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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섬세해지고자 노력하는 공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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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예술가가 타인의 비극의 진실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부산물처럼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2018.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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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은 내려고 했던 시기를 한참 넘긴 책이었다. 일간지와 문예지 등에 연재했던 글을 모았지만, 다시 한번 글을 매만지면서 시간을 들였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에게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방법은 시간을 들여 그 대상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옮기는 것이다.

 

‘정확함’이 그의 도구라면, 지금의 신형철을 관통하는 주제는 ‘슬픔’이다. 타인의 슬픔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대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닿으려는 노력은 평론가로서의 삶이 고스란히 비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책 속에서 그는 문학 작품 속의 슬픔과 허무함을 꼼꼼히 읽고, 문학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회의한다. 대통력 탄핵 시기와 4대강사업, 용산참사, 천안함 사건 등 현실의 절망을 마주하면서 희망을 새긴다. 구도에 가까운 ‘정확함’을 추구하는 그의 태도는, 좋은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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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의 새로운 산문집


인터뷰를 꽤 많이 사양하셨다고 들었어요.

 

인터뷰 제안해 주시는 모든 매체에 감사한 마음이지만, 아무래도 같은 답변이 반복되는 측면이 없잖아 있어서요. 인터뷰도 일종의 콘텐츠인데, 그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반복이 좀 민망해요. 어쩌다 하나의 인터뷰 정도를 보게 되는 거지 제 인터뷰를 모두 다 찾아보시는 분은 없을 테니, 그 반복이 무슨 상관이냐고 하시는 분들도 물론 있습니다만, 그래도요. 그래서 인터넷서점 외에는 대부분 이 책에 실린 글들의 발표 지면을 제공해 준 최소한의 매체 위주로 진행했어요.


말로 하는 인터뷰는 뜻이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인터뷰 내용이 신경 쓰일 것 같아요.


신경이 쓰이죠. 이를테면 ‘있다’와 ‘없지 않다’가 다를 때가 있잖아요. 조금만 뉘앙스를 다르게 표현해도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말이 정리되는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8년 동안 쓴 글이 엮였어요.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고 믿는 편이신가요?


당연히 그렇죠. 평론적 성격의 글은 번득이는 영감에 기댈 수가 없어요. 얼마나 오래 생각하고 연구했는가가 글에 고스란히 다 드러나니까요. 이번 책에 실린 글들의 대다수는 일간지나 주간지의 칼럼 꼭지에요. 몇 달씩 구상해서 쓴 글들이 아니어서 그 깊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책을 묶을 때 최대한 보수적인 기준으로 글을 걸러 냈어요.

 

선별 과정에서 글을 많이 수정하시기도 했나요?


싣기로 한 글들은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실었죠. 글은 고치기로 마음먹으면 언제든 더 고칠 수 있어요. 더는 고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글도 시간이 지나면 또 고치고 싶은 게 보이죠. 그러니 결국은 어느 시점에서 그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출간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다른 작가님들도 신문 칼럼 등을 모아 책을 내면 욕심이 생긴다고 하시더라고요. 칼럼은 마감이 있는데 단행본은 사실 미룰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 고치고 싶은 욕심이 든다고요.


그러게요. 이번 책도 원래 약속한 출간 예정 시점보다 3년을 더 끌었는데, 출판사에서 더는 기다릴 수 없고 무조건 예약판매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어요. 덕분에 책이 나올 수 있었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웃음)


표지의 그림이 낯익은 작품이에요. 난다 출판사에서 황현산 평론가 책을 낼 때도 팀 아이텔의 그림을 많이 썼었죠? 같은 화가의 그림을 썼다는 점을 생각했었나요?


2011년에 김민정 시인의 소개로 이 화가를 알게 됐고  『느낌의 공동체』  표지에도 그의 그림을 사용했었어요. 그 후로 황현산 선생님의 두 권의 산문집도 김민정 시인이 만들면서 같은 화가의 그림을 사용했고요. 이번에는 제 담당편집자이신 류기일 선생이 여러 장의 그림을 저에게 제시했는데, 처음 보는 그림이지만 마음이 끌려서 고르고 보니 같은 화가여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김민정 시인이 평론가들의 성향이 팀 아이텔의 화풍과 맞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제 취향이랄 게 별 것 없고 또 그걸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팀 아이텔처럼 담담하되 깊은 그림에 제가 끌리는 것 같은데, 제가 그런 문장을 좋아하니 통하는 데가 있나 보다 싶어요.

 

 

정확함에 대하여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한다(38쪽)”는 표현은 작가도 작품을 만들면서 정확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어요. 하지만 작가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작품을 만들 때가 있잖아요.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메시지가 달라지기도 하고요.


문학적 커뮤니케이션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확실성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죠. 의도한 대로 쓰이지도 않을뿐더러, 쓰인 대로 읽히지도 않고요. 제가 ‘정확하다’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어떤 문장이 ‘특정한 진실을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는 느낌이에요.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이전에 누구도 그렇게 표현해 본 적이 없는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내서, 이제는 다른 사람이 그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려 할 때 다른 문장을 떠올리기 어렵게 만드는 그런 경지요. 어떤 글이 ‘정확하다’라는 느낌은 당연히 독자 편에서 생성되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런 반응을 끌어내는 힘이 창작자 쪽에 애초에 있지 않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런 반응을 끌어내는 힘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걸까요?


‘명제적 지식’을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이라면 그냥 명료하게 쓰기만 하면 되겠죠. 그러나 감정적 영역에 대한 ‘비명제적 지식’이 오가는 문학 작품의 경우라면 창작자의 삶의 경험에 대한 이해가 관건이 될 테고요. 경험 중에서도 특히 비극적 경험의 경우에는, 창작자가 그 경험에 대해 깊이 알고 있고 그것을 정확하게 언어화하면 그 문장을 읽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발견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매우 지난한 작업이잖아요. 영원히 가닿을 수 없을 것 같지만 계속해서 생각한다는 게, 스스로 지친 적은 없나요?


그게 직업이니까요. 생각하고 또 표현하는 게 직업이니까, 계속해야죠. 그런데 스스로 만족이 안 되는 순간을 ‘지친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 상태는 주기적으로 와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걸 응용해 본다면 ‘라이터스 로우(writer's low)’라고 할까, 글쟁이의 우울함이 있는 것 같아요. 나보다 잘 쓰는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아, 굳이 나까지 쓸 필요 있을까, 그런 생각이 진지하게 밀려오면서 의욕이 떨어지는 상태요.


‘어떤 문장이 어떤 생각을 딱 잡아챌 때’를 정확함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감정과 생각을 한 문장으로 잡아냈을 때의 쾌감이 있을 것 같아요.


예술 분야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은 늘 자기가 다루는 매체를 사랑하고 또 미워하죠.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언어라는 매체에 대한 애증이 있을 거예요. 뭔가 정확한 문장을 쓰는 데 성공했다고 느껴질 때 드는 생각은 이를테면, 언어가 나를 도와주는구나, 적어도 지금은 이 매체가 내 편이구나, 그런 느낌이죠.


개인적으로 아포리즘이나 잠언을 이해하기를 ‘~이다’ 문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생각을 단정하는 태도가 아포리즘을 만드는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번 책의 글은 ‘~일 것이다’ ‘~리라’는 단정적이지 않은 문장으로 끝나는 데도 아포리즘의 명징함이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정확함을 추구했기 때문에 오는 확신이었을까요?


십수 년 전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아주 단호하게 썼어요. 뭘 잘 몰라서 용감했던 때였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부터 단정적인 문장을 쓰는 것에 대해 자기 검열이 생겼어요. 이력이 쌓이면서 과거의 글을 돌아보게 되고 그 일면성을 절감하면서 후회하게 되는 일들이 자꾸 반복되니까 자연스레 생기는 현상이죠. 그러나 지금 쓰고 있는 글에 관점이 없을 수는 없으니 그것을 표현하되, 이 관점이 이것과는 다른 관점들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쓰려고 노력해요. 어떤 문장을 그 경계 지점에 세우는 게 쉽지는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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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폭력


냉소를 ‘세련되게 포기하는 것’으로, 폭력을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태도’라고 했어요. 섬세해지기 힘든 시대, 섬세함과 교환할 시간이 없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냉소하고 싶다는 마음을 누르고 알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섬세해질 시간도 여유도 없는 시대 아니냐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과연 그렇기도 하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섬세해지려고 노력하죠. 그건 아마 그들이 타인의 섬세하지 않음에 상처를 받아본 적이 있거나, 반대로 나의 섬세하지 않음에 누군가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적이 있어서일 거예요. 그 경험 때문에 냉소와 폭력에 손쉽게 기대고 싶다가도 자신을 통제하려 애쓰겠죠. 모든 공부가 자기 삶의 필요 속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처럼, 섬세해지기 위한 노력도 내 삶이 나에게 명령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을 거예요. 저도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데, 다가올 제 시간들 속에는 저를 섬세함 쪽으로 더 가혹하게 몰아세울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시인의 책무를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248쪽)이라고 표현했어요. 시인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의 영향 때문인지, 모두가 점점 더 빨리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들 때가 있어요.


인용하신 제 문장은, 우리가 어떤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할 때 예술가들이 선두에 나서서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려 하기보다는 진실의 복잡성을 견뎌내는 일을 먼저 해야 하고, 또 모두가 잊지 않도록 자꾸만 그 기억을 환기하려는 노력 등을 해야 한다는 것 등의 취지를 담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느려질 수밖에 없고 또 느려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이는 예술가의 책무가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이 모든 사람의 책무가 될 수는 없겠죠. 예컨대 국가적 참사가 있을 때 현장으로 달려가서 트라우마적 고통에 시달리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는 정신의학 분야 의료진들이나 심리상담 전문가 분들의 역할은 당연히 시인과 다를 수밖에 없을 테고요. 그분들은 누구보다 빨라야 하겠죠. 그런데 정혜신 선생님 책을 읽어보면 그런 현장에서도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니, 빠른 대처가 빠른 성과를 내고 싶다는 마음에 촉발되는 것이라면 그 역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술에서 ‘비극을 아름답게 그려도 되는가’의 딜레마는 현상을 예술의 수단으로만 여길 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누구든 어느 정도는 타인을 어떤 목적의 수단으로 삼잖아요. ‘어떤 이를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했을 때, 그 경계는 어디까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타인의 비극을 예술의 소재로 삼을 때는 ‘불행의 단독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어떤 불행이 세상의 많은 슬픔들 중 하나로 일반화되지 않도록, 유일무이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일이라고요. 제가 방금 ‘만들어준다’는 표현을 썼지만 아마 대다수의 불행은 본래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를 거예요. 깊이 들어가서 보기만 한다면요. 그러니까 문제는 얼마나 깊이 들어가서 그 단독적인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는 예술가의 태도와 노력이 중요하겠고, 그로부터 작품의 성취가 결판나겠죠.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예술가가 타인의 비극의 진실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부산물처럼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움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바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겠죠. 물론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예술비평의 오랜 난제 중 하나예요.

 

 

평론가의 일


이제까지 낸 평론집과 산문집에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제가 작가들에게 단편과 장편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자주 물어보는데,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작가들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궁금해서예요. 제가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은데(웃음), 이렇게 답해보면 어떨까요. 짧은 산문은 어떤 ‘자리’로 데려가는 것이고 긴 평론은 ‘건물’로 입장시키는 거라고요. ‘자리’에 가서 서면 하나의 관점을 얻을 수 있죠. 여기서 그걸 보니 이렇게도 보이는구나, 하고요. 그 이상은 어렵다는 뜻이에요. 논증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건물’로 들어가면 그 안에 입장과 논증과 사례와 반론에 대한 대비와 기타 등등이 다 있죠. 업무실과 휴게실과 기타 등등이 다 갖춰져 있다고 할까요.   


평론이 일이라면 문학을 독자의 눈으로 보기보다 평론가의 눈으로 읽어야 할 때가 있잖아요. 문학을 단순히 즐기지 못하는 상황이 올 테고요.


그래서 언제나 일독(一讀)의 시간 동안에는 분석적 태도를 최대한 내려놓고 읽으려고 해요. 이를테면 필기도구나 포스트잇을 옆에 두지 않고요. 영화를 볼 때도 첫 관람 때는 그냥 눈앞에 펼쳐지는 것에만 집중해요. 두 번째 볼 때부터는 메모를 하죠. 그래서 언제나 어떤 작품을 처음 읽고 보기 시작할 때가 행복해요.


문단을 순문학과 장르문학으로 나누려는 태도는 많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순수문학이나 문단 문학이 존재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순수문학’이라는 말은 아마 미술 쪽에서 비산업적/비실용적 미술을 ‘fine art’라 부르고 이를 ‘순수미술’로 번역한 데서 적잖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해요. 미술에서는 그 개념이 애초 목적 자체가 다른 두 개의 분야를 분별하기 위해 중립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어서 별문제가 없는지 모르겠지만, 문학은 그런 식으로 이분되기 어렵기 때문에 그 말이 그냥 ‘더 고급한 문학’을 뜻하는 배타적인 말이 되어버리고 말았죠. 그래서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말이니까 안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순수문학’이 ‘장르문학’의 반대말은 더더욱 될 수 없고요. 저는 ‘장르문학’의 실체는 분명히 있으니까 이 말 자체는 써도 되지만 이 말의 반대말은 ‘비장르문학’ 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냥 저는 문학이라는 예술의 인식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 인식의 대상 중에서 특히 인간의 내면을 다룰 때 문학은 다른 장르와 첨예하게 달라지면서 가장 훌륭한 높이/깊이에 도달한다고 믿고요. 제가 선호하는 이런 문학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여하튼 ‘순수문학’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분명해요.


교수로 일하면서 동시에 평론을 하기에는 작품을 읽고 보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할 텐데요. 작품을 읽고 보는 시간은 언제, 어떻게 확보하는 편인가요?


요즘은 읽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거의 절망적이에요. 활자 중독이니까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나 차 안에서나 어디서든 책을 내려놓지는 않는데, 대체로 그런 자투리 독서밖에는 못하니 속이 탑니다. 올해는 어떻게든 버텨내고 내년부터는 제 삶의 구조를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인간은 문학보다 자신의 실패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176쪽)”고 하셨어요. 평론가는 직접 체험이 아닌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으로 배우는데, 한계를 느낄 때가 있나요?


평론가만이 아니라 모두의 문제 아닐까요. 누구나 자기 삶으로부터 배우고, 책을 통해 복습과 예습을 하는 거잖아요. 책은 언제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이럴 때 떠오르는 말이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본 구절인데 ‘그래봤자 야구, 그래도 야구’라는 문구에요. 우리 모두에게 책은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이 아닐까요? 물론 저는 책의 힘을 다른 분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 속하기는 하겠지만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저 | 한겨레출판
‘타인의 슬픔’은 결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부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를 풀어놓는다. 평론가로서 작품과 세상 사이에 가교를 놓고자 했던 저자의 성실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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