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백석은 시를 못 쓴 뒤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백석 평전』으로 시인의 삶을 복원 현실에 어깃장을 놓는 게 시의 역할
한국에서 평전은 그리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다. 더구나 평전 쓰는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소설 쓰기나 시 창작보다 어렵다. 사실관계를 꼼꼼하게 확인해야 하고, 내용이 틀렸을 경우 받아야 할 비난이 커서다. 그럼에도 안도현 시인이 백석 시인의 삶을 평전으로 구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안도현 시인이 쓴 「너에게 묻는다」는 국민 시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시인 안도현이 낸 책, 이라고 하면 으레 ‘시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번에 안도현이 낸 책은 평전이다. 평전의 주인공은 그가 공공연하게 사부라고 말했던 백석 시인. 백석 시인의 작품은 교과서를 통해 많이 읽혔지만,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리 알려지지 못했다. 전쟁 이후 백석은 북으로 돌아갔고, 북에서의 삶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다.
백석이 1963년 북한 문단에서 종적을 감춘 뒤, 한때 숙청설과 사망설까지 떠돌았다. 최근에야 그가 1996년 85세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백석 평전』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나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84년의 세월을 다룬다. 비록 1963년에서 1996년까지 30여 년의 세월은 알려진 자료가 없기에 공백으로 남겨뒀지만, 안도현 시인이 재구성해낸 백석의 삶을 따르다 보면 그의 문학 작품과 문학관은 물론 굴곡 많았던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북방 정서를 백석 시에서 찾을 수 있어
늘 하던 대로 학생 가르치고. 상반기에는 『백석 평전』을 내는 데 온전하게 매달렸습니다.
이번에 낸 책이 시집이 아니라 평전입니다. 『백석 평전』을 낸 계기가 궁금합니다.
백석 시를 처음 본 게 34년 전, 대학 1학년 때였어요. 「모닥불」이라는 시였죠. 그때부터 백석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백석은 사부다”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할 정도니까요. 백석은 일제 강점기,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문학사에서 없었던 시인이었는데요.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 발굴되는 시를 만날 때마다 작품과 백석이 살아온 삶과 여정을 정리하고 싶었어요. 작품을 이해하는 것과 생애를 따라가는 일이 종합적으로 이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물에 관한 이야기로는 평전보다는 소설이 재미도 있고 친근할 텐데요. 평전을 써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요?
평전이 촌스럽죠. 출판사에서는 처음에 소설에 가까운 책으로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준비하다 보니, 백석에 관해 잘못 알려진 게 많았어요. 우선은 백석 생애에 관한 표준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이 책을 바탕으로 소설이든 동화든 나오면 좋겠네요.
백석 작품에 관한 평론도 평전에서 소개했습니다. 현대 독자들은 백석의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우리는 순수시와 참여시로 나누어서 시를 이분법으로 이해하는 잘못된 습관이 있어요. 세상에 모든 게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없어요. 특히 시야말로 다양한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백석의 시는 순수와 참여라는 이분법을 뛰어넘는, 뭉개버리는 역할을 하죠. 그런 면에서 백석 시를 좋아해요. 현대 독자가 방언 이해에서 막힐 수는 있는데요. 백석 시에서 눈이 얼마나 내리는가를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거예요. 눈 이미지를 포함해서 백석 작품에는 북방 정서가 있어요. 백석의 시를 읽으면 분단 이후에 우리 시에서 멀어졌던 정서를 회복할 수 있겠죠.
백석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껴안았던 천재 시인
평전에는 시뿐만 아니라 산문도 실었는데요.
시는 여러 책을 통해 독자에게 알려졌지만, 산문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가능하면 전문을 다 수록하려고 했어요. 산문으로 백석이 살아온 시간을 더듬을 수 있죠. 스키장 탐방기라든지 양을 키우면서 쓴 산문을 보니 역시 백석은 천상 시인이에요.
어느 해’볕 따사로운 이른 봄 산 밑 감자밭에 두엄을 내노라고 소발구를 몰고 가던 나는 엄지들을 따라 방목지로 나온 수많은 새끼양들이 즐겁고 발랄하게 뜀질을 하고, 개닥질을 하고, 또 엄지들의 흉내를 내여 마른 풀’입사귀를 뜯고, 풀뿌리를 들추고 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나는 이 때 나도 모르게 소를 내버리고 방목지로 달려 갔다. 그러자 매애애 소리치며 놀라 달아나는 새끼양들을 붙들어 안아 보고, 그 볼에 내 볼을 가져다 비비고, 등을 쓰다듬고...... 이렇듯 감격에 잠겼던 것이다. 그것들은 바로 내가 태’줄을 끊은 것들이며, 그것들은 바로 내가 구정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것을 안고 따스한 난로’가를 찾아 갔던 것들이다. 나는 이 새끼양들이 어서 무럭무럭 자라기만 간절히 념원하며, 그것들의 자지러진 울음 소리에 온 조합의 산과 골짝과 최’둑과 밭들이 한결 더 밝아 오는 것을 깨닫는 것이였다. (『백석 평전』 370쪽에서 재인용)
시집 『사슴』은 발간 당시에도 화제였고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는데요. 어떤 의의가 있을까요?
1936년에 한정본으로 나온 시집이었죠. 그 시기는 문학적으로 좌우가 갈등했던 때였어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부딪치던 무렵이었는데, 『사슴』은 어느 한쪽에 들지 않으면서 둘을 다 껴안았습니다. 물론, 책이 나온 당시에는 모더니스트는 호평하고, 리얼리스트는 깎아내렸어요. 이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고, 한설야만 하더라도 백석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어요. 한설야는 해방 이후에 김일성 오른팔로, 북한 문단을 장악했던 사람이거든요. 여기서도 보듯, 문단에서도 그랬고 독자들도 『사슴』이 나온 뒤로 백석에 굉장히 기대를 겁니다. 그 뒤로는 시들이 띄엄띄엄 발표됐고, 1948년에 을유문화사에서 시집이 나올 뻔한 적은 있었죠. 안타깝게도 전쟁이 나고 그 원고가 어디 갔는지 모릅니다.
무의미한 가정이겠지만, 백석이 서울에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가정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오지 않았을 것이에요. 왔다면, 해방 정국에서 굉장히 괴로워했겠죠. 친일했던 정치인, 문인이 서울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을 텐데 백석이 바라보면서 속상했을 것이고요. 서울에 있었다면 할 수 있는 게 학생을 가르치는 일, 아니면 기자였을 텐데요. 해방 공간에서는 미국에 어떤 태도를 가졌을지는 궁금하네요. 북에 남아서 정치적으로 괴로웠지만, 서울에 있었어도 괴로웠을 거예요
백석이 매력 있는 시인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는데요. 당시에 흔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한쪽을 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요. 백석은 그러지 않았죠. 그게 백석다운 거예요. 백석 시가 해방이나 독립을 적극적으로 외치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현실도피 시라고 볼 수도 없고요. 자연만 노래한 시라고도 볼 수 없고 친일시라고는 더욱 볼 수 없어요. 회색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시로 중용을 구현한 게 아닐까 싶어요. 시인의 길이 그랬어야 했겠죠.
자야 여사와 연애담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우선, 백석은 잘 생겼어요. 자야여사뿐만 아니라, 최정희. 모윤숙 같은 모던 걸이 궁금해하던 대상이었죠. 연애사는 과장된 면이 있어요. 백석의 연애사는 자야여사가 『내 사랑 백석』을 내면서 알려졌는데요. 사랑하면 데리고 살아야지, 부모가 기생이라고 반대한다고 포기했으니 배신감을 느꼈겠죠. 화가 났는지, 3번 결혼하고 돌아왔다고 썼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2번이에요. 2번 결혼하고 돌아왔다는 것도, 증언할 사람이 자야여사밖에 없어요. 자야여사와 연애를 인정은 하겠지만, 결혼 횟수는 2번으로 줄였어요. 평전에 쓴 대로는 백석이 4번 결혼했어요. 제가 궁금했던 건, 박경련과 관계에요. 박경련이 이화여고에 있었고 백석은 조선일보에서 일했는데, 적극적으로 고백할 기회는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을까요.
만주에서 기록은 많지 않아 백석의 생활을 상상하게 하는데요. 그렇게 청결을 중요하게 여기던 백석이 만주에서는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듭니다. 백석은 어떤 생각으로 만주로 향했을까요.
책에도 썼듯, 두 가지가 있었겠죠. 우선. 여기가 지겹고 싫으면 저기로 가고 싶은 욕망이 사람에게는 누구나 있어요. 그 당시 경성에서는 조선말로 시를 발표할 수 없었죠. 살려면 친일 단체에 발을 들여놔야 했고요. 첫 번째는 도피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새로운 문학을 해보려는 마음이었어요. 그 당시 만주는 신천지였죠. 만주 이주를 장려했어요. 그런데 가봤더니 그곳도 일본이 지배하는 곳이었죠. 「북방에서」, 「허준」이라는 시를 보면 만주에서의 괴로움, 원래 있던 곳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느껴져요.
1962년 이후로 시인으로 활동은 끝났지만, 자유를 누렸을지도 모른다고 썼는데요.
평론의 결론이에요. 우리는 백석을 시인으로 보는데요. 그런데 제가 만약 어떤 상황 때문에 시를 못 쓰게 됐다고 하면 불행하지 않을 것 같아요. 오히려 인간적으로는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해방 후 문학을 한다는 의미는 정치적 활동이었죠. 개인의 상상, 창작 자율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과 만주를 누비는 백석의 행적을 표시한 책 끝에 있는 지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백석이 특이한 게 아니고. 분단 이전에는 누구나 그랬어요. 38선이 나누기 전에는 누구나 그랬죠. 요즘 젊은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분단되기 전과 후, 지금 우리 문학에는 북방 정서, 대륙 정서가 없어요. 그냥 섬이죠. 그렇다고 일제 때가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안도현 시는 중소도시형 시
백석 시 작품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흰 바람벽이 있어」에요. 만주에서 쓴 시인데요. 혼자 고독하게 지내는 남자가 여러 가지를 돌아보죠. 어머니도 생각하고. 자기를 버리고 간 여자도 생각하고요. 시집에서 썼지만.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고 말하는 작품입니다.
백석이 평안도 방언을 자주 썼고. 일본어로 쓰지 않았는데요. 안도현 시인에게도 애착이 가는 시어, 포기할 수 없는 시어라는 게 있나요?
제 시는 시골이나 농촌도 아니고. 서울 같은 대도시도 아닌 중소도시형 시에요. 중소도시라는 게, 과거와 현재가 반반 섞여 있는 상태죠. ‘초가집’이라는 말도 싫어하고 ‘빌딩’도 싫어해요. 대신 ‘슬레이트 지붕’은 좋아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중소도시가 사라져가고 있지 않나요.
많은 사람이 대도시를 지향하죠. 편하려하고 많은 걸 가지려고 하고 더 맛있는 거 먹으려 하고요. 그게 현대의 욕망인데요. 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욕망 채우려는 현실에 약간은 어깃장을 놓는 게 아닐까 해요. 빨리 가는 사람에게 천천히 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많이 가진 사람에게 적당히 가지면 되지, 라고 말하는 게 시의 역할이죠.
백석 시에는 ‘작고 하찮은 것’을 향한 애착이 있는데요. 안도현 시인에게도 작고 하찮지만 소중한 것이 있을까요.
어느 순간부터 제 시도 작고 하찮은 것에 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넓게 보면 백석 시인의 영향이겠죠. 아니, 영향이라기보다는 백석에게 배웠어요. 시는 모름지기 빛나고 높은 것보다는 작고 하찮은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시인의 자세이기도 하죠.
구체적으로는?
백석의 「모닥불」에 등장하는 닭의 깃, 터럭, 이런 게 작고 하찮은 것에 해당합니다. 제 시에는 남들이 잘 거들떠보지 않는 풀꽃, 하찮은 벌레들, 연탄, 이런 것이죠.
절필 선언을 했는데요. 앞으로도 시는 쓰지 않을 예정인가요.
1년 전쯤에 당분간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게 절필 선언으로 언론에서 보도됐죠. 잠시 휴식이에요. 시를 안 쓰면서 1년을 보내니, 굉장히 편안해요. 놓아버렸을 때 느끼는 자유, 해방감이라고 할까요. 덕분에 『백석 평전』 같은 책을 쓸 수 있었죠. 당분간은 시 쓰지 않을 거예요.
백석 평전 안도현 저 | 다산책방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매료시켰으며, 해방 이후 후대의 시인들에게도 절대적이고 폭넓은 영향을 끼친 백석의 생애를 담은 『백석 평전』이 출간됐다.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짝사랑하고, 백석의 시가 “내가 깃들일 거의 완전한 둥지”였으며 어떻게든 “백석을 베끼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안도현 시인은 “그동안 백석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백석의 생애를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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