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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특집] 세종대왕은 ‘뷁’을 어떻게 생각할까

‘어린 백성’에 대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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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은 ‘글자’의 날이지 ‘말’의 날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말을 적기 위한 우리의 글자가 만들어진 날이니 말과 글을 같이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해마다 한글날 즈음이면 뭔가 번지수가 틀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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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imagetoday

 

‘빚’과 ‘유산’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본래는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었는데 ‘내 것’으로 되었으니 둘의 태생은 같다. 그러나 ‘빚’은 여전히 ‘남의 것’이지만 ‘유산’은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된다는 점에서 둘은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글 ‘한글’은 빚인가, 유산인가? 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늘 부채 의식을 느낀다. 말의 참된 주인인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우리의 글자를 만들어 내신 세종대왕께 느끼는 부채 의식이 그것이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말의 참된 주인’인 주변의 모든 이들과 같이 우리의 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우리 음식의 언어』를 썼지만 그 빚이 더 커지고 말았다.


‘쌀’과 ‘스트라이크’, 그리고 ‘뷁’

뷁, 세종대왕께서 이 글자를 보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굳이 세종대왕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요즘의 점잖은 어르신들은 얼굴을 찌푸린다. 다소 해괴망측해 보이는 이 글자는 어떤 가수의 노래에서 유래했다. 가사 중에 ‘왜 나를 브레이크(Break)’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을 빠르게 부르니 ‘왜날뷁’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가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다소 악의적으로 확대재생산이 되기도 했지만 ‘뷁’은 그 어원도 그렇고 표기나 소리 모두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달리 생각을 해 보면 ‘뷁’이라는 표기를 보고 세종대왕은 웃음을 지으실 수도 있다.


『우리 음식의 언어』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다뤄야 할 것은 ‘밥’인데 밥은 ‘쌀’로 짓는다. 그런데 이 ‘쌀’이 좀 묘하다. 오늘날 혼자 쓰일 때는 그저 ‘쌀’인데 다른 것과 같이 쓰이면 ‘좁쌀, 맵쌀, 햅쌀’처럼 ‘쌀’ 앞에 ‘ㅂ’이 붙는다. 그 비밀은 ‘쌀’이 과거에는 ‘옛글자쌀.jpg’이었다는 데 있다. 첫머리의 ‘ㅄ’은 오늘날 쓰이지 않지만 세종대왕 당시에는 ‘ㅂ’과 ‘ㅅ’이 모두 발음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한 것으로 본다. ‘ㅂ’과 ‘ㅅ’이 모두 소리가 나니 앞에 ‘조’가 붙으면 ‘조옛글자쌀.jpg’이 ‘좁쌀’처럼 발음되어 오늘날까지 ‘ㅂ’이 살아 있는 것이다.

 

2.jpg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 야구 심판의 ‘strike’란 콜을 들으면 어떻게 쓰실까? 오늘날 우리는 ‘스트라이크’라고 다섯 글자로 적지만 세종대왕께서는 그림처럼 한 글자로 적으실 것이다. 영어의 ‘strike’는 한 음절이니 우리도 한 글자로 적는 것이 맞다. 세종대왕 당시 첫머리에 ‘ㅂ, ㅅ’가 쓰였으니 ‘ㅅ, ㅌ, ㄹ’ 세 글자가 안 될 이유가 없다. 더욱이 당시의 ‘ㅐ’는 오늘날 ‘애’와 같은 소리가 아니라 ‘아이’를 빨리 발음하는 것과 같은 소리이니 영어 발음과 일치된다.

최고의 언어학자인 세종대왕의 귀에는 영어의 ‘strike’가 한 음절로 들릴 터이니 당신께서 창조하신 문자로 이리 적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뷁’도 그리 이상한 표기가 아니고, 이런 표기를 하는 친구들이 ‘어리석은 백성’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break’의 영어 발음이 한 음절이니 한 글자로 써야 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맞다. 이 ‘어린 백성’들은 한글이 가진 장점을 최대치로 드러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닭도리탕’과 ‘섞어찌개’, 그리고 ‘치느님’

‘어린 백성’이 ‘게으른 국어학자’보다 낫다는 것은 우리 음식의 이름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국어학자들은 ‘닭도리탕’이라는 음식 이름에 절대로 해서는 안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음식을 처음 만든 이가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닭새탕’이라고 이름을 지었을 리는 만무하다. 혹은 아주 똑똑한 이어서 ‘새’를 일본어 ‘도리(とり)’로 바꾸었을 것 같지 않다. 여러 정황으로 보건데 본래 ‘도리탕’이란 음식이 있었는데 닭을 주재료로 썼으니 ‘닭도리탕’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어를 잘 알면서 한편으로는 일본어에 거부감을 심하게 가지고 있는 국어학자가 ‘닭도리탕 = 닭とり탕 = 닭새탕’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볶음’과 ‘탕’은 엄연히 다른데 ‘닭볶음탕’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순화어’를 제시하고 말았다.

이와 달리 ‘섞어찌개’는 게으른 국어학자를 일깨우기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고기와 여러 가지 야채를 섞어서 끓인 찌개의 이름 ‘섞어찌개’는 사실 국어학자의 처지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힘든 이름이다. 여러 재료를 섞어서 끓인 찌개이니 어법에 맞도록 하자면 ‘섞은찌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섞다’의 명령형을 써서 ‘섞어찌개’가 되었으니 이제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조어법이다. ‘군밤’ 대신 ‘구워밤’을 쓸 수 없고, ‘비벼밥’이 ‘비빔밥’을 대체할 수 없으니 어법을 중시하는 국어학자는 ‘섞어찌개’가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법에 얽매이지 않는 부지런한 백성들은 과감하게 ‘섞어찌개’라는 이름을 지어 게으른 국어학자들의 연구거리를 늘려 주고 있다.

‘치킨’이 ‘닭’과는 다른 의미로 쓰이고 ‘치맥’과 ‘치느님’으로까지 발전하는 상황도 그렇다. 영어의 ‘치킨(chicken)’에서 ‘치’만 떼어내 ‘맥주’의 ‘맥’과 결합시키고, 나아가 ‘하느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국어학자로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한글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시도이기도 하다. ‘치맥’과 ‘치느님’을 굳이 영어로 쓰자면 ‘Chicken & Beer’와 ‘Chicken God(?)’가 될 텐데 그 줄임말은 CB와 CG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음절 단위로 모아쓰는 한글 덕분에 ‘치맥’과 ‘치느님’에는 훨씬 더 많은 정보가 있다. 세종대왕께서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한글을 만들지는 않으셨겠지만 ‘어린 백성’들은 한글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여 새로운 조어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빵’과 ‘사시미’, 그리고 ‘냄비’

‘빵’은 오늘날 우리의 식탁에서 낯설지 않지만 백여 년 전에야 이 땅에 들어와 일반화되기 시작한 음식이다. 그 이름은 포르투갈 어의 ‘파웅(pao)’에서 출발해 일본어의 ‘팡(パン)’을 거쳐 들어온 후 우리말에서는 ‘팡’과 ‘빵’이 경쟁하다 ‘빵’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빵이 점차 우리에게 친숙한 음식이 되었듯이 ‘빵’이란 이름도 외래어라는 거부감 없이 우리말의 일부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담배’나 ‘구두’ 또한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우리말 속으로 들어와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다. 그러나 외래어에 대한 우리의 원초적 거부감은 여전하다.

외래어라고 하더라도 원산지가 어디냐에 따라 우리의 반응은 조금씩 다르다. ‘스테이크(steak)’나 ‘스파게티(spaghetti)’를 굳이 ‘고기구이’나 ‘양국수’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시미(さしみ)’나 ‘스시(すし)’는 ‘회’와 ‘초밥’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실제로도 바꾸어 쓰는 경우가 많다. 우리와 일본이 한자를 공유하고 있고 문화적으로 비슷한 요소도 있어 같거나 유사한 단어가 있으니 당연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육회’와 ‘육사시미’가 각각 다른 음식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고 ‘초밥’과 ‘스시’가 같은 음식인지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경험을 되돌아보면 이러한 수세적 태도가 이해가 되기는 한다. 그러나 음식이 자유롭게 오고 가듯 말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우리말의 자산을 더 늘릴 수 있다는 포용적 태도도 필요하다.

음식을 조리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인 ‘냄비’는 다소 엉뚱하게도 일본어의 ‘나베(なべ)’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유래를 생각한다면 ‘냄비’를 퇴출시켜야겠지만 대체할 말이 마땅치 않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냄비 근성’은 우리 국민의 습성을 비하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불에 빨리 반응하는 조리 기구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쉽게 달구어졌다 금세 식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냄비의 그것과 닮아 있다. 한글날은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데 한글날 즈음에만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사랑이 달구어졌다 금세 식는다. 군불에 시나브로 데워져 뭉근히 그 온기가 유지되는 가마솥이 그리운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날은 ‘글자’의 날이지 ‘말’의 날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말을 적기 위한 우리의 글자가 만들어진 날이니 말과 글을 같이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해마다 한글날 즈음이면 뭔가 번지수가 틀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글 파괴, 우리말 오염, 세종대왕 통곡’ 등이 늘 반복적으로 제목으로 뽑힌다. 그리고 파괴와 오염의 주범은 세종대왕께서 사랑하신 ‘어린 백성’이다. 따뜻한 눈으로 보면 세종대왕과 ‘어린 백성’은 뜻을 같이하며 우리의 말과 글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유명한 요리사의 손이 아닌 이름 없는 이들의 수많은 노고에 의해 발전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과 글도 ‘어린 백성’의 꾸준한 노력으로 발전할 ‘우리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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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식의 언어 한성우 저 | 어크로스
밥상에 오른 음식의 이름에 담긴 우리의 역사, 한중일 3국의 역학, 동서양의 차이와 조우, 삼시세끼를 둘러싼 말들의 다양한 용법이 보여주는 오늘날 사회와 세상의 가장 솔직한 풍경이 펼쳐진다. 더 친근하고, 더 내밀하고, 더 맛깔나는 우리 밥상의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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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성우(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2007년에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전공 교수로 부임하여 현재까지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전공 분야는 한국어음운론과 방언학이지만 일찍부터 글쓰기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 많은 경력을 쌓았다. 글쓰기 및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저서로는 『경계를 넘는 글쓰기』 (2006), 『보도가치를 높이는 TV뉴스 문장쓰기』 (2006, 공저), 『방송발음』 (2008, 공저)이 있고, 논문으로는 『...텔레비전 자막의 작성과 활용에 대한 연구』 (2004), 『자막의 효율적 이용 방안에 대한 연구』 (2004), 『텔레비전 자막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 연구』 (2005), 『대중매체 언어와 국어음운론 연구』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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