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 “맛은 본능? 착각입니다”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펴내 인문학적 시선으로 탐구하는 한국의 맛
문명의 맛과 본능의 맛이 있고 인간은 이 두 개가 섞인 상태에서 맛을 느껴요. 으레 문명의 맛은 의식하지 않고 본능의 맛이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019. 09. 05)
‘치킨은 맛이 없다’, ‘떡볶이는 떡볶이가 아니다’와 같은 도발적인 메시지로 세간의 이목을 끈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행복한 맛여행』 , 『허기진 도시의 밭은 식탐』 등을 펴내며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소개한 그가 이번에는 본능 너머에 있는 ‘숨은 맛’을 찾아 나섰다.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는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질문에 기반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치킨, 떡볶이, 삼겹살 등의 한국 음식을 재해석한 결과다. 개인의 입맛을 조종하는 자본과 정치 권력에 주목한 그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할 것을 권한다.
이 책은 한국인이 한국 음식에 붙여둔 판타지를 읽어내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 작업의 도구로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였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한 주제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해대는 일이다. 그 “왜?”라는 질문과 그로 인해 얻어내는 대답이라는 것도 결국은 질문자의 욕망이 투사된 판타지일 뿐이다. (2쪽)
맛은 본능이라는 착각
2년여 만에 나온 책입니다. 이전 책에서 ‘음식은 문화다’라는 식의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면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에서는 이를 전제로 다른 측면의 구체적 사례를 설명하셨어요. 맥락은 같지만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기진 도시의 밭은 식탐』 이 우리 문화적 측면에 기대어 음식을 소개한 책이라면,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는 “우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이 진짜 맛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책입니다. 약간 결이 다를 수 있지만 제가 원래 하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띠지에 ‘치킨은 맛이 없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이야기를 한 지 8년 정도 됐고요. ‘떡볶이가 진짜 맛있는 음식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것도 굉장히 오래됐습니다. 다만 이번 책에서 자료를 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죠.
‘맛있다’는 감각에 대한 의문인 건가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본인의 감각에 따라서 맛을 주관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에 의문을 던지는 거죠. 누군가가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의 시초는 무엇인가요?
맛을 느끼는 게 본능이라면 인류, 즉 전 세계의 호모 사피엔스들이 똑같은 입맛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미국 사람이나 인도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같아야죠. 그렇지 않잖아요. 지역이나 민족마다 좋아하는 맛, 싫어하는 맛이 달라요. 맛의 기준은 그 사람이 어느 지역에서 살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한국인이 김치, 떡볶이, 치킨을 좋아하는 것은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죠. 미국인이나 동남아시아인도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다면 한국인의 입맛과 유사해집니다. 그러니까 맛있다, 맛없다는 판단은 본능이 아니죠. 그렇다면 무엇이 내 기호에 관여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인간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27쪽)는 말과 통하는 이야기네요.
그렇죠. 자신의 미각을 의심하라는 거예요. 동물들은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먹을 수 없는 것인지 본능으로 분별합니다. 인간은 본능을 뛰어넘어요. 사회적 동물이잖아요. 인간이 느끼는 맛도 사회적 결과물이죠. 자본과 정치 권력이 산업 국가를 운영하는 데 유리한 음식을 대중에게 제안한, 심하게 말하면 강제한 것일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해야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바꿀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어요. ‘그냥 내가 맛있어서 먹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계속 그것만 먹겠지만, 사회적으로 주어진 음식 또는 맛이라는 걸 생각하면 ‘내가 왜 이것밖에 먹을 수 없지?’라고 생각하고 더 양질의 음식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어요.
인간 집단이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할 것인지 판단하는 데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집단의 구성원에게 넉넉하게 주어질 수 있는 음식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소속 집단에게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안정 욕구와 관련이 있다.(고교 사회 시간에 배운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을 떠올려보시길 바란다.)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27쪽)
사회적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맛이라는 게 존재하나요?
물론 본능적 영역도 있어요. 그러니까 ‘문명의 맛’과 '본능의 맛’이 있고, 인간은 이 두 개가 뒤섞인 상태에서 맛을 느끼죠. 그런데 많은 사람이 ‘문명의 맛’은 의식하지 않고 여기서 딱 하나만 떼서 ‘본능’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럼 이런 현상이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겠네요?
인류 보편적인 일이죠. 사회적 맛이라는 개념을 이해는 게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회 환경에 의해서 ‘어떤 음식이 맛있다’라고 인간에게 세팅되면 우리 몸은 그걸 본능으로 느껴요. 착각하게 만들죠.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건 커피가 맛있기 때문이지 자본이 값싸게 커피를 사 와서 팔고, 열심히 광고해서 우리가 커피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죠. 이건 황교익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뇌과학, 철학, 인류학에서 이미 논의된 것들이죠. 그런데 이런 학문에서 다루는 내용은 어려워서 대중이 읽기 힘들어요. 서양 음식에 대입해서 우리에게 낯설기도 하고요. 저는 이미 형성된 철학적, 과학적 논의에 우리 일상의 음식을 대입해서 풀어 놓았을 뿐입니다.
길들여진 맛을 경계하기
저는 카레를 좋아하는데요. ‘그럼 내가 느끼는 카레의 맛이 문명의 맛인가 아니면 본능의 맛인가’하고 생각해 봤어요.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구분하죠?
바로 그거예요. 거기까지만 하면 됩니다. (웃음) 알 수 없어요. 그게 정상이에요. 의심만 하면 돼요. 내 감각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 이 단계가 인문학적 사고죠. 답은 없어요. 인문학에 답이 어디 있어요.
“치킨은 맛이 없다”, “떡볶이는 맛없는 음식이다”라는 발언도 정답이라기보다 앞서 말씀하신 ‘의심하는 태도’를 권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할 수 있나요?
맞습니다. 그 생각까지 잘 안 가니까 해보라는 거예요. 이 책의 내용을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겠죠. ‘내가 맛있다는데 뭔 소리야?’ 하는 거죠. 우리는 자신이 본능에 의해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자본과 정치 권력이 그렇게 만들어놨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게, 의심하면 안 되게끔 해 놓았죠. 그래서 자꾸 “왜?”라고 물어야 해요.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이 뭔가요?
없어요. 특정한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면 그 외에 다른 것을 아래로 보기 때문이에요.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자주 선택하는 음식은 있을 것 같은데요.
외식공간에서 습관적으로 먹는 음식을 꼽자면 짜장면이에요. 유년 시절의 어떤 기억이 이 기호에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어릴 때 짜장면은 보상의 음식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짜장면을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에 먹었잖아요. 제가 뭔가를 잘해서 칭찬받을 때 먹었던 음식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짜장면이 칭찬, 위로, 사랑과 연결되고 그때의 기억을 호출하는 거죠. 책 뒷면에 쓴 ‘사회적 맛이 개인에게는 추억, 역사가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에요.
슬로푸드는 한식이 아니다
‘인간을 시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음식’(109쪽)으로 슬로푸드를 설명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만들었어요. 모든 생각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는데 슬로푸드도 마찬가지죠. 1984년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슬로푸드가 처음 생겼어요. 당시 유럽에서는 GATT 체제 안에서 세계화가 진행 중이었고, 유럽 입장에서 세계화는 미국화와 다름없었습니다. 신대륙의 음식은 유럽 사람들이 이주해서 만든 거라 유럽사람들이 먹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았거든요. 유럽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미국의 농산물과 가공품들이 낮은 가격으로 유럽으로 들어오는 거였죠. 그래서 유럽에서 자국의 가공업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문화 장벽을 세운 거예요. 세계화를 반대하고 지역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한다는 이데올로기 즉, 슬로푸드를 만들어 낸 거죠.
한국에서는 슬로푸드의 의미가 퇴색됐다고요.
우리는 흔히 한식이 슬로푸드라고 생각해요. 슬로푸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패스트푸드가 왜 생겼는지 알아야 해요. 패스트푸드는 노동자가 음식을 먹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생긴 음식이에요. 자본이 노동시간을 늘리기 위해 만든 음식이죠. ‘산업 음식’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해요. 패스트푸드가 생긴 배경이야말로 자본이 어떻게 우리 먹을거리를 강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고 슬로푸드는 이런 자본의 행태를 거부하는 방식 중 하나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슬로푸드를 단순히 한식, 또는 천천히 조리해 먹는 음식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슬로푸드는 그 제조법의 특징을 분류 기준으로 삼아 만든 단어가 아니다. 사회,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용어이다. 운동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슬로푸드라는 단어에는 “무엇을 반대하고 무엇을 지향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반대의 대상은 세계화이고 지향점은 지역적 삶이다. (106쪽)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회주의라는 키워드로 모든 주제가 꿰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사회주의자라고 그랬잖아요. (웃음)
한국에서 슬로푸드의 본질이 퇴색된 이유로 ‘슬로푸드를 한국에 이식한 이들은 한국인의 레드 콤플렉스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110쪽)고 하셨는데 이런 점에서 자유로우신 것 같아요.
‘지금 당장 사회주의 혁명을 해서 세상을 뒤집어야 한다’와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글쓰기라는 노동을 팔아서 사는 사람이니까요. 다만 인간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고 하면 긴 흐름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가는 게 맞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는 거죠. 미래를 어떻게 그리는지에 따라서 현재의 방향이 정해지잖아요. ‘더 나은 세상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데올로기나 이상을 가질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 많잖아요. (웃음) 생각의 자유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변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어렵게 이런 세상을 얻었으니 최대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야죠
음식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문화’
조선 궁중음식 무형문화재 한희순 씨가 작성한 보고서를 소개(251쪽)하면서 궁중음식이 일본 왕가의 음식이라고 하셨어요.
1970년대에 한희순 씨가 조선 궁중음식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때 작성된 보고서를 보면 조선 궁중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음식이 기록돼 있어요. 그중에서도 송이 전골 조리법은 스키야키 조리법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같아요. 원래 문헌에 있던 자료인데 이번에 제가 처음으로 소개한 거예요.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과연 우리가 아는 조선 궁중음식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죠.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는 중요한 지점이 될 수 있는 자료예요. 이걸 가지고 토론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책에 소개된 사례를 보면 한국 음식 문화가 일제강점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 음식도 왔다 갔다 해요. 뒤섞이기 마련이죠.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과 일본의 음식이 많이 섞였어요. 김치만큼 많이 먹는 단무지가 그렇고, 빙수, 붕어빵, 단팥빵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일제강점기 자체가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잖아요. 많은 사람이 그 시간 동안 우리 것이 왜곡되고 말살되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혼을 살리기 위해서 조선 시대 음식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게 한국인이 가지는 한국 음식에 대한 시각이에요. 그래서 한국 전통 음식에 관한 담론을 보면 일제 강점기가 없죠. 다 조선 시대예요. 그런데 문화를 이야기할 때 어떤 특정한 시간만 분리할 수는 없어요. 우리 삶 안에 그 시간이 들어와 있는 거니까. 우리는 일부러 이런 걸 이야기하지 않아요. 치욕스러운 역사를 들추는 거로 생각하고 묻으려고 하죠. 그러면 그때를 살던 민중의 삶이 묻히는 거예요.
뒤섞였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반대로 한국 음식이 일본에 간 경우는 없나요?
많죠. 대표적인 음식이 김치예요. 일본 사람들 일상에 김치가 굉장히 깊이 들어가 있어요. 우리가 분식집에서 단무지 먹는 것처럼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김치를 한국식 김치라고 표시했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 ‘화풍 김치’, 즉 일본식 김치라고 표시하기 시작했죠. 지금 우리가 먹는 단무지도 일본의 다꽝이 와서 변한 거잖아요. 김치도 일본에 가서 일본 사람 식성에 맞게 변했어요. 그런데 이런 현상을 민족 감정에 기반해서 “우리 것이 더 우수해서…”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일본에 있는 한국 음식보다 한국에 있는 일본 음식의 종류가 훨씬 많은데요. 다른 나라에서 한국 음식이 번성하는 이유를 ‘한국 음식이 우수해서’로 이해하면 이걸 그대로 받아서 “일본 음식이 우수해서 한국에서 이렇게 번성한 거야”라고 해야 하잖아요. 음식은 문화고 문화에 우열은 없어요. 음식은 그냥 사람 따라 넘나들 뿐이죠.
유튜브에서 황교익TV를 방송 중이에요. 주제는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젊은 애들이 유튜브를 많이 본다고 하니까 젊은 애들한테 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요. 음식과 관련된 거 아무거나요.
대본 직접 쓰시나요?
대본 없어요. 원래 대본 없이 합니다. <수요미식회> 촬영할 때도 내가 말하는 순서를 확인하는 용도로 봤었죠. (웃음)
방송을 처음 시작할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지루하다는 사람이 많아요.
왜 그럴까요?
유튜브는 일종의 놀이라고 생각해요. 재미 요소가 중요하죠. 그런데 황교익TV는 재미없어요. 젊은이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유희적 요소가 없죠. 그래서 제가 재미난 분장을 해서 나가 볼까…(웃음)
이후의 출간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가 황교익의 밥상 인문학 1권이에요. 2권에서 일상 음식을 더욱 섬세하게 들여다본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를테면 ‘생일날 왜 미역국을 먹지?’, ‘왜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지?’와 같은 것들이요. 1권과 마찬가지로 ‘왜?’라는 질문에 기반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일상 음식을 탐구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요. 이어서 3권에는 평생 먹어온 음식을 미식적 관점에서 소개하는 일종의 연대기를 담을 예정이고요.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황교익 저 | 지식너머
모두 읽고 나면 음식에 대한 판타지가 걷히고 한국인으로 살면서 한국 사회가 나를 추동하고 제어하고 있던 내밀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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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밝히는 ‘길들여진 맛’에 대한 도발적이고 위험한 민낯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에서 황교익은 우리의 기호를 추동하는 ‘어떤 힘’에 주목한다. 우리는 특정 음식에 대해 맛있다, 맛없다를 구분하는 것이 개개인의 고유한 입맛에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음식에 들러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