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현주 “자신의 선호를 이해하는 게 더 우선”

롤링다이스 팟캐스트에서 시작한 『일상기술연구소』 ‘내일은 막막하고 마음은 불안한 시대’의 일상을 연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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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생각해볼 여지를 주지 않는 사회인 것 같아요. 자기 기준이 있지 않으면 당연히 보편이나 평균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 불안이 생겨요.

돈을 벌고 있자니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하고, 아무렇게나 살자니 또한 인생에서 아무것도 못 이룬 것 같아 좌절한다. 불안이 추동하는 사회에서 지식나눔 협동조합 ‘롤링다이스’는 일상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는 팟캐스트 <일상기술연구소>를 시작했다. 미래는 멀리 볼수록 불안하고, 그럴수록 일상을 챙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일상기술연구소>가 필요했던 까닭은 누구도 실제로 ‘좋은 일상’을 꾸리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버는 돈은 빤한데 돈 관리는 어떻게 하지?’ ‘하루를 활기차게 보내는 데 필요한 체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나?’ 같은 뻔하지만 답하기 힘든 질문을 듣고 있자면 일상을 챙기는 일도 만만치 않다.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작심삼일에서 벗어나는 ‘배움의 기술’, 직장 밖에서 내 몫의 경제생활을 꾸리는 ‘독립의 기술’ 등이 나왔다. 『일상기술연구소』는 그 연구를 종합한 출판 결과물이다.


롤링다이스 이사장이었던 제현주는 일상기술연구소의 ‘책임연구원’이다. 줄여서 ‘제책임’.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를 썼고 『경제학의 배신』,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등을 번역했다. 그 전에는 카이스트에서 디자인 경영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경영 컨설팅 업체, 투자은행, 사모펀드 운용사에서 기업 경제 및 투자 분야 전문가로 10년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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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자 섭외가 쉽지는 않아요


일상기술연구소를 처음 생각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인생’을 생각했는데, 인생은 다 살아봐야지만 알 것 같고 너무 큰 주제라는 부담이 있어서 일상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출발했어요. 그냥 노력한다거나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말보다는, 오늘을 잘 살고 만족감을 느끼는 삶을 위해 정말 작고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싶었어요. 또 학교로 이름 붙일까도 생각해봤지만, 학교는 들어온 사람이라면 배워야 하는 의무가 있잖아요. 하지만 연구소는 그냥 이런 기술이 있다는 걸 알자는 거죠. 모두가 다 그 기술을 익혀야 할 필요도 없고, 익히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기술이 있다는 걸 아는 건 꼭 내 기술이 되지 않더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흔히 기술을 생각하면 전문적인 지식이나 능력 등을 떠올리잖아요. 일상기술이라고 하면 독자들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기술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기보다 구체적이고 작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기술이라고 말을 붙였어요. 실제로 방송에서 기술자라고 칭하는 게스트 분들에게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뭘 하고 사는지 알려달라고 하고는 그걸 기술이라고 해요. 그럼 그분들은 ‘그게 기술이 되냐’고 하시죠. 하지만 그 사람이 일상을 잘 살아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순간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익힐 수 있는 게 되는 것 같아요.


금정연 평론가가 고문연구원, 즉 ‘금고문’으로 방송을 같이 진행했습니다.


금정연 작가님은 기술을 소개하면 ‘참 어려운 기술이네요’ 라고 말해줄 것 같아서 섭외했어요. (웃음) 방송은 저와 금고문 님, 조수석 님 셋이서 진행하는데 셋이 다 달라요. 금고문 님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단하다고 감탄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조수석 님은 쉽게 뭐든지 해보는 사람이라서 방송을 듣는 분들이 둘 중에 한 분에게는 이입하게 될 것 같았어요. 저는 정리하고 포장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다들 기술이 되냐고 하면 저는 무조건 기술이 된다고 뻔뻔하게 우기는 거죠.

 
구체적인 기술이라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무엇이 구체적인지는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요.


‘구체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말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거였어요. 예를 들어 ‘일벌이기 기술’에서 일벌이기는 어떻게 보면 모호한 말이에요. 사업을 하는 사람과 프리랜서, 서점 주인의 일벌이기는 서로 다른 의미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초반에는 기술자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맥락을 구체적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두 번째는 명시적으로 어떤 걸 하면 일상에 좋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생활체육의 기술’에서 밥 한 숟갈을 덜어내라는 식으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 방법이 구체성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내일이라도 당장 해볼 수 있다는 느낌으로요.


기술자 섭외도 꽤 어려웠을 것 같아요. 일상의 숨은 고수를 찾아야 하니까요.


처음에는 뭔가 재밌는 분, 일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분을 찾고 그분을 조사해서 어떤 기술을 이야기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방식으로 접근했어요. 초반에는 궁금했던 분이 많아서 금세 섭외했는데 요새는 더욱 구체적으로 들어가는 일상기술이 주제기 때문에 쉽지는 않아요. 아예 크고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해주실 선생님, 유명한 저자들은 많이 있지만, 일상적인 소소한 기술을 한 시간 동안 설명해주실 분을 찾는 게 어렵더라고요. 최근에는 청취자가 빨리 청소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해달라고 요청하셨는데, 그런 분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워서 항상 주변에 물어보고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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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선호를 이해하는 게 가장 우선이에요


구체적으로 기술을 질문해 볼게요. 처음 나온 기술이 ‘돈 관리 기술’이에요. ‘어디에 써야 옳은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사람들이 노후를 걱정하면서 저축을 하는데, 저축도 어떻게 보면 강박적인 소비라는 생각이 들고요.


기술자로 나온 박미정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 같아요. 저축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구체적으로 생각할수록 확률 싸움이잖아요. 앞으로 노후에 아플 것인지, 질병에 걸릴 것인지,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도 다르고,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액수가 커지고 불안해지면서 현재의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하는 게 모든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도 환상 같은 거예요.


아무래도 돈 문제가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미래는 막막하고 마음은 불안한 시대’에서 미래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돈을 생각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가장 감동했던 독자의 소감이 있었는데, 본인이 『일상기술연구소』를 읽기 전에는 이러다가 가난하게 죽겠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는데, 요새는 ‘돈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네’ 이 정도로만 생각하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되게 좋았어요. ‘미래는 막막하고 마음은 불안한 시대’라고 오프닝 멘트를 붙일 때 바랬던 상황이었거든요. 미래에 가난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수입은 자기가 생각한 보편적인 삶의 패턴 안에서 상상하게 되잖아요. 하지만 실제 최소한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거죠.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일상을 구상한 사람들을 보면서 절대적이고 표준적인 라이프 스타일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보다 보면 지금은 당장 저렇게 못 산다고 생각해도, 어떤 상황에 도달해서 그 방법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표준에서 벗어나 보이는 사람이 금욕적이거나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요. 사실 대부분의 기술자가 신나 보이는데, 그런 사례가 주는 안정감이 있어요.


‘손으로 만드는 기술’도 소개해 주셨어요. 실제로 알려준 기술을 시도해보나요?


아랑 님이 말해준 ‘손으로 하는 기술’의 핵심은 일상 속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의 중요성이었어요. 손으로 만드는 순간이 주는 해방감, 나 스스로 완전한 세계 안에 있다는 느낌이 있는 거죠. 그러면 행복을 느끼기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고, 그 순간에 몰입해 있는 시간이 일상 속에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족적인 삶이 된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요새는 대관령 집에서 나무에 물을 열심히 줘요. 손으로 만드는 기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수준에서는 그 정도로 시도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멍하니 물을 주면서 흙에 물이 스며들어가는 걸 보고 어제보다 변한 게 있는지 관찰해요. 그런 것들이 충족감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정리의 기술’을 소개하신 정철 선생님은 사전을 만들기도 하셨죠. 읽어보면 일반적인 정리기술보다는 강박적 축적을 겪는 사람의 생활 방법 같던데요.


제 생각에도 정리 방법 같진 않아요. (웃음) 축적에 방점이 찍힌 느낌이었죠. 오히려 자기 선호를 찾는 기술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깔끔한 정리보다는 본인이 찾을 수만 있다면 된다고 하시는데, 결국 자기가 무엇을 기준으로 찾는지 생각하는 방식이나 판단 기준을 파악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정리의 기본 개념을 확 바꿔준 느낌이었어요. 정리라고 하면 대개 깔끔하게 치우고 일목요연하게 보이는 상태를 생각하지만, 기술자의 정리는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이 내가 찾을 수 있게끔 구성하는 작업인 거죠. 그래서 이 정리 기술이 오히려 현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었어요. 


‘자신의 선호를 이해하는 기술’이 모든 기술의 핵심이라고 정리해주셨어요. 


 (기술자들이) 대부분 자기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분들은 대부분 왜 이 일을 하시냐고 물어보면 ‘해 보니까 좋더라’라고 대답해요. 나를 관찰해봤더니 나는 이런 일을 하면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는 거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람들이 미래를 생각하면서 평균적이라거나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라이프스타일은 사회 보편의 방식이에요. 그건 내 선호와는 상관없는 거죠.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생각해볼 여지를 주지 않는 사회인 것 같아요. 자기 기준이 있지 않으면 당연히 보편이나 평균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 불안이 생겨요.


‘작고 가볍게 시작하는 기술’도 핵심 기술 중 하나였죠.


나 자신에 관한 데이터를 만들려면 뭔가 계속 시작해봐야 하잖아요. 마음 명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게 아니라, ‘이걸 해봤더니 좋았어’ 하면서 데이터를 쌓는 거죠. 나를 알기 위한 시도로 생각하면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 성공이나 실패가 있는 건 아닌 거예요. 데이터를 얻기 위한 시도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 다음 선택에 도움이 되고요. 지금 상황이 불만족스러울 때 거대하고 급진적인 전환을 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도 아니고 추천할 만한 일도 아닌 것 같아요. 거대한 전환을 한 것 같아 보이는 분들도 사실 중간과정에서 계속 시도를 했던 건데 바깥에서 보기에는 이전과 이후만 보게 되니까요. ‘함께 살기의 기술’에서도 처음에는 청소는 누가 할까, 힘들지 않을까, 질문이 끊이지 않았는데 석 달 정도는 그냥 같이 살아보면 되고, 살다 보니 좋아서 계속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시도해 보지도 않고 머릿속에 성을 쌓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롤링다이스는 ‘지식나눔 협동조합’이잖아요. 다른 분들도 롤링다이스에서는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다들 일하다 보면 싸우지 않냐고, 효율적으로 일이 되냐고 물어보세요. 저희도 처음부터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시작한 게 아니라 조그맣게 시작하다 보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끌고 왔거든요. 해 보니까 하게 되었다는 게 대부분의 시도에서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게 바로 기술자의 힘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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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노동 시간은 막다른 골목의 끝


내용이 젊은 세대, 비정규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의도한 청취자층이 있었나요?


기획한 사람들의 정서나 생각을 발신하면 비슷한 계층과 또래가 공명할 거라는 예상은 했어요. 방송의 기술자들이 대부분 일반적인 직장에 속해있지 않았던 이유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상에 관해 새로운 관점으로 돌아보는 기회가 직장 밖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더 많이 주어져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직장에 다니면 일상의 대부분이 정해지잖아요. 그러고 나면 일상 안에서 다른 시도를 하는 게 어려워요. 기술이 생기기 쉽지 않은 거죠. 기술이 있다고 한들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섭외하기도 쉽지 않고요. 의도치 않게 퇴사권유 방송처럼 됐네요.

 


팟캐스트에는 소개됐지만 책에 안 들어간 기술이 있어요.


책에는 ‘함께 살기의 기술’만 들어갔는데, 방송에서는 ‘혼자 살기의 기술’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재밌는 건 혼자 살기와 함께 살기에서 모두 일상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결국 독립된 개인으로 잘 사는 사람이 혼자 살든 같이 살든 잘산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어요.


‘함께 살기의 기술’ 중에 듣고 말할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직장을 다니는 분들이 일상의 기술을 찾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시간이 없다는 건데요.


노동시간이 길다는 건 언제나 총체적으로 갖게 되는 고민이에요. 항상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노동시간에 부딪치면 막다른 골목 같은 느낌이 들어요. 개인이 돌파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는데, 그 안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시간의 블록을 만들어내고 우선순위를 만들어서 다른 가능성을 찾을 시간을 만드는 게 유일한 시도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다는 건 큰 장애물이에요. 노동시간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지가 제일 큰 화두입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노동시간은 사회적인 차원의 해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상사가 늦게 퇴근한다고 꼭 같이 있으란 법은 없어요. 어떨 때는 꼭 그러라고 하지 않는데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일도 많잖아요. 하지만 모든 사람의 경우는 개별적이기 때문에 일반화해서 이렇게 하라는 말은 경솔한 말이죠. 말씀하신 그대로 사회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직장을 그만두는 것 같아요. 회사에 다니더라도 일상의 틈새를 만들어서 다른 걸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일 말고 도저히 다른 걸 할 시간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은 거죠. 회사에서도 안식 휴가를 주고 계속 놀게 해줘야 다시 회사에 다닐 힘이 생기고, 사람들도 안 그만둘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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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개별적이다


일상기술자들이 애쓰지 않는 느낌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작가님에게 그런 느낌을 받아요.


애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맞는 걸 거예요. 원래 되게 애쓰는 사람이거든요.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좋으니까 그런 사람들하고 자꾸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점 젖어 들면서 더 애쓰지 않게 되어가는 것 같아요.


예전에 일했던 직장에서도 내일이 불안했었나요?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좋아서 할 수 있을 만큼 평생 하겠다는 사람은 극소수잖아요. 오히려 그때가 더 불안했던 것 같아요. 금융업계 술자리에서는 늘 얼마 모으면 그만둘 거냐는 게 대화 주제였어요. 되게 서글픈 이야기죠. 저도 회사 생활을 나름 좋아했지만, 평생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지 물어보면 아니었어요. 다음에는 뭐가 올까, 나는 뭘 할 수 있는 사람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컨설팅 업계에서는 큰 그림을 보지만, 회사를 나와서는 시각 자체가 미시적으로 달라졌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마지막 직장까지는 커리어 플랜이 있었어요.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난 뒤에는 계획을 세우는 게 되게 막막하더라고요. 어떤 면에서는 직장 자체도 좋아해서 그 뒤에 뭘 해야겠다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회사 다니는 동안 딴짓을 엄청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재밌어진 거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면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생기겠다는 자신감은 있었어요. 사실 내일부터 다시 회사에 출근하게 됐는데, 지금은 다시 지난 몇 년 동안 했던 일을 큰 덩어리로 보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기존 이력이 책을 내면서 계속 따라다니는데,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부담스럽다기보다, 전형적인 방식으로 조명될 수 있다는 걱정은 들어요. 금융업에서 돈 잘 벌다가 갑자기 엄청난 회의를 느껴서 직장을 그만둔다는 이야기는 되게 게으른 각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큰 전환은 맞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냐고 물으면 그런 건 없었어요. 기존에 했던 일들이 저한테는 또 중요한 맥락이에요. 그 덕을 크게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첫 번역 일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력 때문이고 여전히 회사 이름이 많은 혜택을 준다는 걸 늘 인식해요. 그래서 제 경우도 많은 사례 중에 하나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맥락이 중요한 게, 모든 사람은 개별적이기 때문에 일반화된 양식으로 이야기하면 잘못된 메시지가 될까 봐서요.


계속 번역과 출판을 하면서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는 것 같아요. 일이나 경제, 저성장 등을 주로 다루시는데요.


일단 ‘일’이 중요한 키워드예요. 양가감정이 있는데, 저는 일하는 걸 되게 좋아하고 뭐든지 다 일로 만드는 사람이거든요.


…굉장히 개별화된 사례네요. (웃음)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제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남편이 출근하면서 ‘오늘 잘 놀아’ 하면서 집을 나서는 거예요. 언젠가 발끈해서 ‘나 일 되게 많아’ 그랬더니 남편이 하기 싫은 일 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그건 또 아니고… (웃음) 과연 일이라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을 늘 가졌어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 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노동이라고 말하는 방식의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고 싶은 건 또 아니거든요.


또 하나의 키워드로는 ‘유능감’이 있어요. 유능하다는 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것 같아요. 누가 나를 평가해서 인정받을 때가 아니라 나 스스로 유능함을 느낄 때요. 유능함은 꼭 외부적인 준거나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제일 먼저 느끼는 감각이거든요. 어제 할 수 없었던 걸 오늘 할 수 있게 되는 일은 절대적으로 기분 좋은 일이에요. 팟캐스트를 할 때도 처음에는 엄청 떨고 버벅거리다 어느 순간 평온해졌을 때 느껴지는 감각, 이전보다 불편하고 겁나는 환경이 적어지는 것도 유능함이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롤링다이스에서 진행했던 <여성의 일, 새로고침>도 인상 깊었어요.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일하는데 중요할 것 같아요.


회사 다닐 때에는 제가 여자라는 것을 많이 생각하면서 살지 않았어요. 항상 남자들이 많은 환경에서 일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했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 게 편하고, 처음부터 외국계 회사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본능적으로 한국계 회사에서 어떤 차별적인 상황이 있으리라는 걸 알았던 거죠. 작년에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이 일어나고 차별적 상황을 피해올 수 있었다고 해서 차별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이 나이쯤 됐으면 책임 회피라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지금도 말을 하거나 행동할 때 인식한 수준 안에서 내가 여성이라는 요소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일해요. 주변에 예전보다 훨씬 많은 여성이 있기 때문에 지지와 공감을 얻기도 했고요.


세대나 나이듦도 키워드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주제의식까지는 아니지만, 이제는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됐다는 생각은 하죠.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남 탓을 하기는 어렵게 됐어요.


최근 여든의 여성 노동경제학자가 쓴 회고록 『Sharing the work』를 번역하셨다고요.


그 책을 번역하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으로서의 각성과 연결되어 있어요. <여성의 일, 새로고침> 행사에 첫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가 왔는데, 회사에 다닐 때는 한번도 나눠보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공감을 나누게 되면서 나중에 그 책을 저에게 보내줬거든요. 저자도 처음부터 페미니스트였다든가 남녀는 평등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분이 아니었는데, 계속 살다 보니 차별에 부딪히면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의식을 자기 연구에 접목시킨 거죠. 저 역시 그 과정 안에 있는 사람이고, 여든이 되어 돌아본 삶에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요.


요새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그때그때마다 달라요. 대관령에서 살면서 오전에 일어나 일을 하다가 서너시쯤 점심 해 먹고 놀다 여덟시쯤 책을 읽고 자는 생활이었는데, 이제 다른 일정이 생기겠죠. 꾸준히 번역을 틈틈이 하면서 책도 쓰려고요. <일상기술연구소> 팟캐스트도 계속 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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