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지 “글 없는 그림책, 정답도 없지요”

신작 『선』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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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든 독자이든,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그림책 무대’에 주인공으로 서 볼 수 있다. (2017.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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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보스턴 글로브 혼 북' 명예상 수상,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우수 그림책'을 2회나 수상한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 이수지는 작가가 의도한 한 가지 방향대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 그림책 작가가 아니다. 흔히들 우리는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읽어 준다’고 말하지만, 이수지 작가의 대표작들은 글이 없는 그림책이 다수다. ‘그림책은 읽어 주는 것’이라는 등식을 과감히 깨버리고 그림책을 매개체로 독자와 인터랙티브한 스토리텔링을 이어 나가는 작가 이수지. 그래서일까. 그녀의 그림책은 평면임에도 입체적으로 보이고, 독자는 마치 멋진 무대 공연을 보거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빨려 들어가며 환상으로 이끌린다. 이번 신작 『선』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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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선수의 은퇴 공연 아이스쇼를 본 적이 있는데, 작가님의 신작 『선』을 보고 나서 그날의 기분을 그대로 느꼈습니다. 저는 그 때, 관객석에 앉아서 제가 마치 김연아 선수가 된 것 같은 환상에 휩싸였는데, 이번 그림책을 보고서는 독자인 제가 주인공인 스케이터 소녀가 된 것 같은 기분과 한 편의 아이스쇼를 보고 있는 관객의 기분, 두 가지를 모두 느꼈습니다. 평면의 그림책을 보고 있는데 제가 이런 느낌이 든 것은 ‘현실과 환상’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어떤 영감을 통해 이런 그림책을 만드셨는지 궁금합니다.

 

몸과 관련된 것이라 그런가 봐요. 저도 몇 년 전, 저희 애들 스케이트 타는 데 따라갔다가 오랜만에 얼음 위에 올라갔었죠. 처음에는 기우뚱했지만, 금방 예전의 감각을 회복하는 걸 느끼며 스스로 놀랐었어요. 몸이 기억하는구나. 이 모든 것을… 그 순간, 어렸을 적 집 앞의 논 스케이트장에서 친구들과 지칠 때까지 놀던 기억으로 휘익 돌아갔어요.

 

차가운 얼음 위 따뜻한 겨울 햇볕, 그리고 내가 그리는 선의 궤적, 즐거운 놀이의 기억이 『선』의 동력이 되었어요. 스케이트라는 물건은 참 신기하죠. 그토록 얇은 금속 조각 하나에 의지해서 아름다운 춤을 만들어내어요. 마치 하얀 도화지에 그은 연필 선처럼 빨간 모자 소녀의 스케이트도 얼음 위에 흔적을 남겨요. 『선』에서는 언뜻 보면 연관 없는 두 세계가 함께 굴러가지요.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모른 척 평행으로 달리다가 어느 순간 서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해요. 그림책은 그런 두 세계를 담아내기 좋은 매체이지요.

 

아이의 아름다운 선을 그려내기 위해 실제로 김연아 선수의 경기 장면을 많이 돌려보았어요. 김연아 선수의 손끝 발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을 보며 매료되었었지요.


작가님의 그림책에서는 특유의 유머 코드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도야 놀자』에서 ‘5인조 갈매기’의 등장이 그러했고, 파도를 놀리다가 파도에 흠뻑 젖어버린 여자 아이가 그러했죠. 『그림자놀이』 속에는 겁을 주다가 되레 자신이 울어버린 늑대가 등장했습니다. 이번 신작 『선』에서 혹시 숨겨 놓으신 유머 코드가 있다면 힌트나 비하인드 에피소드 하나만 들려주세요.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눈덩이 던지는 아이들을 찾아보세요. 책이 접히는 가운데 부분, 양쪽에 걸쳐 눈싸움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자주색 조끼 아이가 분홍 조끼 아이에게 던진 눈덩이가 똑바로오오오…날아갑니다. 다음 장을 넘기면, 얼음 위 기차놀이 장면의 맨 윗 부분에서 분홍 조끼 아이가 자주 조끼에게 복수~~!! 그런가하면, 다시 그 전 장으로 돌아가서, 왼쪽 아래 눈 쌓인 곳, 분홍 모자에 연두 윗옷의 아이가 노랑 스웨터 얼굴에 눈 폭탄! 그렇다면 다음 장에서 과연 노랑 스웨터는 복수할 것인가~~~ 두둥! (흑.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요….)

 

친구들이 하나둘 미끄러져 들어오면서 개 한 마리도 덩달아 들어와요. 제일 신났지요. 두 번째 출연이랍니다. 첫번째 출연은 “이렇게 멋진 날”이었죠. 지금 우리 집 마당 한 켠을 차지 하고 있는 개, “강”이랍니다. 아이들 이름은 산과 바다, 개는 강, 윗집 개는 천둥과 번개, 저희 부모님 댁 개는 하늘, 고양이 이름은 구름….

 


[본문2] 선(웹용).jpg

 

『선』을 비롯하여 선생님의 그림책은 글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덕분에 독자들은 해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반면, 엄마들은 이 것을 어떻게 아이에게 읽어 줘야 하지? 고민을 하십니다. 글 없는 그림책, 독자들이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요?

 

읽어 주려 하지 마세요. 그냥 아이와 함께 눈이 가는 대로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글 없는 그림책은 외국에서는 “silent book”이라고도 하던데, 사실은 매우 시끄러운 책이에요. 아이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느라 바쁘거든요. 아이와의 대화로 가득 차게 해 주세요.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지요. 책 한 권으로 2분 동안 읽을 수도 있고 20분 동안 읽을 수도 있어요. 20초밖에 안 걸렸다고요? 그것도 좋아요. 아이는 궁금해져서 다시 책으로 돌아올 거에요. 글 없는 그림책은 글이 콕 집어주지 않기 때문에 열려 있고, 정답이란 것도 없어요. 그림책을 펼칠 때마다 새롭게 시작될 이야기를 기대해요. 매번 다른 이야기가 발견될 것이고, 매번 다른 그림이 보일 거예요.


『이수지의 그림책』에서 “한 권의 그림책은 그다음 그림책의 씨앗을 품고 있다. 한 작가의 각각의 그림책들은 독립적이지만 보다 큰 그림을 구성하는 일부이기도 하다. 이 세 권(경계 3부작 그림책)의 그림책들도 서로 거니 받거니 마주이야기하며 한 타래로 엮여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번 신작 『선』도 이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출간된 책일지 궁금합니다.

 

모든 것들은 이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다 지나고 깨닫는 일들이지만요. 『선』은 어쩌면 『나의 명원화실』에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미술 시간, 교실 뒷벽에 그림이 뽑혀 걸린다고 우쭐해하는 한 아이가, 동네의 괴짜 ‘진짜’ 화가를 만나면서 예술이란 세계의 한 편린을 엿보는 이야기이죠. 어떤 작은 계기들에 의해 세상을 보는 눈은 달라지고, 아이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성장해갑니다. 『나의 명원화실』『선』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이란 저의 관심에 맞닿아 있지요.

 

그런가 하면, 『동물원』, 『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등의 책에서 다루었던 서로 다른 두 세계 ?현실과 환상, 혹은 책과 이야기, 양립할 수 없는 서로 다른 것들, 눈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보였다 사라지는 이야기, 안과 밖, 포지티브와 네거티브…등등에 대한 관심 또한 『선』에서 이어지고 있네요. 『이렇게 멋진 날』에서 큰 나무에서 뛰어내려 우산 타고 하늘을 날아 집에 돌아가는 아이들과도 맞닿아 있겠지요? 마법과 마법 아닌 일이 마구 뒤섞여있는 아이들의 세계, 그리고 그걸 알아보고 좋아하는 어른들의 세계.


이번 신작 『선』에는 모든 어린 예술가에게 선물하는 그림책이라는 부제가 붙었습니다. 이전부터 정말로 궁금했는데 선생님께서도 슬럼프가 있으신지요? 있으시다면 극복 방법도 알려주세요.

 

슬럼프는 없어요. (이런 이야기 하면 큰 일나려나요? ^^)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엄마 노릇에 할 일 다 하면서(절대 다 못 하지만), 게다가 온 마음을 담아 작업도 하려면, 시간은 늘 부족하기만 하니, 슬럼프가 있을 겨를이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슬럼프라기보다, 작업의 과정에서 주기적으로 닥치는 괴로운 순간들은 언제나 있지요. 그림이 왜이리 안 나온담 하며 『선』의 한 장면 처럼 확! 구겨버리는 순간도 있고, 끝없는 결정 장애로 책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게 되는 책 안의 몇 장면들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지요. 극복 방법이요? 그냥, 『선』의 아이들처럼, 결국 어떻게든 어느 순간 풀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신나게 노는 수밖에요!

 

[표지] 선.jpg

 

그렇다면, 그림책을 만들면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그림책을 만드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가장 설레는 순간은, 이제 막 아이디어들이 떠오를 때,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생각들이 도르르르 굴러와 하나씩 실에 착착 꿰어지는 걸 볼 때입니다. 물론 다시 구체적으로 생각을 정리해서 막상 작업하기 시작할 때는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만. 구름처럼 잡힐 듯 말 듯 했던 이미지와 생각들이 생생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이야기가 될 것 같다’라는 실감을 줄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 비견할 만한 또 하나의 설레는 순간은….이렇게 지난하고 흥미진진한 과정을 거쳐 나온 따끈따끈한 그림책이 독자 여러분의 손에 들어가고, 독자의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할 때… (지금이죠) 두근두근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그림책에는 주인공이 여자 아이인 경우가 많은데요. 주인공이 남자 아이나 어른이 등장하는 그림책도 출간할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 아들에게 미안해서 해야 되기는 하는데… 자꾸 제 안의 어린 여자아이만 튀어나오네요. 어른! 신선한 제안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이가 더 좋아요. (웃음)

 


 

 

이수지 저 | 비룡소
현실과 상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의 그림에 빠져들다 보면, 한 장면에서도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여러 층의 의미를 담아내는 ‘그림책’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매력을 담뿍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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