁리하고 누군가의 의견을 듣기 위해 마이크를 넘기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그런 장치를 쉽게 떠올렸던 것 같아요. 잡지 문법인 거죠. 보통 매거진 기사마다 끄트머리에 정보가 들어가잖아요. 촬영 장소와 협찬품부터 책이나 영화 추천까지요. 매 기사마다 독자에게 유용한 정보를 정리했던 것처럼 생각을 정리해 볼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책을 읽으며 꽤 오랫동안 TV프로그램은 여자 편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님 역시 “어린 나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8쪽)고 쓰기도 했죠. 작가님이 콘텐츠를 불편하게, 다르게 보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며 지내왔어요. 그러면서도 <무한걸스>는 <무한도전>의 아류라고 안 보고, 토크쇼에서 애교를 거절했다고 욕먹는 걸그룹을 방관하는 시청자였죠. 페미니스트로서 미디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런 걸 누가 가르쳐준 적도, 제가 배운 적도 없으니까요. 뭔가 이상하다고 감지하더라도 정확한 근원을 알 수 없었어요. 돌이켜 보면 애초에 사고 체계가 거기까지 가닿을 수 없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로 많은 것이 전복됐죠. 처음엔 뉴스 보도 방식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OO녀 남발, 피해자 특정의 사건 명명화, 가해자 서사 부여 같은 걸로요. 그리고 조금씩 확장돼 갔죠. 드라마도 다를 게 없네? 뭐야, 예능도? 심지어 다큐멘터리까지… 그저 장르 차이만 있을 뿐 세상을 그려내는 시선은 오직 한결같았기 때문이에요. 눈을 둘 데가 없더라고요.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콘텐츠를 본다는 건, 정해진 방식대로 보지 않겠다는 선언 같기도 합니다. 여러 콘텐츠를 보다가 ‘이거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인가요?
가장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분노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랑이에요. TV프로그램은 대중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 교묘하게 침투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 교묘함이 시대착오적인 방식일 때 갑자기 단전에서 분노가 화르륵 끓어 오르죠. ‘뭔 프로그램을 이렇게 게으르게 만들어?’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 문제로 거론된 부분인데도 업데이트가 안 된 건 직업인으로서 게으른 거잖아요. 그럴 땐 말하지 않고 넘기기가 힘들어요.
또, 여성 간의 따뜻하고 다정한 장면 앞에선 정말이지 피해갈 재간이 없어요. 타인을 배려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감정이에요. ‘우리가 함께 마주한 세상이 얼마나 험난한지 난 알아. 하지만 그게 너를 마음대로 재단하지 않도록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런 느낌이에요. 그냥 밥 먹으면서 프로그램 하나 볼 뿐인데,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른 여성들이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차오르죠. 마음이 막 웅장해져요. 전에 없던 신인류 같고 든든하잖아요. 그럴 땐 정말 어디에 외치고 싶어서 쓰게 돼요.
여성 간의 연대를 보면
마음이 막 웅장하고 든든해져요.
사회가 불평등한 것만큼이나 미디어 환경도 젠더적으로 불평등한데요. “남성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쉽게 받는다는 걸 체감한 이후부터는 미디어 비평을 할 때 굳이 한마디를 더 얹지 않게 되었다”(132쪽)고 하셨어요. 우리가 질문해야 할 관성적인 ‘기본 공식’이 있다면요?
여성중심 콘텐츠를 향한 비난의 말에 무게를 더 얹지 않는 거요. 아무리 여성 주연이거나 여성 연출자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보기 언짢으면 하차하게 되죠. 그렇지만 그걸 어딘가에 구구절절 말하지는 않아요. 제가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더라도 이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그리고 나와서도 비난을 피할 길이 없거든요.
요즘엔 ‘여성’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악플 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이런 세상에 등장한 용기만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죠. 물론 그 언짢음의 근원을 꼼꼼히 점검했을 때 같은 여성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라면 그땐 이야기를 하게 되겠죠. 하지만 너무 쉽게 비난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조용히 보지 않는 걸 선택할래요. 범죄를 일으키고도 계속 화면에 나오는 남성 연예인을 보면 우리에게 어떤 울타리가 필요한지 정신이 번쩍 들거든요.
<달리는 사이>, <캠핑클럽>, <삼시세끼 산촌편> 등 기존의 ‘여적여’ 구도에서 벗어나, 여성의 새로운 관계성을 말하는 콘텐츠가 늘어났어요.
맞아요. 어떤 기점으로 여성 간의 평등하고 다정한 관계를 조명하는 콘텐츠가 늘어났어요. 너무 기쁜 일이에요. 저는 제 다음 세대의 여성들로부터 제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느낄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제가 봐 온 TV프로그램이나 광고 등에서는 같은 여성끼리 시기와 질투를 하고, 특정 정보를 홀로 독차지하기 위해 절대 알려주지 않는 모습을 강조했거든요. 그럼 그 연예인은 또 논란이 되고요. 뷰티 프로그램이나 걸그룹 리얼리티 쇼가 그랬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연출에 관해서 10~20대 여성들이 경계하는 걸 넘어 아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요. 경험상 그게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잘 알기 때문이에요. 그런 부분에서 콘텐츠와 상호작용하는 시청자들의 태도가 세대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흐름이 느껴지더라고요. 사람들이 콘텐츠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콘텐츠가 사람들을 반영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시기와 질투를 하는 관계
여성들은 그게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아요.
<안녕 드라큘라>, <블랙독>처럼 ‘워맨스’라고 부를 만한 여성서사도 많아졌는데요. 작가님은 이 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콘텐츠 안에 여성들이 얼만큼 내용을 점유하게 됐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가 여자를 돕는다는 의미 이상으로, 질적으로 여성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걸 시사하는 거죠. 가까운 과거에 여성이 단독 주연을 맡거나 히어로가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내용적으로 중요한 설정이긴 하지만 반대로 보면 꼭 특별한 힘을 지녀야만 이야기 안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평범한 여성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역할까지 여성의 자리로 확장됐죠. 드라마 <런 온>에서 오미주의 선배로 등장하는 박매이도 옛날이었으면 허당이지만 이유 모르게 계속 보고 싶은 남선배로 등장했을 거예요. <하이에나>에서 정금자 비서인 이지은도 귀엽고 충성심 높은 남성으로 나왔을 테고요. 여성의 콘텐츠 점유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이, 더 자주 가상 세계의 여성을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만큼 캐릭터 다양성도 늘어나고요. 그런 점에서 몹시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봐요.
책을 덮으며 결국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문화 비평을 한다는 건, 누군가를 대상화하지 않는 윤리를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님이 비평 활동을 할 때의 기본 태도가 있다면요?
사실 비평이란 게 어떤 면에선 남이 열심히 만들어 둔 것에 제 숟가락 조용히 얹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웃음) 그래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상에 그치지 않는지 스스로 계속 물어요. ‘정말 세상에 이 말이 필요한가? 현실의 어떤 현상과 연결할 수 있지?’ 하는 필터를 두면 그때 몇 가지가 걸러지거든요. 내가 느낀 감정 너머를 보는 게 중요해요. 내 감상이 곧 비평이라고 직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오만한 자세라 지양하려 해요. 맨스플레인에서 이런 태도를 많이 느끼죠. 가상 세계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진지해지지 말라는 반응도 있어요. 가상이 거짓인 건 맞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상상할 기회를 얻게 되잖아요. ‘세상이 딱 이만큼만 바뀌어도 이런 삶을 영유할 수 있구나’ 하고 알게 되고요. 누군가는 그때부터 무언가 행동으로 옮기기도 해요. 그러니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중요해요.
가장 최근에 작가님이 주목하신 콘텐츠가 궁금합니다.
2020도쿄올림픽이요. 정말 엄청나게 다양한 풍경이 혼재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표지에도 써 있듯이 진짜 변화는 이야기가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 같아요. 올림픽 이후, 동네에 있는 팀 스포츠를 찾아보거나 모임을 직접 여는 여성들을 보면서 적극적인 변화 중심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2002월드컵만큼의 호사를 여성 국가대표에게 그대로 전해주겠다며 벌써부터 2020도쿄올림픽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어요. 진짜 보는 사람이 있어야 만들어 나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새삼 느끼고요. 여성들의 환호 덕에 여성 선수들이 더 큰 조명을 받는 것에서 뭉클해지기도 했어요. 지각변동이랄까요? 판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현재진행형으로요.
*이자연 대중문화 탐구인. 그중에도 영상 콘텐츠를 여성주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걸 가장 즐겨한다. 지난 7년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AROUND〉와 밀레니얼 주거문화 매거진 〈디렉토리〉에서 콘텐츠 에디터로 일했다. 여성 생활 미디어 〈Pinch〉에서 대중문화비평 ‘TV언박싱’을 연재했고, 현재 〈한겨레신문〉에서 온라인 커뮤니티 속 MZ세대 여성들의 문화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날렵한 질문을 던지는 삶을 통해 엉망진창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별명은 양천구 불주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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