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는 “자연의 빈자리를 채우는 84가지 꽃 이야기”가 담겨있다. 복수초부터 난티나무까지, 우리 산하를 물들이는 꽃과 나무들을 계절별로 소개해 놓았다. ‘굴기’라는 필명처럼 저자는 기꺼이 몸을 구부려 작은 생명들과 눈을 맞췄다. 하나의 여린 잎에서 시작된 단상은 유년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현실의 삶을 비춰 보여주기도 했다. 그 속에 자연과 삶의 이치가 숨어있다.
이굴기 저자는 궁리출판사를 이끄는 대표이자 <세계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문인이다. ‘제15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의 감성은 조금도 녹슬지 않은 모습으로 책장 사이사이에서 말간 얼굴을 드러낸다. 서울대학교 식물학과를 졸업했으나 민음사, 사이언스북스에 둥지를 틀고 책 만드는 일에 몰두했던 저자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식물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꽃동무들을 따라 산행을 다니며 식물들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과정이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18일, 파주출판단지에 위치한 궁리출판사를 찾았다. 사옥 1층에 자리 잡은 ‘플라워 스튜디오 메이릴리(MAY LILY)’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는 꽃과 나무를 통해 저자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그 위에 우리 삶을 덧대어보는 시간이 되었다.
꽃 이름을 외면 생각이 푸른 빛으로 변해요
대학에서 식물학을 전공하셨고, 지금도 꽃과 나무를 찾아서 산에 오르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오랫동안 출판계와 인연을 이어오셨는지 궁금해요.
식물학과를 나왔는데 과가 마음에 안 들어서 엉뚱한 곳에서 헤매다가,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 꽃을 발견하게 된 거죠. 식물학과를 나왔다는 이력이 주는 중압감이 있었죠. 사소한 압력인데, 예를 들면, 등산을 가면 친구들이 다 저한테 꽃 이름을 물어보는 거예요.(웃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모른다고 했는데, 그러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기도 했고요. 이 세상이 식물들의 세계라는 걸 희미하게나마 알게 됐어요. 이 세상은 동물들의 세계가 아니고 식물들의 세계입니다. 생태계의 1차 생산자가 식물들 아닙니까. 식물이 없으면 동물들은 살 수가 없죠. 그리고 식물은 독립적인 생활을 하잖아요. 광합성을 하니까 햇빛하고 물만 있으면 살 수 있어요. 동물들은 광합성을 못하잖아요. 외부에서 먹이를 구하지 않으면 굶어 죽어요. 그러니까 식물은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고, 동물은 일종의 기생을 하는 거죠. 식물들이 펼쳐 놓은 바탕에 잠시 사는 거예요. 그게 세상의 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일 수 있죠.
많은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깨달음을 얻잖아요. 에도 철학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철학까지는 아니고... 꽃 너머의 꽃, 식물 너머의 식물, 나무 너머의 나무를 한 번씩 생각해 보죠. 한 곳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너머의 의미를 캐내려고 하는 건, 사람이 가진 일종의 본능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글도 쓰게 되고 기록도 하게 되는 거죠.
“꽃이 꽃으로 머문다면 그건 꽃이 아닐 것이다. 어렵게 이룩한 보름달도 하루 지나 쳐다보면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듯 절정은 잠깐이다”라는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처음에는 저도 절정의 꽃, 잘생긴 꽃을 찾으려고 했죠. 벌레 먹지도 않고 완벽한 꽃이요. 그런데 완벽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건 내 눈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지, 꽃은 그냥 있다가 지는 거예요. 그리고 바람과 벌이 꽃을 가만 놔두지 않아요. 조화라면 가장 예쁘고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계속 있겠지만, 자연 속에 있는 꽃은 티 묻고 벌레 먹은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거예요. 사람들은 크고 화사한 꽃을 생각하는데 그런 건 순간에 불과하거든요. 그런 걸 찾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했고요. 자연이라고 하는 곳은 벌레와 바람과 햇빛과 그런 모든 것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우는 곳으로 파악할 수도 있는데, 그런 곳에서 꽃이라는 것은 흔들리고 훼손되고 조금 부족한 것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걸 볼 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덤가에서 살아가는 꽃들의 이야기도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가 순환의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어요.
저도 한때 시인을 생각했었고, 그래서 무덤과 죽음은 늘 관념 속에 자리 잡고 있죠. 그리고 생각하기 나름인데, 무덤이라는 곳이 굉장히 평온하고 안온한 곳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양명한 곳, 경치가 좋은 곳에 있기 십상이에요. 그러니까 무덤은 망자들한테도 좋은 곳이지만 꽃들한테도 굉장히 좋은 곳이에요. 후손들이 와서 햇빛이 잘 들게 해주고 물이 잘 빠지게 해주는 곳이니까요. 무덤가의 생태계를 보면 의외로 좋은 꽃들이 잘 자랍니다. 저도 산에 가면 항상 무덤 주변을 주의해서 보는데요. 꽃들의 잔치판이라고 할까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꽃과 나무를 찾아 다니면서 체감하신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예전에는 내가 세상하고 분리되어 있고 나는 자연계에서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먼지라도 하나 묻을까 싶어서 털어내고 유난을 떨기도 했죠. 그런데 미당 서정주의 시처럼, 꽃 한 송이가 피기 위해서는 천둥이 울고 먹구름이 치듯이, 다 연결돼 있다는 거잖아요. (꽃 한송이가)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처럼요. 산을 찾아가면서 ‘내가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구나, 탯줄처럼 연결되어 있구나’ 하는 느낌을 많이 받죠.
책에서 소개해 주신 우리말 꽃 이름을 보면 참 다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박하지만 관심을 갖고 보지 않았다면 지어줄 수 없는 이름들이죠.
우리가 계속 삭막한 도시 생활을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자연에 가까이 가고 싶어 하잖아요. 물론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노자가 말한 것처럼 인자하지는 않아요. 관대하지는 않아요. 곤충도 있고, 더럽고 지저분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 한 순간을 지나고 나면 자연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게 되잖아요.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도 나무 하나 꽃 한 송이가 없으면 얼마나 삭막합니까. 그런 것처럼 내가 하는 말 중에 꽃 이름을 하나 넣는다든지, 내가 쓰는 글에 나무 이름을 하나 넣으면 생태적으로 분위기가 살아나요. 마찬가지로 늘 꽃 이름 하나를 중얼거리면 내 생각이 푸른빛으로 변합니다.
나무는 비탈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책에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시인 게리 스나이더가 주장하길 “아이들한테 동식물 이름 100개를 외우게 하면 심성 공부에 아주 좋다”고 했다죠.
그럼요. 저는 문학 평론하시는 김우창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산을 찾아가기 시작하셨나요?
그게 계기가 됐죠. 미당이 말년에 정신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세상의 높은 봉우리 이름을 다 외웠다고 하잖아요. 저는 우리나라의 꽃 이름만 다 외워도 정신력을 잃지 않을 것 같아요(웃음).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리산에 피어있는 꽃, 백두산에 피어있는 꽃, 천마산의 돌 귀퉁이에 피어 있는 꽃의 이름을 한 번씩 불러주면 그야말로 우리나라 전 국토의 면적들과 속속들이 대면해 보는 거 아닌가 싶어요. 저는 노후에 미당을 흉내 내서 꽃 이름을 줄줄 외우면서 정신력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예요(웃음).
“마음에 두고 있는 꽃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럴 때를 대비하여 한편에 은근히 꼬불쳐두고 싶은 꽃”으로 개별꽃을 꼽으셨어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개별꽃은 정말 흔하고 아무렇지 않아서 좋아요. 제가 꽃을 잘 모르고 어리둥절할 때 만난 꽃이기도 한데, 너무 흔하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꽃 중에 하나예요. 물론 개별꽃의 종류도 많기는 한데, 정말 그 꽃을 보면 내 눈알이 간지러워집니다. 만져보면 손 안에 간지러워지고, 내 운명이 걸려 있다고 하는 손금도 간지러워져요. (개별꽃이) 이 땅의 지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래서 개별꽃은 특별하게 애정도 많이 가죠. 꽃 자체로 보면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은데, 있는 듯 없는 듯 있으면서 많은 걸 설명해주고 보여준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잖아요. 5년 동안 꽃과 나무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셨으니까, 같은 꽃이라도 예전과는 다르게 보이실 것 같아요. 어떠세요?
다르죠. 예전에는 발 없는 식물이 답답하겠다는 생각도 해봤는데, 갈수록 발 있는 우리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사실은 ‘나무들 비탈에 서다’라는 말도 맞는 말이 아니에요. 비탈은 나무한테 없어요. 우리한테나 있죠. 나무는 비탈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급한 경사도 간단히 뛰어넘어 지구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죠.
에서 계절별, 월별로 꽃과 나무를 소개해 주셨는데요. 작가님은 어떤 꽃과 나무를 보시면서 계절이 변했음을 느끼세요?
요새는 욕심이 조금 사납게 발동을 해서 좋은 꽃 귀한 꽃을 찾아 다니려고 노력하는데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나무가 900종 정도 되고, 야생화가 3300종 정도 된다고 해요. 그 4200종을 일일이 다 보고 싶은 게 제 꿈이에요. 보통 일이 아니죠. 4200종을 다 보고 하나하나 글로 써야 되니까요. 때로는 꽃을 찾아 다닐 때도 있어요. 그렇게 꽃을 따라다니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알게 되죠.
요즘은 어떤 꽃들을 찾아 떠나시나요?
지금은 꽃이 별로 없는 계절이에요. 그런데 귀한 꽃들이 피죠. 어제는 강원도에 갔었는데 솔나리를 보고 왔어요. 그리고 돌 틈이나 바위 근처에서 병아리난초, 구름병아리난초 같은 꽃도 보고요. 요즘처럼 땡볕이 내리쬘 때는 열매가 자라고요. 조금 있으면 가을 꽃이 나타날 거예요. 조금 과도기이긴 한데, 그래도 산에 가면 귀한 꽃들이 있죠.
시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태어나는 것
가장 많이 찾아가시는 산은 어디인가요?
지리산에 많이 가고요. 그리고 설악산에도 많이 가요. 책에 서문에서 저는 꽃에 대해서 초보자에 불과하다고 썼는데, 그게 겸손의 말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꽃을 잘 몰라요. 그저 꽃 이름 몇 개 아는 정도에 불과하고요. 그래서 아직까지는 꽃동무 분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죠. 그 분들은 꽃을 많이 아셔서 지금 이 시기에 어디를 가면 어느 꽃이 있다는 걸 아시거든요. 그 분들과 동행을 하죠. 그러다 보니까 봄에는 천마산, 여름에는 지리산, 가을에는 설악산,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맞춰서 다닙니다.
인왕산이나 수락산처럼 수도권에서 가까운 곳들도 찾아가시던데요. 그 중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보물 같은 곳도 있을까요?
그런 건 없습니다(웃음). 사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는 꽃은 별로 없고요. 인왕산은 제가 잊을 수 없는 곳이에요. 제 인생의 산이 됐죠. 저희 궁리 출판사 사무실이 인왕산 자락으로 이사를 갔었거든요. 40~50분 정도면 산에 올라갈 수 있었어요. 서울 한복판에 그런 산이 있다는 게 정말 신선하고 좋더라고요. 몇 발짝만 가면 인적 드문 곳이 나타나니까요. 그렇게 인왕산에 드나들면서 ‘산에 있는 나무와 꽃 중에 아는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꽃에 빠지게 됐어요. 관심을 가지고 산에 다니니까 또 다르더라고요. 예를 들면, 지난번에 지리산에 가서 봤던 꽃이 인왕산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느낌이 남다르죠. (책에서) 그런 경험과 감정을 글로 표현한 거예요.
이곳 궁리 출판사를 찾아오면서 기대가 컸습니다. 작가님께서 어떤 꽃과 나무를 심어놓으셨을까, 하고요. 책에서 보니 사옥을 증축할 때부터 공을 많이 들이셨더라고요.
그랬죠. 건물이 들어서기 전부터 벽돌 하나부터 시작해서 다 카메라로 찍어놨어요. 그 과정도 책으로 쓸 겁니다. 건축가가 아닌 건축주의 입장에서요. 나사 하나에 세상이 있듯이, 계단 하나에 세상이 있고, 꽃 하나에 세상이 있잖아요. 그런 점에 주목해서 책을 써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예전에 건축 일지를 썼었고, 한 지점을 정해서 매일 사진을 찍었어요. 누에가 고치를 만들 듯이 건물이 착착 올라가는 과정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근무하시는 공간에도 꽃과 나무를 두고 보시죠?
그럼요, 있죠. 선물 받은 꽃도 있고요. 제가 꽃에 빠져들게 된 계기가 있는데, 사무실을 옮기면 때 축하 화분이 들어오잖아요. 옛날에는 거들떠도 안 봤어요. 말라 죽이기 바빴죠. 그런데 어느 날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하나 보는데 안됐더라고요. 가련한 느낌이 들고... 동병상련이라고 할까요, 그런 걸 느꼈어요. 그래서 물을 한 번 주니까 잘 크는 거예요. 그때 교감 같은 걸 나눈 뒤에 꽃에 대해서 일체감이 생기고 연결이 됐어요. 줄이 연결이 된 거예요.
시로 등단하셨고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하셨어요. 시인의 길을 계속 가시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내 실력이, 밑천이 들통 났기 때문에 그렇죠. 예전에는 뭣도 모르고 시를 썼는데, 알고 나니까 내 깜냥을 알게 된 거죠. 좋게 말하면 내가 내 분수를 알게 된 거예요. 분수를 돌이켜 보니까 이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말이 정말 건방진 말일 수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말이 고인(故人)입니다. 시인보다 고인이라는 말이 퍽 좋습니다. 고인이라는 타이틀은 모두가 가지겠지만 아무때고 함부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한 몸이 한 일생을 통과해 내었을 때, 그거 시 아닌가요?
작가로서 책을 쓰실 때와 출판사 대표로서 책을 만드실 때,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사실 시라는 건 생활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태어나는 것이 시고, 그런 시가 밀도가 높고 좋아요. 제 생각에는 문학이나 좋은 글도 깨끗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시궁창, 더러운 곳, 뒤안길, 골목길, 인간의 땀 냄새가 배어나는 곳에서 태어나는 거란 말이죠. 그런 것처럼 책을 만드는 것이 제가 글을 쓰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겠죠. 자기 검열도 이루어지고 비교도 되니까요. 글이라는 것은 오로지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 생각과 자기 의기로 엮어내야 하는 것인데, 이런 곳에서 하기는 별로 좋지 않죠. 그래서 저는 어느 정도 분리합니다. (책을) 만드는 것은 만드는 것이고, (글을) 쓰는 것은 쓰는 것이죠. 은 제가 직접 가서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핥아 보고, 혀로 입에 넣어 보고, 코로 냄새 맡아 본 식물들에 대한 기록이에요. 제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문장화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 보니까 조금 생생한 느낌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굴기(屈己)하는 순간이 가장 황홀합니다
출판사 이름이 독특해서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을 것 같아요. “배우고 익히는 데 궁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체는 모름지기 독서에 있다”는 주자의 말에서 따오신 거죠?
그렇죠. 옛날의 궁리학이 요새로 치면 과학인 거예요. 과학이라는 게 사물을 자세히 보고 쪼개고 분석한다는 뜻이거든요. 궁리가 그겁니다. 그리고 생각을 하고 또 하는 것이 궁리니까, 생각의 고급 표현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처음에 출판사 이름으로 정할 때는 많이 망설였어요. ‘궁(窮)’의 의미가 상당히 다양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출판사 이름에 무슨 궁자를 쓰느냐’는 이야기도 하셨거든요. 그런데 짓고 나서 보니까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이름이든지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꾸어나가고 의미부여를 해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저희들은 궁리라는 말이 좋고, 이 이름을 귀엽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인상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독특한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작가님의 필명 ‘굴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어떤 의미를 담아 지으셨나요?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정신 차리지도 못할 때 붙여진 것 아닙니까. 누구나 다 마찬가지죠. 그리고 본인 것이지만 본인이 가장 잘 쓰지 않고, 그러면서도 안 쓸 수는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를 바꾸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예전의 나와 다른 모습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자신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바꾸는 방법이 이름을 바꾸는 거예요. 저도 나이 오십이 되니까 뭔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전면적으로, 확실하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요. 그때쯤 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하면서 호를 지었어요. 당시에 제가 운동 겸 매일 108배를 했는데 ‘일일굴신 평생지업(一日屈身 平生之業) 평생지업 일일굴신(平生之業 一日屈身)’이라고 적어놨었어요. 내 평생의 과업은 매일 절을 하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굴신’이라고 하면 뭔가 조금 별로였는데, 어느 날 ‘몸 신(身)’ 대신 ‘몸 기(己)’로 바꾸니까 느낌이 다른 거예요. 그때 ‘굴기’를 호로 삼았죠. 그러다가 꽃에 빠지게 됐는데, 꽃 사진을 찍으려면 몸을 구부려야 하잖아요. 저는 그저 ‘세상에 대해서 한 번 나를 낮춰서 보겠다’는 의미로 ‘굴기’라는 호를 지었는데, 마침 꽃 사진을 찍을 때의 동작도 아우르는 말이더라고요. 그래서 필명으로 쓰게 된 거예요.
낮은 곳의 꽃과 눈높이를 맞춰주시는 순간을 상상해 보면, 정말 다정한 풍경인 것 같습니다.
그렇죠. 누구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는데, 저는 산에 드나들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몇 개 생겼어요. 그 중 하나가 아무도 없는 산 속에 가서 피어있는 꽃을 볼 때예요. 그런 곳을 보면 낙엽이 많이 깔려있거든요. 세상의 적막을 흡수하고 있는, 침묵하고 있는 낙엽들이에요. 그 낙엽들 위로 내가 엎어지면, 낙엽들한테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인데, 꼬부라지면서 바스락 소리가 나요. 내 콧김 소리도 나고요. 그 소리를 내 귀로 들으면서 굴기할 때, 그때가 정말 행복합니다. 황홀합니다.
‘작가로서 쓰고 싶은 책’과 ‘출판사 대표로서 만들고 싶은 책’이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데요. 어떠세요?
사실 제가 쓸 수 있는 책이라는 건 제한되어 있죠. 제가 경험한 것, 제가 아는 것을 써야 되니까요. 그런데 만들고 싶은 책은 제가 쓰는 글이 아니잖아요. 세상에 흩어져 있는 원고를 기획해서, 또는 운 좋게 만나서, 그 분들과 의기투합해서 만드는 거니까요. 선택의 폭이 넓고 기회도 많겠죠. 그래서 제가 쓰고 싶은 책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고요. 만들고 싶은 책에 대한 욕심은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전류를 많이 만들고 싶어요. 궁리(출판사)에서 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런 책을 내면서 늘 드는 생각은, 제가 볼 때 사전은 세상의 전부를 부분적으로나마 건드리는 책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사전류를 만들고 싶어요.
‘작가로서 쓰고 싶은 책’ 가운데에는 의 뒤를 잇는 책도 포함되어 있겠죠?
그 책도 있고요. 말씀 드렸던 것처럼 궁리 사옥을 짓기까지의 과정도 책으로 엮을 생각이에요. 유리창, 계단, 흙, 돌멩이, 모래, 자갈, 물, 지나가는 바람... 이런 게 다 건축의 요소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저의 단편적인 생각을 집어넣어서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키고 싶어요. 어떻게 그런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돼서 사람이 사는 집이 되는지 이야기해보고 싶고요. 그리고 꽃이나 일상을 한시로 풀어서 써보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있어요.
에서도 꽃과 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었죠.
그렇죠. 이번에는 꽃과 한시에 대한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 내용을 ‘궁리닷컴(에 일부 연재를 시작한 셈이에요. 일주일에 2-3편의 글을 올립니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단상을 책, 영화, 한시와 엮어서 쓰는 글도 있고요. 꽃산행에서 주어온 궁리를 표현한 짧은 글도 있습니다. 아마 100개의 꽃 이름을 중얼거리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은 어떤 독자들에게 꼭 맞는 책이 될 것 같으세요?
두루두루 꽃이나 자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그와 관련해서 뭔가를 해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런 책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때리고 부수고 무너뜨리고 만져서 아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의 분위기와 배경과 의미를 안다는 거죠. 그런 것처럼 꽃에 대해서, 식물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은 제 책을 읽으시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느끼시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꽃과 나무도 나름대로 처한 조건과 환경이 있거든요. 자연의 다른 부분들과 맺고 있는 관계도 있고요. 그런 걸 종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실마리를 주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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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 저 | 궁리출판
이 책은 우리가 평소 무심코 지나치는 산과 들에서 어엿하게 살아가는 꽃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꽃의 세계에 뒤늦게 입장한 초심자의 마음으로, 직접 걸음을 걸어 꽃 앞에 가서 육안으로 확인하고 코끝으로 냄새 맡은 바를 글로 담아내었다. 산과 들에 가서 꽃과 나무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과 꽃을 매개로 확장된 생각의 단면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soonyp053
2016.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