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구병모 월드’로 진입하려면 (G. 구병모 소설가)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 (188회) 『바늘과 가죽의 시』
지금 제 옆에 “쓸 수 있을 때 바짝 쓴다”고 말하는, 최근에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를 출간하고 우리 곁에 돌아온 구병모 작가님 나오셨습니다. (2021.05.20)
미아와 얀은 이야기한다. 어째서 빛이나 물이나 공기나 흙의 일부였던 우리가, 그러면서도 동시에 액체와도 기체와도 꼭 같지 않고 더욱이 고체는 아니었던 어떠한 상태를 벗어나서, 손만 뻗으면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질 수 있는 인간이 되었음에도 얼굴에 주름이 잡히지 않으며 쇠잔하지도 병들지도 않을까. 이는 유한인가 무한인가. 오래전부터 인간들은 우리를 정령이나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렀는데, 우리는 이제 서로를 뭐라고 부르면 좋지.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구병모 작가님의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에서 한 부분을 읽어드렸습니다. 구병모 작가님은 언제나 독자의 예상보다 훨씬 멀리에 서서 독자를 향해 손짓하죠. 이번에 출간한 소설 『바늘과 가죽의 시』에서는 어쩌면 영원히 사는 존재들과 이들이 바라보는 ‘사라지고 말’ 순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환상적인 문장과 상상력. 구병모 월드에 오신 여러분,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서 구병모 작가님의 멋진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세요.
오은: <김하나의 측면돌파> 출연 당시에 10년 동안 열두 작품을 발표했다고 소개를 하니까 구병모 작가님께서 “앞으로는 조금 텀을 두고 천천히 써야겠다”고 말씀하셨었는데요. 그 이후에도 두 권의 장편을 더 내셨어요.
구병모: 함께 일하는 동료 분들 기다리게 하는 걸 잘 못해요. 만약 내후년에도 <책읽아웃>에 불러주신다면, 저는 역시 “다음에는 텀을 둬야지”라고 말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컨디션이나 신변에 큰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 7-8년 정도는 이런 식으로 꾸준히 만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오은: 작가님은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할 때 글을 쓰신다고 해요. 사실 KTX는 책상이 굉장히 작잖아요. 작업하시기 어떤가요?
구병모: KTX 안에서 정말 A4 사이즈의 책상에 노트북을 두고서 오며 가며 썼죠. 아무래도 왕복 7시간 정도 걸리니까요. 얼마나 알찬 시간이에요.(웃음) 그랬는데 그 인터뷰를 하고 난 다음 해부터 노안이 왔어요. 지금은 열차에서 예전처럼 원고가 잘 되는 편은 아니에요.
오은: 이제 구병모 작가님 소개를 해드릴게요.
“글을 쓰는 데는 무엇보다 '불평과 불만'이 가장 큰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소설가. 최초의 독서경험은 일곱 살 때 본 만화 <캔디캔디>다. 안데르센 문고본을 비롯한 동화를 탐독했고, 12살부터 소설가를 꿈꿨다. 사실 그 이전부터 쓰고는 있었다. 집 앞 문방구에서 천 원에 파는 200자 원고지 100장 묶음을 일주일에 한 번씩 사갔던 구병모. 중학생 때는 잘사는 친구네 집 서가에 일렬로 쭉 꽂힌 아름다운 책들 가운데 하나를 뽑아가는 방식으로 자주 책을 빌려다 읽었고, 가끔 둘째 언니가 한 권에 천 원 하는 문고본 판형의 책들을 낱권으로 사오면 열광해서 읽었다. 소설가가 꿈이라고 드러내고 다녔던 아이가 흔치 않았는지, 중2 때 담임선생님이 몇 번 불러다 『인간의 굴레』와 『유리알 유희』 같은 책을 선물해주시기도 했다.
청소년기는, 젤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숟가락으로 푹 떠낸 자리와 같다. 배짱도 별로 없고 활동력도 크지 않아 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혼자서 읽고 쓰는 일뿐이었다. ‘MBC청소년문학상’에 처음 응모한 것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직전에는 신춘문예에 최초로 응모를 했다. 이후 매년 빠짐없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편집자로 일하면서도 꾸준히 소설을 썼다. 2008년 ‘제2회 창비청소년문학상’으로 등단하기까지 15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최애 만화는 <바람의 나라>. 자판을 세게 치는 모양인지, 전자식 키보드를 여러 개 망가뜨렸다. 숙제는 미루지 못하는 성격이고, 시험 시간이 5분 남았다면 OMR 카드 바꾸는 것은 깨끗이 포기하는 쪽이다. 소설을 쓸 때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카페인 섭취량이 배로 는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는 항상 다음 소설 쓸 시간을 기다린다. 순수하게 행복을 주는 책은 역시 국어사전. 언젠가 서재를 갖게 된다면 그곳을 '지귀옥', 즉 '종이 귀신의 집'이라고 짓고 싶다. 작가는 어떤 익숙한 장소에 서 있더라도 자신이 그 자리의 유일한 이방인이라는 생각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존재라고 생각한다.”
오은: 집 앞 문방구에서 200자 원고지 100장 묶음을 일주일에 한 번씩 사갔다고 소개를 드렸어요. 저는 원고지 하면 저를 쏘아보는 200개의 눈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작가님은 100장을 일주일 안에 소화했다는 거잖아요. 대체 어떤 걸 쓰신 건가요?
구병모: 꾸며낸 이야기를 썼죠. 사실 그냥 노트에다가 써도 되거든요. 그런데 원고지 앞장이 더 뜯기 쉽잖아요.(웃음) 그리고 일단 200장 원고지 100매 한 묶음이면 단편소설 한 편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한 편을 끝내고 나면 왠지 두껍고 그래서 성취감 때문에 계속 썼던 것 같습니다.
오은: 작가님께서 직접 이번에 나온 책 『바늘과 가죽의 시』가 어떤 책인지 소개해주는 시간입니다.
구병모: 2018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 『단 하나의 문장』이라는 소설집을 발간하고 경의선 책거리에서 잠깐 창작 관련 토크 시간을 가진 적이 있어요. 그때 지나가는 말로 구두 얘기를 준비 중이라고 아주 간략하게 운을 띄운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는 단지 아웃라인만 잡았던 때였어요. 그냥 구두 짓는 요정들 얘기를 해야지, 생각한 것 말고는 정해둔 게 하나도 없었는데요. 결과적으로 『바늘과 가죽의 시』는 인간한테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 민담에 등장했던 구두 짓는 요정들이 현재를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갈등이나 죽음이나 허무함을 다룬 소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습니다.
오은: 제목에 ‘시’가 들어가기도 해서 더 심리적인 친밀감이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구병모 작가님은 제목을 허투루 짓지 않는 작가님이잖아요. 이번 제목은 어떻게 나온 건가요?
구병모: 굉장히 직관적으로 나왔어요. 구두장이 요정 얘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서 구체적으로 살을 붙여 나가기 직전쯤 바로 제목이 저한테 왔어요. 그냥 처음에 떠오른 게 그거였고요. 한때는 제목을 좀 바꿔볼까 생각도 해봤어요. 마음 속에 있던 후보 제목은 ‘슈크림’이었거든요. 먹는 슈크림이 아니라 구두 닦는 약을 의미하는 건데요. 이 제목이 집중도도 높을 것 같고, 먹는 슈크림이 아닌데도 언뜻 달콤한 느낌을 직관적으로 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또 세속적인 생각을 해보자면(웃음) 이 제목이면 더 잘 팔리지 않을까, 어디 한번 바꿔볼까 했죠. 그러다 결국 처음 생각했던 시적인 의도를 간직하자, 싶어서 최종적으로 지금의 제목으로 결정했습니다.
오은: 극중에 등장하는 ‘얀’과 ‘미아’는 정령과도 같은 존재잖아요. 실제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가 옷을 입고 신을 신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의 몸을 갖게 됐는데요. 구병모의 소설들을 보면 누군가의 도움이나 어떤 축복에 의해 겨우 존재성을 획득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이유가 뭘까요?
구병모: 누군가의 도움을 얻고, 축복을 받아 존재성을 획득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존재성을 획득한 이후 그 인물이 어떻게 됐는가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아요. 존재성을 획득한 후에 자기가 바라는 모습이 됐을까? 저는 그건 아닌 것 같았거든요. 태어난 자체가 축복도 아니고, 누군가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약간 좀 무력하다고 해야 될지, 무의미하다는 감각이 제게 있는 것 같아요.
오은: 그래서 구병모 작가님은 이러한 설정을 해두고 그 뒤에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아가면서 그 인물이 원래 꿈꿨던 삶과 어떻게 다른 삶을 살게 되는지를 주목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 얀과 미아는 정령이기 때문에 무한의 삶을 보장받은 거잖아요. 그런데 이 둘이 사는 방식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얀은 과거에 사랑했던 인물이든 내가 해냈던 일이든 사라지는 것을 마음에 크게 담아두지 않는 반면 미아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안 돼”라고 말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이끌어 나가는 캐릭터거든요. 작가님은 굳이 택하자면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구병모: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쪽이에요. 제 첫 번째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 작가 후기에도 같은 말이 나오고요. 『파과』라는 장편소설에도 ‘작은 인사라도 한마디 하려면 그건 바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얼핏 이 한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현재를 소중히 여겨라, 지금을 잡아라’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요. 저한테 이 말은 ‘지금이 아니면 큰일난다, 난 진짜 끝이다’ 같은 절박한 느낌이에요. 제가 <측면돌파>에 출연했을 때는 『버드 스트라이크』라는 소설으로 얘기한 것이라 굳이 이런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었는데 『바늘과 가죽의 시』로 <옹기종기>에 나오니 평소 마인드가 나와버렸어요. 어쩌죠?(웃음)
오은: 얀이 구두를 제작하는 장면을 보면 장인의 느낌이 물씬 느껴져요. 보면서 처음에는 작가님이 수제화 장인을 찾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뒤에 보니까 참고 문헌이 있더라고요.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시고 취재를 하셨을 텐데 조사하시면서 특별히 흥미로웠던 부분이 있었을까요?
구병모: 소설을 쓸 때 특히 자신 없다고 느끼는 부분이 현실적인 디테일에 대한 부분이에요. 대부분 상상에 의존하거나 자료를 뒤져보는 방식이거든요. 이번에도 기사나 논문 자료를 찾아보면서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는지 맞춰보는 식으로 했어요. 제 기준에서 취재라는 것은 최소한 가서 직접 잘라보고, 두드려보고, 꿰매보는 것부터라고 생각해요. 또 오은 시인님 말씀처럼 직접 현장에 가서 실제로 하는 사람을 붙들고 번거롭게 하는 정도의 적극성을 보이는 것부터가 제가 생각하는 취재인데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까지 취재라고 할 만한 것을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요. 이 자리에서 처음 고백하는 것 같은데요. 저는 인터뷰를 잘 못해요. 인터뷰하는 순간 그 사람은 사람이라기보다 저에게는 약간 소설 쓰기 위한 목적, 도구가 되는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취재를 업으로 하시는 기자님들이 제게는 엄청 고마운 존재인 거죠.
오은: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를 시작으로 얼마 전 나온 『바늘과 가죽의 시』까지 많은 작품들을 꾸준히 창작해 오셨는데요. ‘구병모 월드’에 진입하기 좋은 소설을 꼽는다면 작가로서는 어떤 걸 고르고 싶으세요?
구병모: 실제로 사인회 끝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어떤 독자님이 같은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요. 진입 장벽이 낮은, 일단 재미있는 작품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에는 『한 스푼의 시간』이 그런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나중에는 그게 소용이 없어지더라고요. 왜냐하면 어떤 독자 분이 『한 스푼의 시간』을 읽고 그런 느낌을 또 받고 싶어서 다른 책을 골랐는데 그게 『네 이웃의 식탁』이면 너무 당황스러울 것 같거든요.(웃음) 그래서 이 질문에는 ‘이것만은 꼭 봤으면 좋겠다’는 것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저는 2015년에 나온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꼽고 싶어요. 거기 수록된 단편들이 제가 부르고 싶은 노래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에요.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을 드릴게요.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영업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구병모: 『밤 끝으로의 여행』이라는 소설인데요. 제목은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소설은 거칠고 더럽고 난폭하고 아수라장 같은 비명이 들려오는 그런 소설이에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세상을 공평하게 뒤덮는 밤, 어둠 고통과 절망과 죽음뿐이야, 라고 말하는 얘기입니다. 자꾸 이런 얘기만 해서 어떡하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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