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김중미, 공부방 큰 이모로 사는 것이 나의 소망

장편 소설 『곁에 있다는 것』 / <월간 채널예스> 202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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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어느 틈에 혐오의 대상이 된 것 같아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문제가 되어버리니까 못사는 게 내 탓이 되어버리는 거죠. 적어도 예전에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거든요.(2021.05.03)


김중미 작가의 『모두 깜언』을 편집한 창비 청소년출판부 정소영 부장은 『월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글과 삶이 일치되는 작가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이 작가의 편집자로 일한 것이 내 삶에서도 커다란 배움이 될 것임을 알았다.” 이 말에 한 문장을 더하고 싶다. “글과 삶이 일치되는 작가와 동시대에 함께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이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1988년 빈민 운동을 하기 위해 만석동으로 왔으니까 33년이 지났다. 공부방 아이들의 이야기를 남겨야 할 거 같아 무작정 쓴 첫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200만 부 이상 팔렸지만 여전히 공부방 큰이모로 살고 있고 또 공부방 큰이모로 살기를 원하는 작가 김중미 이야기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출간된 후 20년이 지나고, 다시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독자를 찾은 작가의 얼굴을 맑고 웃음은 편안했다. 오래간만에 장편 소설 『곁에 있다는 것』을 출간한 작가 김중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괭이부리말 아이들』 20년 후 

언제부터 쓰시기 시작했나요?

2015년 여름 ‘쪽방체험관’(소설 속 명칭) 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오랫동안 지역 활동을 했으니까 아무래도 후유증이 있었죠. 2016년 넘어가면서 능력 있는 사람들만 결승전을 통과하는 분위기가 생겼던 거 같아요.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자학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걸 보면서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요.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쓸 때와는 가난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가난을 혐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 시기를 지나고 사람들이 가난을 빨리 갈아엎어야 하는 것, 혐오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게 느껴졌어요. 가난이 개인의 잘못이라는 점이 더 부각됐고요. ‘지금의 가난에 대해 얘기해야 할 때가 됐나 보다’라고 구상한 것이 2016년이에요. 자료를 더 모으고, 학생들 인터뷰도 더 하고 그러면서 2018년에 얼개가 잡혔어요. 틈틈이 쓰다 지난해 4월 탈고했어요.

『곁에 있다는 것』이라는 제목은 선생님께서 지으신 건가요? 

아니오. 원래 거칠게 ‘가난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썼어요. 할머니로부터의 가난부터 지금 청소년들까지 흘러온 시간들을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지역성도 드러내고 싶었고요. 요즘 제목에 가난이 붙은 책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가난의 시간’이라는 표현에 무거운 느낌이 있기도 해서 편집자분께서 제안을 주셨어요. 처음에는 에세이 같아서 망설였었는데 계속 생각해보니까 어쩌면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하겠다 싶었어요. 곁에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괭이부리말 아이들』 이 2000년에 나왔으니까 그때부터 20년이 흐른 거네요. 그 때의 가난과 지금의 가난의 양상은 어떻게 다른가요?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있었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에서 그렸던 것처럼 노동자들의 삶은 늘 고달팠고요. IMF 이전에는 노동 강도도 세고 인권 문제도 있었지만 내 몸을 혹사시키면 어쨌든 먹고는 살았어요. 경제개발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제조업에 취업하고, 일자리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거 같아요. 농촌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온 거잖아요. 그분들 하나하나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고 해도 내 몸을 열심히 움직여 일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다 비슷비슷했죠. 빈민 지역에서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살았잖아요. 

지금은 제조업 하청 공장들이 동남아나 해외로 가면서 일자리가 많이 없어졌어요. 옛날처럼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는 모습이 사라졌어요. 엄마들도 책 속에 나오는 은강 방직 이야기처럼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였고 이웃이었는데 IMF 이후로는 엄마들 직업도 대부분 서비스직이 됐어요. 횟집에서 서빙을 하거나 주방일을 하거나 아빠들 직업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더 밀려났어요. 저희 동네도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도 없는, 플랫폼 노동자도 될 수 없는 분이 많으니까. 빈곤 문제가 더 피부로 와닿는데, 필요한 것은 더 많아졌어요.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안 되니까 더 게으르고 무지하다는 취급을 받아요. 가난이 어느 틈에 혐오의 대상이 된 것 같아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문제가 되니까 못사는 게 내 탓이 되어버리는 거죠. 적어도 예전에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거든요. 이제는 가난이 무능력하고 게으르고 소비력이 없어서 쓸모없는 것이 된 거죠. 존재감도 없고요. 그런 것이 요즘 가난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모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은 지우, 간호조무사가 꿈인 강이, 교대에 진학해서 은강을 떠나고 싶어하는 여울. 은강에 사는 세 명의 고3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들의 묘사가 굉장히 생생하다는 점에서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꼈습니다.   

공부방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까 아이들 일상은 늘 보고 듣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아이들이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제가 평소에 보는 부분이 아니어서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하고, 얘기도 해달라고 하죠. 



지우, 강이, 여울, 세 친구 중 선생님께서 가장 마음이 가는 친구는 누구인가요? 

세 명 모두 애정이 가요. 누가 더라고 할 건 없는데 강이 같은 친구가 현실에 더 많으니까 더 많은 희망을 주고 싶은 아이이긴 해요. 

강이는 간호조무사로 취업할 것을 생각합니다. 간호사가 아니라 간호조무사를 꿈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성화 고등학교를 가거나 일반고등학교를 간 친구들도 취업을 위해 학원을 다니거나 하잖아요. 요즘은 경리, 회계 일은 고등학교를 나와서 하기 힘들어요. 그런 아이들이 서비스직으로 가기도 하고 그러면서 간호조무사를 현실적으로 만나는 거죠. 원래 강이도 어릴 때 꿈은 간호사이고 의사였지만 실제 일반고등학교에서는 간호대학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가서 그 아이들을 따로 묶어 입시를 준비할 정도니까요. 어쨌든 차선이기는 해요. 실제로 제가 만난 친구들은 간호 학원을 다니기 위해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이 친구들이 서비스직으로 가지 않았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직업 형태가 결국은 돌봄 노동인 거예요. 보육사이거나. 그걸 좀 드러내고 싶었어요.

지우가 강이에게 ‘난 네가 남 돕는 일 하지 말고, 부려먹는 일 했으면 좋겠어’라는 얘기를 해요. 그 장면이 마음이 찡하더라구요.

실제로 애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서로 아니까 더 많이 안타깝죠. 

『괭이부리말 아이들』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는 요청이 많았는데, 쓸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굉장히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처음 들었던 얘기는 해피엔딩으로 속편을 쓰라는 말이었어요. 저희 공부방 아이들이 했던 말이에요. 그 이후로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은 사람들이 5년, 10년 지날 때마다 “지금 그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요?”, “지금 그 아이들에 대해 다시 써주세요”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몇몇 출판사에서는 제안도 주셨어요.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이들을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렸으면 하는 마음, 얘네들은 사람들의 온기가 있는 공부방에서 자랐으니까 잘되었을 거야, 라는 기대감 같은 거였어요.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그런 이야기는 절대 안 쓸 거라고요. 

왜 절대 안쓸 거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실제로 그런 스토리는 존재하지 않으니깐요. 

‘4부 우리 이야기’는 2015년에 실제로 있었던, 만석동에 쪽방체험관을 만들려고 추진했던 사건에 대해 쓰셨어요. 

주민들과 공유되지 않은 채 추진을 해서 동네 어른들도 많이 분노하셨어요. 소설에 꼭 쓰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 어린이날이었어요. 저희들은 다 강화로 놀러 가서 없을 때 관광버스 서너 대가 와서 아이들과 엄마 아빠가 손잡고 사진을 찍고 그랬대요. 마늘 까는 모습, 공중화장실 나오는 모습 같은걸요. 왜 이런 걸 찍냐 항의하니까 어떤 엄마가 공부 안 하면 이렇게 산다고 얘기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일 이후에 주민 모두가 반대하셨어요. 우리 동네에 아파트를 지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개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가난을 상품화하는 거잖아요. 동네 주민들 반대 서명받고 여론도 안 좋으니까 무산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죠. 지금 다시 강이네 집 근처 재개발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어떤 방식으로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사람들 욕망은 좋은 집이겠죠. 그런데 어떤 자본이 들어와도 그곳이 이윤이 남을 만한 곳도 아니고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될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살펴보는 중이에요. 거기에 따라서 대응을 해야겠죠.  



기찻길 옆 작은 학교 

아이들은 공부방에서 어떻게 지내나요? 

원래 공부방에서 하던 것이 굉장히 많았어요.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하고 좋은 전시회가 있으면 같이 가기도 하고 공연도 하고요. 팬데믹 이후엔 아무것도 못 하게 됐죠. 아이들이 공부방 문을 열고 “이모, 오늘 학교에서는요” 이렇게 얘기들을 털어놓고 저학년 아이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서 울면 고학년 언니 오빠들이 위로도 하고 서로 곁을 내주며 살아왔는데, 그게 안 되고 있는 거죠. 지난해 연말에는 유튜브로 라이브 공연을 했어요. 원래 이런 행사를 하면 왁자지껄하게 먹어야 하는데 도시락 주문해서 하나씩 따로 먹었어요. 그 곁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많이 깨달았던 거 같아요. 공부방에서 하는 건 서로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거거든요. 얘가 마음이 아프구나, 외롭구나, 서로를 알아봐 주는 건데, 그걸 빨리 하고 싶어요.

코로나 시대에 공부방의 역할이 또 있을 거 같아요. 

지난해부터 저희가 하는 것이 네트워크예요. 학교에서 온라인 수업 안 들어왔다고 하면 아이들을 찾아가거나 연락하죠.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역시 일자리가 없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분들이 계시고 엄마든 아빠든 할머니든 혼자 아이를 돌보는 경우가 많아서 보호자에게 계속 전화를 드려요. 공부방에서 아이 상태를 전달하다 보면 할머니나 엄마들이 힘든 일들을 얘기하세요.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도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까요. 또 정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이 있잖아요. 정보가 있어도 해석할 수 없는 경우 저희가 설명을 해드리죠. 결원 가정이나 장애 가정은 다 고립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기존 제도 안에 있는 것들을 연결하고 알려드리고 있어요.



2001년에 강화도로 이사를 가셨어요. 이유가 있을까요?

IMF 지나고 얼마 안 됐을 때인데 개인도 피폐해지고 가정도 파탄 난 경우가 많았어요. ‘이 아이들이 무슨 꿈을 찾을 수 있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아이들과 캠핑 가서 농촌 체험을 하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농담처럼 “시골에 공부방 하나 만들까?” 이런 이야기를 계속했어요. 그때마다 아이들이 좋다고 했어요. IMF 지나면 해봐야겠다 생각해서 후배들과 돈 모아서 2001년 이사를 하게 됐어요. 2년 동안은 공부방 안 하고 만석동에 있는 친구들이 현장체험학습 내고 계절별로 오면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세끼 먹고 자기만 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힘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어른들이 잠자리를 봐주는 것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라 책 읽어주고 깔깔대며 웃다가 편안하게 웃으면서 잠드는 것 자체가 소중했어요. 그것만 2년 하고 나니까 동네도 보이고 그러더라고요. 

기찻길옆공부방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그 동네에 들어간 게 스물다섯 살 때였어요. 한 살 터울인 후배와 함께 일 년 동안은 일곱 살 미만 아이들 돌보고 신문 배달하면서 동네를 살폈어요. 그 아이들을 통해 부모님이나 초등학생 아이들을 만났죠. 그러면서 1988년 초에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친구가, 자기도 학교 끝나고 오면 갈 수 있는 공부방 해주면 안 되냐고 하더라고요. 이모들이 동생들 봐주는 게 너무 부러웠던 거예요. 만석동에 갔던 동료들이 서울로 떠나게 됐는데 저는 아이들과의 약속이 자꾸 생각나 공부방을 하게 됐죠. 그때 공부방을 만들어달라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지금 공부방 상근자가 됐어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쓰신 조세희 선생님과의 만남을 작가의 말에 쓰셨어요.『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나오기 전에 만나신 거죠? 

네. 공부방 다락방으로 쓱 올라오셨어요. 신발이 많아 올라 와 보셨다고요. 만석동에 몇 번 다니셨대요. 그때도 이미 빈 집도 생기고 동네가 쇠락해가는 즈음이었거든요. 1997년에 만석동 주변은 재개발이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가고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많으니까 궁금해서 올라오셨다고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난쏘공’을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읽게 되셨나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용돈을 아껴가며 문학 잡지를 봤는데 아마 거기에 연재된 것 같아요. 드문드문 봤어요. 그러다 책방에 갔더니 책으로 나와서 사보게 됐어요. 

그 책을 읽고 빈민 운동을 해야겠다 생각하신 건가요? 

운동까지는 아니지만 가난에 대한 문제들이 눈에 보였던 것 같아요. 제가 동두천에서 자라면서 차별이나 불평등에 예민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난쏘공’을 읽기 전에 『분노의 포도』를 읽었어요. 어릴 때 읽어서 어렵기는 했는데, 그때부터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아무래도 글을 써야할 거 같아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공부방 처음 시작할 때, 교육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르다 떠올린게 책이었어요.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문제는 돈이 없다는 거였는데, 마침 선배의 여자 친구가 창비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어요. 제가 부탁했더니 ‘창비아동문고’ 100권 세트 두 질을 주겠다는 거예요. 200권을 들고 집에 갔어요. 들춰보다 보니 제가 어릴 때 읽은 책도 많고 화가들이 그린 삽화도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그런데 애들에게 읽히니까 안 읽더라고요. 그래서 읽어줬지 요. 읽고 나서 그림도 그리고 사진으로 책을 만들어보기도 하고요. 아이들과 놀기 위한 방편으로 책을 사용하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아이들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느 날 갑자기 쓰게 된 것인데, 쓰면서 좋았어요 남편에게 아무래도 글을 써야 할 거 같아, 앞으로 공부 좀 할 거니까 많이 도와달라고 얘기한 기억이 나요. 살면서 여러 일들을 겪잖아요. 누군가 떠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요. 글을 쓰지 않았으면 이렇게 오래 버텼을까 싶기도 해요. 또 글을 안 썼다면 삶에 매몰돼서 공부방 밖, 만석동 밖 사회문제에 무감할 수도 있었는데 글을 쓰면서 좀 더 조망하기도 하고 헤쳐나가기도 하고요. 글쓰기와 삶이 서로 도움을 주는 느낌이에요.

예전과 지금, 글쓰기를 대하는 선생님의 마음은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졌어요. 그때는 뭔가 쏟아내듯이 썼어요. 그나마 시간이 생기는 새벽 한두 시에 어떻게 될지 결말도 모른 채 주욱 썼는데, 두 달 반 정도 썼던 거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쓸수록 힘든 거 같아요. 초고를 작성하고 편집자들이 읽고 수정할 걸 얘기하면서 책으로 내자고 하는데 자꾸 미심쩍은 거예요. 지금 시대에 이게 의미가 있는 작품일까, 지금 가난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귀 기울여줄까, 한편으론 그래서 더 필요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해요. 그래서 더 힘든 거 같아요. 무조건 쏟아내듯이 썼을 때가 훨씬 편한 거 같아요. 

작가와 공부방을 운영하는 운동가 중 어떤 모습이 작가님의 모습에 더 가깝나요? 

큰이모에요. 이놈의 팬데믹 때문에 큰이모로 사는 일이 예전보다 줄었지만 큰 이모에요. 

지금 작가님의 소망은 무엇인가요?

‘어린이날에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예요. 초등학생, 중학생이라도 모임을 하면 좋겠는데요. 멀리 보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는 거예요. 아이들이 각자 고립되어 있으니까요. 팬데믹을 거치면서 저희의 역할에 대해 좀 더 생각했던 건, 우리가 코디네이터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좋은 시스템을 주민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전달해주는 부분이에요. 경제적 고립, 관계 문제로 마음이 아픈 친구가 많아요. 그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어떻게 갈 수 있을까. 빨리 만나서 그걸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김중미 

동화, 청소년 소설 작가. 196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87년부터 인천 만석동에서 ‘기찻길옆공부방’을 열고 지역 운동을 해 왔으며, 2001년 강화 양도면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기찻길옆작은학교’의 농촌 공동체를 꾸려 가고 있다. 1999년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에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화 『종이밥』 『내 동생 아영이』 『행운이와 오복이』, 청소년소설 『조커와 나』 『모두 깜언』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나의 동두천』, 에세이 『꽃은 많을수록 좋다』, 강연집 『존재, 감』 등을 냈다.



곁에 있다는 것
곁에 있다는 것
김중미 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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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희

독서교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곁에 있다는 것

<김중미> 저11,7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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