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실 작가, 동요는 ‘그리운 사람’입니다
『한 줄도 좋다, 그 동요』 펴내
어른으로 살아가기에 지치고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동요는 ‘힘Hymn’처럼 우리에게 ‘힘(power)’를 줍니다.(2020. 06. 19)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 『복실이네 가족사진』, 『상계동 아이들』 등 그림책부터 어른을 위한 책까지 많은 책을 펴내고, 그러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과 잠자기 전, 하루에 두 번씩 일기를 쓰고 있는 노경실 작가. 그가 『한 줄도 좋다, 그 동요』 로 일기를 쓰는 간절함을 담아 동요의 노랫말 한 줄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그 이야기로 한때 어린이였던 우리 모두를 위로한다.
책 제목이 『한 줄도 좋다, 그 동요』인데요. ‘그’의 의미가 무엇인지요?
이 책은 ‘한 줄도 좋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입니다. 각 권마다 가곡, 옛 유행가 등 테마로 제목을 삼았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나도 『한 줄도 좋다, 동요』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어색하고, 허술해 보였습니다. 왜 그럴까? 아하! 곧 알았지요. 그것은 동요가 지닌 ‘시간성’ 때문이라는 것을!
‘동요’도 다른 노래들처럼 ‘기억과 추억’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란 면에서는 훨씬 강하고 깊은 강점이 있지요. 그 점이, 유행가나 가곡―그것이 클래식이건 월드 뮤직이건 스스로 찾아 부르는 ‘기호(liking 또는 taste)’가 담긴 노래―과는 확연히 다른 미덕이기도 합니다. 동요는 기호가 아니라, 엄마의 젖을 빨아먹고 젖트림을 하듯 부르기에 ‘유년의 시간’을 근거로 하지요. 심지어는 ‘태아의 시간’을 거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한 줄도 좋다, 그 동요』로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the’가 아닌 ‘missing, 그리움’의 의미입니다.
또 제목 얘기이네요. 부제가 ‘너와 함께 다시 부를 수 있다면’인데요. 함께 다시 (노래) 부르고 싶은 ‘너’는 누구인지요?
‘나’가 아닌 모든 대상은 ‘너’이지요. ‘나’ 외에 모든 생명체와 하늘과 땅과 바다의 온갖 존재들, 그리고 사물들까지도 ‘너’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를 잃어도 별과 함께 노래할 수 있고, 소년은 친구랑 다툰 뒤에 바둑이랑 같이 뛰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 여자는 그 남자와 헤어져도 바람 속에서 노래할 수 있으며, 노인은 걷지 못해도 아버지를 기억하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부끄러운 일을 당한 사람도, 누군가와 즉, ‘너’와 노래할 수 있지요.
이런 존재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또, 나무 한 그루라도, 손에 잡을 수 없는 빗줄기라도, 달리는 기차라도 있다면, 심지어 기억 한 조각이라도 있으면 함께 노래할 수 있지요.
혹시 이 책에 넣지 못해서 아쉬운 노래가 있으신가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시대가 혼란스럽고 배고프며 눈물이 많을수록’ 동요가 많이 탄생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해야겠지만, 또 하나는 그 동요를 어린이들이 불렀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의 아이들을 보십시오. 물론 뉴스에서 알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아이들과 여러 이유로 가정이 무너지고, 마음의 병을 앓는 아이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요즘 아이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마음에 드는 것을 ‘내 것’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투사처럼 나서서 큰소리로 ‘활활 타오르는 애정’을 가진 부모들 천지이지요. 이뿐입니까. 아동복지나 아동인권의 신장도 만만찮습니다. 이토록 아이들의 몸이 커지고 점점 살이 오르고, 인권이 탄탄해져 가는데 새로운 동요는 거의 탄생하지 않고, 나온다 해도 불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 두 번째 『그 동요』를 작업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찢어진 우산’을 들고 가는 가난한 아이도, 아버지는 비를 맞고 가고 대신 아이가 들고 오는 커다란 ‘깜장 우산’의 아이도, 부잣집 아이를 상징하는 예쁜 ‘파란 우산’의 아이도! 서로 우산 이마를 마주하고 걸어가는 〈우산〉이란 동요처럼 물질과 소유를 뛰어넘는 사랑과 인자함이 가득한 노래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배고픔처럼 지독한 ‘마음고픔’을 채워주는 동요들이지요.
책을 읽으면 작가님의 어린 시절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이 답은 나의 장편동화 『복실이네 가족사진』을 읽어 주십사, 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대신하지요. 참, 덧붙인다면, 나는 ‘눈물 많고, 웃기 잘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주기 좋아하던 큰언니입니다. 동생이 넷인….’
책에서도 언급하시지만, 요즘 아이들은 동요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동요가 여전히 필요하다면 왜 그럴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음식이나 책, 몸과 지식의 성장과 비교하면 되지요.
아이들은 젖과 이유식을 거쳐도 단단한 음식을 곧바로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할머니가 꼭꼭 씹어서 아이 입에 넣어주기도 했지요. 고기를 먹을 때도 질긴 힘줄 대신 가장 연한 부분을 먹입니다. 또 아이들은 딱딱한 잡곡밥보다 쌀밥이나 포슬포슬한 빵을 더 좋아하지요.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어릴 때에는 아예 어른들이 읽어줍니다. 그러다가 ㄱ, ㄴ, ㄷ, ㄹ을 배우고 그다음에 가,나,다,라를 익힙니다. 그다음 엄마아빠, 사과 강아지 등 낱말을 습득하지요. 입으로는 온갖 말을 해도 완전한 문장이 되려면 한참 걸리고, 그것을 글로 완성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몸과 지식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재벌이라 해도 자기 자식을 1년 만에 열 살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권력자라 해도 지식과 지혜를 자식의 머릿속에 주삿바늘로 집어넣을 수는 없지요.
동요는 한 사람의 지·정·의를 구축해 나가는 데에 음식과 책과 몸의 살과 뼈처럼 그 기능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요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동요를 부르는 과정 없이 곧바로 몸을 비틀며 어른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트롯 열풍이 아이들도 휩싸고 있죠. 친구들과 사귀는 법도 화해하는 감정도 모른 채, 죽느니 사느니 하는 이별과 애정의 질곡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더 말하고 싶지만 지면이 부족하니 이 정도로 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른들도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를 추억할 필요가 있다면 왜일까요?
동요는 철부지들의 뜻 없는 흥얼거림이 아닙니다. 동요에는 역사의 다양한 얼굴 표정이 있고, 온갖 상황 속에 놓인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과 살아가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동요는 복수나 절망, 원한, 포기와 비방과 편가르기 등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유행가에 숨어 있는 무분별하고 얼굴 뜨거워지는 성적 코드도 없습니다. 반라로 춤추며 노래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달할 수 있고, 인기 연예인이나 유명한 사람이 부르지 않아도 시들지 않지요.
왜 어른들도 동요를 들어야 하는가? 부모가 아니더라도, 어른으로 살아가기에 지치고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동요는 ‘힘Hymn’처럼 우리에게 ‘힘(power)’를 줍니다.
‘어른 책’도 쓰시지만, 40년 가까이 어린이들을 위한 책을 쓰고 계십니다. 작가님께 어린이는 어떤 의미일까요?
어른들은 살아오는 동안 웬만한 면역력을 갖게 되어, 억울해도 돌아서서 침 한번 뱉고 이겨냅니다. 치사해도 자식들 얼굴 생각하고 허허실실 웃습니다. 수치스러워 악몽을 꾸더라도 잠자리에 듭니다. 이번 일 안 되면 끝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안 되었을 때에, 죽을까 하다가도 속는 셈 치고 다시 아침밥 먹고 집을 나섭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풀입니다. 밟히면 말라비틀어집니다.
어린이는 흙입니다. 발길질하면 사방으로 흩날려갑니다.
어린이는 창문입니다. 손대어 닦지 않으면 더러워집니다.
어린이는 빵입니다. 그냥 두면 벌레들이 들끓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씨(seed)입니다. 씨는 생명이지요. 생명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씨를 씨답게, 생명을 생명 되게 돌보아야 합니다. 역할은 저마다 다르겠지요. 심는 사람, 물주는 사람, 대를 세워주는 사람, 비료를 주는 사람, 벌레를 막아주는 사람…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요, 어린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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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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