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수산 "산문집 펴내며 생각한 것들"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한수산 소설가
한없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었던 가치와 황금 같은 기억들. 정염과 고독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2021.03.31)
강제 징용공과 조선인 피폭자의 역사를 27년에 걸쳐 복원해 낸 소설『군함도』의 작가 한수산이 살벌한 역사의 전쟁터에서 다시 산문시 같은 언어의 세계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깊은 사유의 문장으로 다시 독자를 찾아온 그는 얼마 전의 느낌과 사뭇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왠지 더 맑고 가볍고 풍요로워진 느낌이다. 공기방울 같은 가벼움을 추구하는 마이크로 버블의 시대에 결코 어울리지 않던 작가. 너무 크고 무거워 침몰할 것 같은 역사와, 한 시대의 고민과, 지난 시절의 그리움을 안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왠지 그에게 더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올봄의 한수산은 어디를 가도 홀가분한 듯 긍정적이다. 그가 말하는 어제는 그저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일 뿐. 나무의 삶이 말없이 가르쳐준 것들과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또 하루와 작별한다. 마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인 것처럼.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를 집필한 한수산 작가와 서면으로 만났다.
작년과 올봄은 이 세계의 모두가 사상 유례 없는 외로운 시간들을 살고 있는 기분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었는지를요. 선생님은 어떠셨는지요?
사람을 못 만나면 외롭나요? 저는 오히려 사람을 만나며 외로움을 느낍니다. 저는 코로나 이전이나 이후나 비슷합니다. 혼자 글을 써야하는. 제 삶의 10개 중 8개는 혼자 하는 일이니까요.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끝내 남아 있는 건 기억밖에 없어요. 어제란 마지막까지 남는 소중함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끼는 나이를 살고 있답니다. 그래서 제가 책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움도 아픔이 된다고. 그 아픔을 가지고 내일을 살아야지요.
이번 산문집에는 유독 잊지 못할 스승에 대한 회고가 많은 것 같습니다. 뚝지 박병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짧은 전기 한 편을 읽은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의 산문에 그만큼의 녹록찮은 인생이 담겨있기 때문이겠지요?
내 뒤에 오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내가 살아낸 스승의 이야기가 ‘그래도’ 몇몇의 가슴에 어쩌면 울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내 영혼에 하나씩 매듭이 지어지던 지난 날, 그러한 만남들이 어떻게 내 가슴에 와서 무엇이 되었으며, 나를 어떻게 살게 했던가를 더 잊기 전에 기록해 두자는 생각에서 쓴 글들입니다.
평생의 스승이었던 윌리엄 포크너 연구의 대가 박용주 선생님과의 마지막 대화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라는 포크너의 작품 제목처럼 박용주 선생님의 꿈결 같던 말씀들은 예술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뭔가를 꿰뚫어보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일본에 살고 있던 저는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결항이 되면서...장례식에도 못 간 제자가 저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보면 안타깝지요, 스승의 날 행사도 못하는 학교, 이건 학교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닙니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늘 그 생각을 하곤 합니다. 소년시절부터 대학 때까지의 은사들을 이야기를 통해 그분들이 내 젊은 날에 만들어준 가치와 나를 이렇게 살게 한 것들이 무엇이었던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유독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 서점가에도 나무를 주제로 한 책들이 꽤 나와 있는데요. 선생님은 인간과 나무의 관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개인적으로 자작나무를 좋아하시나요?
다시 태어난다면 나무로 태어나리라, 한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눈이 가슴까지 오게 쌓인 자작나무 숲에서 잠이 들었다가 아, 여기서 내가 죽겠구나 했던 고등학교 때의 체험이 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며 눈이 시리게 시베리아의 자작나무를 보았던 기억도 있지요. 거기 그 자리에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모든 것을 다해 평생을 살아가는 게 나무들입니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피어난다는, 나무의 삶이 말없이 가르치는 것들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에는 우리가 떠나온 시간과 공간, 사람과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추억이 있습니다. 다음 산문집이나 소설집의 제목은 <우리가 가야 할 내일>이 되지 않을까요? 준비하고 계시는 작품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되돌아볼 젊은 날의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이런 산문은 빨리 끝내고, 소설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쓰지 않으면 누가 쓸 것인가. 취재를 끝낸 작품들이 ‘저 여기 있어요!’하며 손을 들고 있어요.
최근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이슈는 아무래도 이후의 모든 변화에 대한 것이리라 짐작하는데요. 기후, 경제, 정치......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사는 어떤 권력의 이동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코로나가 극복되고 나면 우리는 어제의 그날로 돌아갈 거리고들 믿습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믿는 역사의 진로에서 사람은 절대 옛날로, 한번 살았던 환경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생활 정서가 아주 다르게 어떻게든 변할 겁니다. 어떻게 변할 것이냐를 주의 깊게 보고 있어요. 일상생활의 재편을 위해 자유를 향한 권력과의 거대한 충돌도 예견됩니다. ‘이게 나라냐’가 아니라 ‘이게 삶이냐’는 각성부터 찾아오겠지요.
만약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얼 가장 하고 싶으세요? 혹은 다시 돌아가라 해도 난 거절하고 싶고 내 기회를 다른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든가요. 선생님의 선택이 궁금합니다.
저는 한 번도 스무 살로는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답니다. 모든 청춘은 자신의 시대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제가 젊은 날 입버릇처럼 하던 말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환경은 나아졌나요? 세계를 떠도는 여행을 하고 돌아온 제자가 하는 말이, 1주일 지나니까 여행의 가슴 뛰던 감동이 다 사라지더라고 그래요. 참 슬픈 일이지만 독극물처럼 한국이라는 현실이나 정서가 그런 건 사치라고, 그냥 이렇게 살아! 하고 주저앉히는 거지요. 그 여학생이 말하더군요. ‘저는 이제 장미처럼 살려 하지 않아요, 나 하나쯤 취나물처럼 살렵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그냥 취나물처럼 살자. 그것도 여행이 준 각성이겠지요. 상처도 또 다른 위안이 되면서 나이테가 튼튼해지는 것이 젊음이지만 저는 결코 그걸 다시 살고 싶지는 않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인생은 처절하고, 아름다운 겁니다.
*한수산 194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경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월의 끝」이 당선되고 1973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해빙기의 아침』이 입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부초』, 『유민』, 『푸른 수첩』, 『말 탄 자는 지나가다』, 『욕망의 거리』, 『군함도』, 등이 있다. 오늘의작가상, 현대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녹원문학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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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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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었던 가치와 황금 같은 기억들. 정염과 고독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과연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그것을 사랑했기에 알게 된 것들인가. 성찰과 각성이 일으킨 사유의 불꽃, 이제 그 빛의 따뜻한 경계 안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