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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 “조선의 왕비는 정치인이었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저자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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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도 정치인이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그것도 정치 행위였어요. 잘못된 판단으로 정치에 무관심했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정치에 관여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2019. 07.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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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에 의해 남겨진 여성의 기록


조선의 왕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왕의 사랑만을 바라며 시기와 암투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친정 가문의 세력을 키우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인물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르다. 조선의 왕비는 ‘주체적인 정치인’이었다는 것. 김진섭 저자는 오랜 세월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사료들 속에서 “궁궐 담장을 넘나든 말, 기억, 기록”을 살펴봤다. 그 결과 “박제화 된 왕비”를 거둬내고 “한 인간으로서의 왕비”를 되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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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들이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도 정치와 관계돼 있을 수 있어요.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갈등을 부추기는 게 남자일 수도 정치일 수도 있는 거죠. 정치적으로 봐야 될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잘라놓은 부분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궁궐 안에 갇혀 있는 왕비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그런데도 자꾸 말이 붙고 그것이 다시 잘려나가기도 해요. 그 가운데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게 되거나 흥미 위주로 되어가는 경우도 있고요. 결국 ‘왕비 아닌 왕비’가 되어 버리는데, 왕비도 정치인이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그것도 정치 행위였어요. 잘못된 판단으로 정치에 무관심했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정치에 관여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난 6월 28일 저녁, 예스24 중고서점 목동점에서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의 저자 강연회가 열렸다. 김진섭 저자는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를 밝히며 강연을 시작했다.

 

“처음 이 책을 쓰자고 제의를 받았을 때, 거절했었어요. 워낙 관련 책들이 많이 나와 있기도 하고요.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왕비의 시기와 질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잖아요. 결론은 남존여비, 현모양처 같은 것들이고요. 그런 이야기를 또 한 번 쓸 이유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거듭 제안을 하시기에 ‘뭔가 이유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겠나’ 싶었어요.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똑같은 자료를 보고도 생각을 조금 달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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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 저자는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영상대학원에서 문화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춘천교육대학교 겸임교수와 동국대학교 만해마을 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과 인천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긴 시간 역사를 연구해왔지만 ‘조선의 왕비’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정확한 이름과 출생 시기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남아있는 자료의 경우에도, 본인의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은 거의 없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이지 객관적인 사실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죠. 그 외에는 본인이 남긴 말이나 기록이 없고, 남편인 왕이나 대신들에 의해서 남겨진 작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종에 의해 폐비 윤씨가 내쫓겼다고 하는데, 그 사건의 빌미는 왕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거잖아요. 실록에 보면, 말다툼 비슷한 걸 하다가 손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상처가 났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다음 날에 대신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폐비시키는 건 무리가 아니냐고 반대를 하기도 하고요. 반면에, 성종이 폐비 윤씨의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우리가 객관적인 사실을 더 봐야 하는데, 너무 취사선택된 자료들만 가지고 해석하는 경향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는 기존에 답습되어 왔던, 조선의 왕비를 비롯한 여성들에 대한 편향된 시선에서 빗겨 서있다.

 

“지금까지 많은 책에서 왕비를 다루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보면 왕을 중심에 놓고 왕비는 조연으로 바라봤던 것 같아요.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올바른 여성상’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사례로 등장하기도 하고요. 한 인간으로서 왕비를 바라보는 일은 많지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왕비들만 다루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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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대부, 아내에게 동료의식 갖고 있었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를 쓰면서 김진섭 저자가 새롭게 주목한 인물은 ‘신의왕후’였다.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으로, 조선 개국 10개월 전에 사망해 나중에 왕비에 추존된 인물이다.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까닭에 신의왕후를 “조용히 집안 살림하면서 고생만 하다가 위장병으로 사망한 여인”, “신덕왕후의 그림자에 가려진 여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김진섭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신의왕후는 ‘주체적이고 리더십을 갖춘 여성상’을 연상하게 하는 면들이 있더라고요. 이성계와 40년을 함께 살면서 집안 살림을 맡았다고 하는데, 자료를 보면 당시에 이성계 장군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에서 받은 농장들이 전국에 퍼져 있었거든요. 그걸 다 신의왕후가 관리했다고 해요. 이성계가 거느린 사병들과 그 가족들도 있었을 텐데, 지금으로 따지면 웬만한 중소기업 이상의 대규모 조직을 관리한 거죠. 위화도회군 때는 신의왕후가 포천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다가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도망을 가기도 했어요. 그런 많은 일들을 주관했던 거죠. 상당히 카리스마도 있고, 리더십도 있고, 결단력도 있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깨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죠.”

 

저자의 말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신덕왕후(태조의 비)’, ‘원경왕후(태종의 비)’, ‘정희왕후(세조의 비)’ 세 사람의 정치력에 대해 묻는다고 한다. 조선의 왕비 가운데에서도 여장부로 손꼽히는 이들 중에서 ‘누가 더 여장부 같은지’ 궁금해 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의 입장이 다 다르기 때문에 뭐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요. 제가 자료들을 보면서 느낀 바로는 ‘신덕왕후’는 참모형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요. 이성계를 제일 가까이에서 지원한 참모였고, 권력욕이 조금 강한 스타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덕왕후의 모든 권력욕을 다 비판하는 것은 조금 무리일 수 있다고 생각돼요. 조선 건국 이후에 권력구조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고민하는 것 속에 신덕왕후가 포함될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자료들을 보면, 개국 과정에서 쟁쟁한 공신들과 정치적인 관계를 맺고 협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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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 저자는 “원경왕후는 말을 타고 들판을 달리는 여걸”, “정희왕후는 상당한 협상가”라고 보았다. 정희왕후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성종을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직접 대신들을 만나 협상하고 조율하는 등 뛰어난 협상가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

 

“원경왕후에 대한 자료는 의외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뒤에서 활동하기보다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요. 전략가이면서 나름대로 실천도 함께 하고요. 태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뺏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원경왕후는 ‘원래 우리 남편에게 왔어야 할 왕위를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권력을 탐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원경왕후를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라고 보는 건, 억울한 면이 많을 것 같아요. 태종한테 맞서면서 이야기하는 핵심은 ‘옛날 일을 어찌 잊었습니까?’라는 거거든요. 같이 거사를 해놓고 왜 권력을 다 가져가냐는 거예요. 태종은 ‘권력은 분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왕은 하나면 족하다’고 말하죠. 여기에서 문제가 벌어져요. 사람들은 태종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 원경왕후가 배신감을 느꼈다고 해석하는데, 그것보다는 권력을 자신한테 주지 않고 반감시키는 것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들도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의외로, 김진섭 저자가 ‘가장 여장부다운’ 왕비로 꼽은 인물은 ‘소헌왕후(세종의 비)’였다.

 

“우리는 소헌왕후를 현모양처의 모범이라고 알고 있지만, 여걸입니다. 전혀 준비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왕비가 됐고요.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제주도에 관노비로 갔는데도 불구하고, 평생 거기에 대해서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왕비가 자신의 불만을 이야기하면 또 다른 정치적인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거죠. 여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참고 내조한 게 아니고, 정치를 굉장히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상당히 절제력 있게 활동한 인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강연이 끝난 후, 즉석에서 독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도 고부갈등이 있었나요?


초기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조선 초기에는 유교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구하는 바’였던 것이지,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어요. 조선 중기로 넘어가도 외아들이 처가살이를 했어요. 그런 속에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고부간의 갈등도 있었고요.

 

‘조선의 왕비’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신 계기가 있나요?


정치나 사회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관점에서 탈피하면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실질적으로 역사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시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남성 중심적이었던 것이지,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많았어요. 최근에 일기문이 많이 발견돼서 관심 있게 연구하고 있는데요. 약 900여 종 발견돼서 그 중 몇 가지가 번역 중이에요. 그걸 보면, 진정한 사대부 선비들은 여성을 동료라고 생각했어요. 부인을 부인이라고 칭하지 않고 호를 지어주고 부르기도 했고요. 세종은 부인이 방을 나갈 때 같이 일어나서 배웅하고 문이 닫힐 때까지 서있었다고 해요. 이런 것이 진정한 사대부의 모습이라는 거죠. 우리는 이걸 부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건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동등한 동료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지금 준비하고 있는 책에서는 그런 관계들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려고 합니다.

 

‘정희왕후’에게 협상가적인 면모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정희왕후는 글을 몰랐다고 알고 있어요. ‘소혜왕후(성종의 어머니)’가 글도 더 많이 읽었고, 더 힘 있는 집안 출신이지 않았나요?


글을 몰랐지만 돌아가는 판세를 읽는 능력은 굉장히 뛰어났던 것 같아요. 그 상황 속에서 필요한 사람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과 협상을 벌이는 선택을 먼저 했다는 거죠. 한명회나 신숙주를 부르기도 하고요. 왕위에 오를 자격이 제일 없었던 막내 손자, 즉 성종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과정에서도 그런 협상이 이루어진 거고요. 기록에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소혜왕후의 역할이 컸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힘 있는 집안 출신이었고요. 또 행간의 의미로 보면, 소혜왕후에 대한 정희왕후의 배려가 꽤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요. 정희왕후가 글을 몰랐다고 해서 능력이 부족했던 게 아니고, 판세를 굉장히 잘 읽을 줄 알았고 필요한 사람들하고 타협하면서 문제를 해결했던 것 같습니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김진섭 저 | 지성사
조선의 왕비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정치적 영향권에 벗어나지 못했고 또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존재감을 지닌, 왕조 사회에서 엄연한 정치인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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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임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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