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레, 나몬 “웹툰 <정년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들”
『정년이 1』 서이레ㆍ나몬 작가 이메일 인터뷰
여성국극 무대 위에서 여성들은 성 역할을 넘나들어요. 여성 간 로맨스는 시대를 초월하고 늘 존재했죠. (2020.06.29)
“서울 가서 국극 허면 부자 된당께요?” 목포 소녀 윤정년은 스타가 되어 큰돈을 벌겠다는 패기로 ‘여성국극’에 뛰어든다. 여성국극은 여성이 모든 배역을 연기하는, 소리, 춤, 연기가 어우러진 종합예술. 국극의 황금기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웹툰 『정년이』에, 독자들은 전라도 사투리로 화답하며 미리보기용 ‘강정’을 아낌없이 구웠다. 성 역할을 넘나들고, 정정당당하게 대결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세계를 만들기까지 창작자는 어떤 고민을 거쳤을까? 웹툰 『정년이』의 서이레 글작가와 나몬 그림작가를 서면 인터뷰했다.
2019 오늘의 우리 만화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여성국극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요?
서이레 | 여성국극에 대한 논문을 보고, 이야기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우선 여자들이 가득한 점이 좋았습니다. 여러 여성 인물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여성국극단에는 여자들이 있으니까요. 또, 여성이 ‘남성’을 ‘연기’한다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몸놀림과 복식만으로 남성을 연기해 공고해 보이는 성별 이분법을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 그런 장르가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나몬 | 여성국극의 존재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극단이 있었고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 이렇게 계승되지 못하고 잊혀졌다는 것이 충격이었어요. 그 후엔 여성국극단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재거리들이 떠올라서 설렜고요. 짝선배와 연구생. 단원들끼리의 견제와 사랑, 무대의 희열 등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환상적인 협업을 보여주시는 두 분, 어떻게 만나셨나요?
서이레 | 지나가듯 같이 웹툰 작업을 하자고 말했었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시고 연락을 주셨어요. 2017년에 나몬님과 함께 작업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 기획서 2편을 갖고 회의 자리에 나갔는데, 그중 한 편이 『정년이』였어요. 함께 국극에 대해, 그리고 『정년이』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죠. 정신 차려보니 시간이 엄청나게 지나 있더라고요. 그렇게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때는 『정년이』가 45화에서 50화 정도 분량이라고 말씀드렸었는데 벌써 60화를 넘겼네요. 얼마 전에 이 희대의 사기행각에 대해 죄송하다고 사과드렸습니다. (웃음)
나몬 작가님은 『정년이』가 웹툰 데뷔작이지요. 다른 장르와 달리, 웹툰에서만 느꼈던 매력이 있었나요?
나몬 | 스크롤 내려 읽는 방식이나 주간연재 텀 때문에 만화책보다 더 타이밍 조절에 민감한 것 같아요. 스크롤을 내리는 속도를 가늠하며 대사와 그림을 조절해야 했고 호흡을 끊어가는 순간들을 잘 선택해야 하더라고요. 웹툰이란 장르의 특성을 작업에 뛰어들고 나서야 조금씩 파악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서이레 작가님은 원래 소설을 쓰시다, 웹툰 작가로 활동하게 되셨다고요.
서이레 | 어렸을 때 만화를 무척 좋아했어요. 고등학생 때, 소설을 쓰는 틈틈이 만화 스토리를 써보기도 했었는데요. 어느 날 제가 쓴 스토리를 친구가 만화로 그려주었는데 그게 너무 좋았어요. 저는 그림을 못 그리는데, 좋아하는 만화를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상상한 장면이 그림으로 재현되는 것도 좋았고요. 짜릿한 경험이었어요. 지금도 작화 파일이 오면 너무 두근거려서 파일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해요. 이 짜릿함이 계속되는 한 만화 대본을 쓸 것 같습니다.
공동 작업의 묘미를 느낄 때가 있으신가요?
서이레 | 저는 완성된 작화를 보는 일 자체로도 너무 즐거워하는 사람이라 공동 작업의 묘미는 항상 느끼고 있어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도 공동 작업을 통해서 웹툰을 만들 수 있다니 감동적입니다. 나몬 님은 워낙 이야기를 즐기시고 서사 이해도도 높으신 분이셔서 제가 드리는 대본을 세심하게 표현해주세요. 자선공연 <춘향전>을 올리는 에피소드에서 정년이의 방자 연기 작화를 받아보았을 때, 이걸 맨 처음 볼 수 있는 사람이 나여서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몬 | 작업 과정은 이레 님이 먼저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작업하신 후에 함께 의견을 나누고 확정이 되면 한 화씩 대본을 넘겨주세요 그 대본을 보고 제가 콘티와 원고 작업을 한 후 완성품으로 넘깁니다. 혼자 힘으로는 해낼 수 없는 풍성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만화를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습니다. 만화를 그리게 된다면 우선은 저 스스로가 매료되어 푹 빠질 수 있는 이야기이길 원했고, 이레 님의 필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작업하고 싶었죠.
1950년대 여성국극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조사하셨을 것 같아요.
서이레 | 우선은 논문을 비롯한 구술집, 배우들의 자서전 위주로 찾아보았습니다. 많은 책들이 절판이어서 중고로 구하거나 소장 도서관을 찾아가 제본했어요. 임춘앵 선생님의 전기와 조영숙 선생님의 자서전, 그리고 여성국극 전성기에 배우로 활동했던 분들의 구술자료집이 당시 여성국극단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림체가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캐릭터들의 동작이 생동감이 넘치고, 컬러 톤이 시원하다 등의 평이 많았어요.
나몬 | 처음에는 선 작업만으로 원고 퀄리티를 잡아가려고 했지만, 색의 유무가 장면의 분위기를 좌우하고 캐릭터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아 채색을 결정했습니다. 원래 깔끔하게 선을 따고 단색으로 채색하는 방식의 작업을 선호했고 오래 작업을 끌고 가려면 손에 익은 스타일이 제일 좋을 것 같아서 지금의 스타일이 됐습니다.
정년이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캐릭터잖아요. 그래서인지 표정이 다채로워요.
나몬 | 감정을 숨기지 않고 발산하는 캐릭터기 때문에 표정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표정을 아주 다양하게 그릴 수 있어서 재밌습니다. 외형 특징 중에선 다른 캐릭터들보다 큰 키와 숱 많고 잘생긴 눈썹을 그리는 데 공을 들입니다.
성 역할을 넘나드는 상상력이 돋보여요. 남자 배역을 즐기는 배우들이나, 옥경과 혜랑의 로맨스, 남장을 하는 고 사장이 대표적인데요. 캐릭터들의 다채로운 욕망을 어떻게 그리고 싶으셨나요?
서이레 | 자신에게 솔직했으면 했어요. 찾아보면 그 당시에 그런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남성 예술인들이 여성 예술인들을 무시하는 탓에 여성 예술인들끼리 극을 올려보자고 의기투합해서 나온 것이 여성국극이거든요. 국극 무대 위에서 여성들은 성 역할을 넘나들죠. 여성 간 로맨스는 시대를 초월하고 늘 존재하던 것이었고요. 고 사장 역시 당시 남장을 하고 고등교육을 받으러 다니거나, 국회의원으로 나섰던 여성 인물들을 생각하며 만들었어요.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그리지 않아 좋다는 평이 많았어요. 여성 캐릭터를 표현할 때, 신경 쓰시는 부분이 있나요?
나몬 | 몇 년 전부터 조금 더 다양한 체형을 그려봐야 할 텐데 하고 있습니다. 날씬한 체형을 그리는 데 익숙해져 있어서 긴장을 낮추거나 작업 시간이 넉넉치 않으면 캐릭터가 가늘어지더라고요. 각각의 캐릭터에 맞는 다양한 체형를 연구하고 연습할 필요를 느낍니다.
캐릭터들의 의복이 감각적이에요. 양복과 한복이 공존하는데, 어떻게 당대의 복식을 표현하고자 하셨나요?
나몬 | 옷 그리기를 좋아해서 한복과 양복 둘 다 그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50년대 양장은 당시 유행했던 클래식한 셔츠, 하이웨이스트 팬츠나 스커트 차림을 많이 그리게 됐어요. 한복은 전통 한복에서 벗어나 옷고름 부분을 단추나 브로치로 대체하거나 생활한복 스타일도 그려보았습니다.
38화, 41화에는 BGM이 들어가 있어요. MZ님과의 협업은 어땠나요?
서이레 | 감사하게도 MZ님께서 먼저 제안을 주셔서 협업하게 되었어요. <목포의 청춘>은 가볍고 살랑거리는 청춘의 사랑노래를 상상해 가사를 직접 써보았습니다. 1930~50년대 노래를 자주 듣는 편이어서 레퍼런스가 될만한 노래를 찾아 가사와 함께 MZ님께 보내드렸어요. MZ님께서 워낙 웹툰 배경음악 작업을 많이 하신 베테랑이셔서 훌륭한 곡을 만들어 주셨어요. 41화에 삽입한 노래는 38화에 넣은 <목포의 청춘>을 스트링 버전으로 편곡한 노래에요. 국극단으로 돌아온 정년이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서정적이고 현대적으로 꾸몄습니다.
여성국극에 주목한 또 다른 창작물로, 다큐멘터리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이나 정은영 감독의 미술 작업이 있지요. 인상 깊었던 점이 있다면요?
서이레 | <왕자가 된 소녀들> 피소현 PD님과는 인터뷰를 해서 직접 국극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결혼할 때 남편에게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언니들이 있다.’라고 설명을 하고 결혼을 했다는 국극 팬들이에요. 2억을 국극에 투자해서 단장을 해보았다는 분도 있고요. 그분들의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이 좋았어요. 정은영 선생님의 작업은 현대의 드랙킹 아티스트까지 확장한 점이 좋았어요. 작년 퀴어영화제에서 정은영 선생님의 작품을 상연할 때 드랙킹 아티스트 아장맨님의 퍼포먼스도 함께 보았거든요. 이 경험이 너무 좋아서, <드랙x여성국극> 공연도 보고 왔어요.
여성국극은 춤, 노래, 연기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는 무대 예술이잖아요. 이를 그림으로 옮길 때, 어려웠던 점이 있었나요?
나몬 | 연기, 춤과 노래를 다루는 만화인데 말풍선 속 대사와 그림으로만 묘사되기 때문에 캐릭터가 표현하는 동작과 표정에 전달력이 있는지 신경 쓰고 있습니다. 어떤 감정과 동작인지 확실하게 표현하는 장면과 조금 더 모호하게 표현해서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장면들을 구분해가며 작업합니다. 작업을 하면서 그림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보통 창작물의 캐릭터들은 당연한 듯이 표준어를 쓰고는 하잖아요. 전라도 방언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서이레 | 여성국극에 도전하려는 주인공이라면 소리에 어느 정도 재능도, 자신감도 있어야 할 텐데, 당연히 소리의 고장 전라도 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판소리 최초의 여자 명창 진채선을 비롯해 유명한 명창들은 남도에서 유독 많이 나왔어요. 여성국극의 영원한 왕자로 불리는 임춘앵 역시 전라도 출신이죠. 실감 나는 대사를 쓰기 위해, 전라도에서 20년 이상 거주하신 분을 찾아 검수를 받으며 작업 중입니다.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매란여성국극단의 디테일이 있다면요?
나몬 | 매화 『정년이』 타이틀과 함께 등장하는 매란국극단의 로고는 꽃송이 안에 동양란이 들어가 있는 모양으로 디자인했습니다. 전통문양들을 참고하며 만들었어요.
앞으로 어떤 여성서사를 창작하고 싶으신가요?
서이레 | 요새는 아주 못된 여자들, 버릇없고 나쁜 여자들이 주인공인 작품을 보고 싶어요. 괴상하고 이상한 여자들도 보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곧 공포영화 시즌이네요. 클로이 모레츠가 나온 영화 <캐리>를 볼 때가 돌아왔어요.
나몬 | 스릴과 서스펜스가 있는 장르를 하고 싶어요. 조여오는 위기와 불안에 대처하고 해결하는 여자들이 보고 싶습니다. 아주 불온한 여자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도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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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레> 글/<나몬> 그림13,500원(10% + 5%)
소리, 춤, 연기가 어우러진 종합예술 ‘여성국극’. 여성이 모든 배역을 연기하는 독특한 창극 무대로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여성 예술가들에게 인기와 명성, 부를 안긴다. 소리 하나는 타고난 목포 소녀 정년은 국극단에 들어가 부자가 되는 것을 꿈꾼다. 과연 정년은 스타가, 새로운 ‘내’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