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혜 “나답게 살고 싶어서 타인을 생각한다”
『다정한 무관심』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특정한 행동을 하기까지의 배경을 생각해요. 그 행동이 나오기까지의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맥락을요. (2021.06.24)
타인의 처지를 생각하는 일은 왜 필요할까. 작가 한승혜는 말한다. 값싼 동정이나 이타심 때문이 아닌 나답게 살기 위해서라고. 차별이나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한 명의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을 같은 태도로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마주할 때마다 당신이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글을 써왔다는 한승혜 작가. 자신을 설명하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한 그의 글쓰기는 점점 타인에게 가닿았다. 『다정한 무관심』은 한승혜 작가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칼럼집이자 집단이나 무리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오롯한 개인으로 살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살피며 개인주의를 연습해 온 날들의 기록이다.
서로에게 일정한 거리를 지키며 간섭과 참견을 하지 않는, 나와 다른 타인의 개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적당한 무관심의 사회. 그러면서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을 잊지 않는, 서로에게 다정한 사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다정한 무관심’이 아닐까. (18쪽)
<서울신문>에 연재한 칼럼과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묶은 책이에요. 어떻게 나왔나요?
그간 공들여 써 온 글을 책으로 묶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주제로 묶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내가 무엇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왜 글을 남기고 싶은지를요. 생각해 보니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나의 욕망과 글쓰기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 정체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요.
제목이 책에서 말하는 ‘개인주의’를 잘 표현하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다정한 무관심’이었나요?
처음에는 ‘개인주의 연습’이었어요. 글 쓰는 일이 개인주의를 연습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출판사 대표님이 『이방인』에 나오는 말인 ‘다정한 무관심’을 제안하셨고, 그걸로 결정했죠. 제목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다들 비슷한 욕구를 가지고 있구나 싶었어요.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태도가 저자 소개에서도 드러났어요. ‘부엌에서 쓴다’라는 문장이 눈에 띄었는데요. 전작의 저자 소개에도 이 문장이 있더라고요. 강조하는 것 같았는데 이유가 있나요?
일단 실제로 부엌에서 쓰고요. (웃음) 저의 정체성 중 하나가 주부인데 우리 사회에 주부를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예전에 누가 주부를 낮춰 이야기하면 기분이 나빴는데요. 은연중에 저도 주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나는 주부가 아니라 작가’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요. 왠지 모르게 감추고 싶은 ‘주부’라는 정체성을 내가 먼저 인정해야 다른 사람도 나를 인정할 수 있겠다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주부라는 정체성과 가장 관련 있는 공간인 부엌을 강조한 것 같아요.
실제로 <서울신문> 칼럼에 본인을 ‘주부’라고 소개하셨죠.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저는 주부입니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요.
‘주부’라는 타이틀을 쓰면서 놀란 게 있는데요. 글은 좋은데 저자를 왜 주부로 소개하냐면서 ‘신문사에서 무시하는 건가?’라고 반응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주부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어떤지 드러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주부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쓰고, 주부라는 타이틀에 관해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저는 주부입니다’라는 글을 썼고요.
집단이나 무리에 기대서 나를 소개하면 편하긴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집단과 무리에 목을 매는 것이기도 할 테고요. 그런 욕망이 들 때는 없나요?
당연히 있죠. 그런데 그렇게 나를 소개하는 방식이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자제하려고 해요. ‘저 작가예요’ 또는 ‘저 누구랑 친해요’ 이런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기댈 만한 게 별로 없기도 하고요. (웃음)
서문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죠. 공감했어요.
이기주의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거라면 개인주의는 내가 개인으로 존중 받으려면 다른 사람도 개인으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하는 것 같아요. 작년 여름에 신천지 사태가 일어났을 때 사회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코로나가 순식간에 퍼지면서 학교나 음식점이 문을 닫고 사회가 마비됐잖아요. 물론 그들의 잘못이 크지만, 내부를 잘 들여다보면 대부분 외롭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이었어요. 경제적, 정서적으로 취약하니까 신천지 같은 종교에 기대게 된 거죠.
코로나 팬데믹이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고 드러냈다는 지적이 있었죠.
물론 그렇다고 이들에게 잘못이 없고, 무조건 따뜻한 시선을 보내자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이분들이 고립된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바이러스가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무리해서 만나지 않았겠죠. 그러면 바이러스가 이렇게 급속도로 퍼지지 않았을 거고, 회사나 학교가 문을 닫지 않았을 거고, 내가 이렇게 독박 육아를 하면서 고통받는 일도 없었을 텐데 싶었어요. (웃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지 실감 나더라고요. 그래서 나의 어떤 것을 지키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것도 보장해줘야 하는구나 싶었고요.
‘페미니즘은 개인으로 서기 위해 여성으로서 필연적으로 거쳐 가는 통로’라고 했는데요. 페미니즘을 대하는 작가님의 태도이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로 들리기도 했어요.
최근에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분들도 많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으로 말을 시작하는 여성들이 많았거든요. 또는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고 개인주의자야’라고 하기도 하고요. 저도 마찬가지였는데요. 페미니즘과 개인주의를 완벽히 분리할 수 있는 건가 싶어요. 여성이 여성에 대한 낙인이나 혐오에 맞서지 않으면 개인이 될 수 없거든요. 같은 맥락에서 여성이라는 성별뿐만 아니라 소수성을 가진 사람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수자 의제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요. 제가 <명예남성을 위한 변명>이라는 글에도 썼는데요. “나는 차별받은 적 없다”라고 하는 여성들이 간혹 있는데 심한 차별은 아니라 해도 선입견을 품고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러니 그런 선입견을 뛰어넘어 한 명의 개인이 되고 싶으면 소수자 이슈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명예 남성을 위한 변명’도 그렇고 최근에 페이스북에 쓰신 ‘김지영의 남편은 정말로 괜찮은 남자였을까?’를 보면서 다양한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그게 글을 잘 쓰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기보다 실제로 여러 위치에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았어요.
의식적으로 애쓰는 건 아니고요.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특정 행동을 하기까지의 배경을 생각해 보거든요. 그 행동이 나오기까지의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맥락을요.
그래서인지 어떤 사안이나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태도가 보였어요. 김겨울 작가님이 추천사에 쓰신 ‘안정감’의 비결이 거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었고요.
요즘 들어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요.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 마음이 돌아오지 않으면 미움으로 바뀌는 것처럼요.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은데요. 기본적으로 적정선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물론 항상 그게 잘 되는 건 아니지만요.
일상의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사회 구조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글의 시야가 확장되는데요. 글을 쓰면서 특별히 신경 쓰거나 주의하는 게 있다면요?
소설을 많이 읽어서 어떤 사람의 맥락을 살피려고 노력한다고 했잖아요. 이게 좋은 점도 있는데 가끔 제 마음대로 한 사람을 판단해 버릴 때가 있어요. 이 사람은 의미 없이 한 행동인데 과하게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일방적으로 동정한다거나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여전히 미숙하고 실수도 많이 해서 주의하려고 해요.
이를 테면요?
책에는 실리지 않은 글인데요. 버닝썬에 관한 글을 쓰면서 마지막 부분에 N번방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피해자에 대입해서 쓴 글이었는데 잘 읽었다는 반응이 많았던 반면,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왜 피해자들을 불행하고 관심 못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느냐고요. 이 사람들도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했을 수도 있는데 의미를 과하게 부여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처음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 비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건지 알겠더라고요.
글을 쓰다 보면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실수를 하기 쉬운 것 같아요.
맞아요. 소수자를 불쌍한 존재로만 그리거나 위대한 사람처럼 과하게 의미를 부여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 태도를 지양하고 비판하면서도 제 안에 남아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책에는 그 부분을 빼고 새로 써서 실었어요. 언제든 실수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려고 하죠.
‘칭찬의 기술’이라는 글도 좋았어요.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순위를 매기는 칭찬을 하거나, 반대로 그런 칭찬에 의해 강제로 평가 당하는 때가 많구나 싶더라고요.
얼마 전에도 봤는데요. 페이스북을 하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 TOP3에 드는 분’, ‘내가 아는 소설가 중 제일 잘 쓰는 사람’ 이런 댓글이 종종 보여요. 그런데 만약 어떤 소설가가 ‘내가 아는 소설가 중 제일 잘 쓰는 사람’이라는 글을 보면 그 소설가도 자동으로 평가받는 거잖아요. 예전에는 저도 별생각 없이 평가하는 말을 많이 했는데요. 누군가를 평가하는 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상대를 조종하는 말인 것 같아요. 이런 평가를 받으면 본능적으로 그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 사람의 마음에 들게끔 행동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칭찬할 때는 상대의 ‘고유함’에 주목하는 게 좋겠다고도 하셨죠.
순위를 매기거나 평가하는 대신 ‘나는 이 사람이 좋다’ 내지는 ‘이 사람이 쓴 글이 좋다’라고 자신의 호감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래 직장 생활을 했다고요.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하게 됐나요?
회사 다닐 때는 굳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안 쓰게 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글을 쓰긴 했지만, 사회 생활하면서부터 쓰지 않았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고립되어서 아이들하고만 지내니까 생각이 많아지는 거예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데 마땅치 않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된 것 같아요. 마침 SNS도 있었고요. 그런 걸 보면 결국 글쓰기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외롭거나 고립된 느낌이 들 때 생각하게 되고, 표현하게 되잖아요.
처음에는 친구나 지인을 대상으로 사적으로 쓰다가 공적인 글쓰기로 전환했다고 들었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 글을 쓸 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왜 출판사들은 나한테 연락을 안 하지?’하면서요. (웃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를 드러내지 않는데 누가 나를 알아주나 싶은 거예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글을 공적으로 쓰면 사람들이 ‘네가 뭔데 이런 이슈에 말을 보태?’라면서 욕할지 모른다는 마음이요. 그런데 동시에 빨리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상반된 마음이 있는 상태로 지내다 어느 날 밤에 번뜩 각오하고 써야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 순간에 앞으로 유명해져서 칼럼을 쓰고 책도 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나를 노출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싶어서 친구 공개로 했던 서평을 전체공개로 늘렸는데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 유료 플랫폼에서 연재할 기회가 있었는데 더 많은 사람이 읽기를 원해서 거절했다고 쓴 글을 봤어요. 유료 플랫폼에서 연재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었을 텐데요.
물론 저도 다른 분들처럼 책 많이 팔고 돈 많이 벌어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데 글을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쓰지 않으면 안 돼서 쓰는 거거든요. 계속 남아서 나를 따라다니는 생각이나 감정들로 인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글을 쓰는데 누군가 그 글을 읽어주면 그 사람이 저한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읽어주는 분들 덕분에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돈도 좋지만, 더 많은 분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아요.
독자의 어떤 반응을 볼 때 가장 좋나요?
‘내 마음 같았다’ 또는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글’이라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아요. 저도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아니까요. 내 마음 같은 책을 읽으면 반갑고 좋거든요. 그러니 내 글의 독자가 그런 기쁨을 느낀다고 하면 너무 좋죠.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출판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관계가 생기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서평을 쓰는 건 이전과는 다를 것 같아요.
누군가 내 책의 서평을 써주면 나도 써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정확한 후기로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친분 때문에 억지로 쓸 수는 없더라고요. 읽어보고 정말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책만 쓰자는 생각으로 쓰고 있어요. 그리고 예전에 책에 별점을 매겨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는데 잠깐 했다가 싹 없앴거든요. 완성도는 높은데 나한테 와 닿지 않는 책도 있고, 허술하지만 어떤 면에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책도 있어서 별점 매기기 어렵더라고요.
똑같은 이야기를 해 왔지만,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상황이나 목소리가 닿는 범위가 달라지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300쪽)고 했어요. 저도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내 생각이나 취향이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신문에 칼럼을 쓰고, 책이 나오면서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나 목소리가 도달하는 범위가 달라지는 거예요. 이를테면 저는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과 거의 똑같은 상황에 있었어요. 육아 때문에 퇴사했고, 이후에 경력이 단절되면서 재취업을 못 했고요. 예전에 제가 이런 상황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불평이 많다 또는 피해 의식이 심하다, 예민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일리 있다고 하죠.
목소리에 힘이 생긴 거네요.
그렇죠. 여전히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고, 그분들도 자기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는데 예전에 제가 받았던 취급을 받아요. 그런 광경을 거듭 보면서 계속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의 힘을 갖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궁극적으로 저한테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요.
다른 장르의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나요?
예전에 소설 쓰기 수업을 다녔어요. 지금도 가끔 소설을 쓰는데요. 에세이나 비평보다 소설이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에세이나 비평이 나를 표현하는 글이라면 소설을 쓸 때는 나의 감춰진 욕망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요. (웃음) 읽는 사람들은 허구라고 생각할 거고 허구가 맞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나도 모르던 진심이 드러나서 공개 못 하겠더라고요. 언젠가는 쓰고 싶긴 한데 아직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가 있다면요?
더 많은 사람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에세이 읽는 사람들은 많은데 소설 읽는 사람은 드문 것 같더라고요. 소수의 유명한 소설가들의 작품은 많이 나가지만, 알려지지 않는 소설 중에도 좋은 게 많은데 읽히지 않는 게 많아서 아쉬워요. 소설이 얼마나 재밌는지, 소설 읽는 기쁨을 알려주는 책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한승혜 이름이 많은 사람. 한국인, 여성, 엄마, 아내, 가사노동자, 마감노동자, 독자, 작가, 모든 것에 해당하는 동시에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사람.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 중이며, 베스트셀러 서평집인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를 썼다. 오롯이 한 사람으로서 서기 위해 개인주의를 연습하는 중이다. 주로 부엌에서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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