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 어떤 이유로든 나를 매혹시킨 책들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중에서 가장 묘한 책 『책등에 베이다』 한 번도 인용된 적 없는 문장들을 말하다
『책등에 베이다』에서 작가 이로는 자신이 사랑한 스물다섯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각각의 책들에서 가려 뽑은 문장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전혀 다른 의미들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한 데 모였을 때, 들려오는 것은 이로 작가의 감성이다.
한 번도 인용된 적 없는 문장들을 말하다
나는 서점, 도서관, 헌책방에서 책을 고를 때 책을 꺼내는 행동에 주목한다. 엄지와 검지로 책등을 움켜쥐어 빼거나 검지로 책의 윗부분을 잡아당길 때 나는 그 순간이 어떤 이의 집에 초대되어 벨을 누르고-문이 열리고-악수를 나누는 순간과 닮았다고 느낀다. (『책등에 베이다』10쪽)
이어질 목록은 날 베고 간 책등의 이름들이다. 두꺼운 책등에 베이다니, 그럴 수 있나. 물론 뻔한 과장이요, 지극한 수사다. 하지만 다시 생각한다. 기록하고, 이야기하고, 말하고 싶은 책을 처음 발견하고 책등을 향해 손을 뻗었던 그때, 나는 이미 의미로서 베이고 감정으로 홀렸다고. (『책등에 베이다』11쪽)
단언컨대 『책등에 베이다』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중에서 가장 묘한 책이다. 독자들에게 책을 소개하는 친절한 안내서도 아니고, 자신과 책의 인연을 줄줄이 읊는 감상문도 아니다. 대체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채널예스>와 만난 자리에서 작가 이로는 ‘연결고리’에 대해 말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보다 잘 이어줄 수 있는 문장들을 책 속에서 뽑아냈다는 것.
“『책등에 베이다』에 인용될 문장을 고를 때, 기준이 조금 달랐어요. 독자들에게 ‘이 구절은 정말 훌륭하지 않나요?’라고 얘기하고 싶은 욕망은 조금도 없었어요. 인용문을 통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잘 연결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한 편의 에세이를 만드는 부품들로써 인용문을 가지고 온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책등에 베이다』에 언급된 책들은 엄청나게 훌륭할 필요도 없었고, 굉장히 아름다운 문장을 품고 있을 필요도 없었어요. 어떤 이유로든 저를 매혹시킨 책이라면 된 거예요.”
이로써 『책등에 베이다』의 정체는 한층 명확해졌다. 책에 대해 말하면서도, 결국 그 이야기들이 한 데 모여 펼쳐 보이는 것은 작가가 가진 작은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등에 베이다』의 책장을 덮었을 때 기억 속에 남겨진 것은 작가가 소개한 수많은 문장들과 그것을 품고 있는 책들이 아니라, 그 안에 실려서 날아든 작가의 생각과 감성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혹스러울 만큼 놀라운 것이다. 불규칙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이야기들 틈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책등에 베이다』에 언급된 25권 책들은 공통된 키워드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서로 다른 분야의 내용을 담고 있다. 『내 여자의 열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 와 같은 소설부터 『빈 방의 빛』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같은 예술사에 대한 책, 그리고 『캠핑의 즐거움』 『조선 기술 : 배 만들기의 모든 것』 과 같은 실용서 까지도 한 데 담겨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책들을 읽어오면서 컸는지 진솔하게 펼쳐 보이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려 보면, 이 ‘무질서의 질서’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도 같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아 있다. 작가가 읽고 매혹된 책들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인용된 적 없는 문장’으로 자신의 세상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 그는 얼마나 많은 문장들과 만났던 걸까.
“굉장한 독서가도 아니고 책을 수집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이런 취향은 『다시 파리에 간다면』을 출간한 제 아내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녀가 수집한 책들 사이사이에서 발견한 희귀한 책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책등에 베이다』에 썼듯이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 같은 긴 글을 잘 읽지 못해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오래된 고전이나 누구나 알 만한 책, 혹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정받은 책이 언급되기를 기대할지도 몰라요. 저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책들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한 번 더 포장하거나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끌고 갈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읽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 말할 수는 없잖아요. 유명하고 훌륭하다고 인정받은 책들이 『책등에 베이다』에서 소개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에요.”
‘억울하고 외로운 책들’에 눈길이 머물다
저자 이로는 아내인 작가 모모미와 함께 독립출판물 전문책방 ‘유어 마인드’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소량으로 제작, 판매되는 독립 출판물에 대한 작가의 애착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고 사랑하는 책은 읽지 못하는’ 그의 성향과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읽는 책은 읽지 말자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유어 마인드’에 있다 보면 이런 생각을 계속 하게 되죠.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안에 여러 가지 각도로 봤을 때 발견되는 다른 지점들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읽히지 않고 얘기되어지지 않은 책들이 굉장히 많다는 생각이요. ‘유어 마인드’에 있는 책들 중에도 대형서점에서 판매될 가치가 충분한 책들이 있어요. 대형서점에서 판매 중인 책들보다 더 나은 책들도 있죠. 그런데 독립 출판물이라는 태생적인 이유로 독립 출판물 서점에만 존재하면서 소수의 독자들만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 모습들을 계속 보다 보니까 ‘책의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고 외롭겠다, 자신을 인용해 주길 바라는 책들이 얼마나 많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저한테는 그런 책들이 ‘인용의 바다’가 되는 거고요. 그 중에서 한 문장씩만 골라도 ‘모험하는 인용’ 같은 책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로 작가는 굉장한 역사를 만들어낸 책보다는 ‘억울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얘기되어지지 않은’ 책에 눈길이 간다고 말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대상보다 그 주변의 것들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그의 성향은 『책등에 베이다』에 실린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펭귄북스에서 ‘펭귄 스레드’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발간한 이 책의 ‘뒷면’에 대해 말한다. “드라마의 뒷면, 아름다움의 그림자 속에 살면서” 꿈을 꾸는 우리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개 사병이 무더기로 죽어가거나 약골 약혼자가 영문도 모른 채 버려질 때, 나는 바로 깨닫는다. 나는 영웅이나 새로운 환상을 완성할 인물이 될 수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유를(Freedom!)”이라 외칠 기회도 없다. 그나마 내가 영화라는 판타지에 개입할 수 있다면 CG처럼 죽어간 병사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120분 동안 단점만 잔뜩 나열한 채 엔딩에는 나오지도 못하는 약혼자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마저 사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전쟁에 나가지 못하거나, 버림받는 조연조차 되지 못한다. 혹은 파병을 극구 거부하다 그제야 본보기로 공개 처형될지도 모르지.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드라마가 없는 삶을 산다. (『책등에 베이다』151쪽)
저자는 “자수를 가짜로 표현한 표지”에 매료되어 『오즈의 마법사』를 구입한 뒤 표지의 뒷면을 한참 바라봤다. 그곳에는 색색의 실이 뒤엉킨 자수의 뒷면 그대로를 그려 놓은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을 통해서 작가는 ‘앞면을 완성하는 불규칙하고 무의미한 뒷면의 존재’를 떠올렸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전쟁 영화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조연 혹은 엑스트라들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주변부의 우리 삶으로 전개되는 이유다. 이렇게 『책등에 베이다』의 이야기는 잠시 방향을 잃은 채 엉뚱한 곳으로 나아가는 듯 싶다가도 곧 제 자리를 찾아 되돌아온다. 그래서 소설가 김중혁은 『책등에 베이다』에 대해 “미로 같은 책”이라고 평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을 때 또 다시 길이 이어지는 책이면서 “오히려 길을 잃고 싶다는 마음에 어울리는 책”이라고.
무덤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책등에 베이다』는 두꺼운 책등에 의해 “의미로서 베이고 감정으로 홀렸다”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고백은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책방을 운영하다 보니, 어떤 사람들보다 책등을 자주 보게 되죠. 그래서 저한테 남아있는 책의 이미지는 그것을 펼쳤을 때보다 ‘서있는 책들의 이름들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책등을 기준으로 책이 가진 내용이나 의미에 대해서 깊게 얘기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요. 『책등에 베이다』에서도 의미로써 저를 베고 간, 그렇게 남은 상처 때문에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는 책들에 대해서 쓴 거죠. 저는 책등이 가지고 있는 요소가 정말 재밌어요. 책등은 솔직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잖아요. 얇은 책등 안에 쓸 수 있는 거라고는 제목과 작가, 출판사명 뿐이죠. 광고 문구라든가 추천사, 그림이나 사진은 넣을 수 없어요.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담아 놓은 거예요. 그래서 뭔가 명찰 같아 보이기도 하고, 명함 같아 보이기도 해요. 그렇게 정보가 적다 보니까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죠. ‘이 책이 어떨 것이다’라고 예상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잖아요.”
“모든 책이 기립한 공간이 주는 긴장 속에서 그때 나를 홀리는 것은 바로 책등이다”(33쪽) “세로로 긴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서 분류와 번호를 따라 내가 부를 이름을 찾는, 환상과도 같은 때가 온다”(36쪽)고 작가는 말했다. 한 세계에 들어서기 전부터 ‘문패’만 보고도 매혹을 느끼는 그라면, 한 권의 책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은 순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를 매혹시키는 책들은 책등이라는 초인종 혹은 문패를 봤을 때 제가 기대했던 바를 너무 충족시켜주거나, 아니면 반대로 저의 예상을 완벽하게 배신해서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해주는 책들인 것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르네 고시니의 『꼬마 니콜라』를 그대로 베껴낸 김모세, 이규성의 『꼬마 니꼴라』 같은 경우에는, 책등만 봤을 때는 확신이 안 드는 거죠. 르네 고시니와 장 자크 상페의 『꼬마 니콜라』와는 무엇이 다른지 모르는 상태로 뽑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책등을 보고 뽑아냈을 때의 예상은 완전히 무너지고, 거기에 새로운 게 채워지는 이상한 책이죠. 물론 책등을 봤을 때 기대했던 바를 넘어서서 채워주는 책들이 더 좋은 것이지만요.”
‘책등’에 관한 고백을 뒤로 하고 『책등에 베이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롱프르’에 대한 것이다. ‘롱프르’는 펜싱 경기에서 “다시 한 번 찌르기 위한 후퇴”를 일컫는 용어다. 후퇴를 말하며 작가는 “나는 무덤가에 살고 있다”며 서늘하게 읊조린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려 ‘인문학의 죽음’이 이야기되던 시기에 대학에 입학해 ‘문학의 죽음’이 진단 내려진 시기에 국문학도로 살았던 시절에 대해 들려준다. 그리고 지금 ‘서점의 위기와 출판의 죽음’을 말하는 시대에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모두가 사지(死地)라 일컫는 곳으로 스스로 걸음을 떼었던 그의 시간이 궁금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대로 차근차근 짚어나가자고 생각했다. 먼저, 그 스스로가 문학을 말하는 것이 “나의 스포츠였다”고 회상한 시절에 대해 물었다.
“대학 시절에 저는 소설 창작 동아리에 속해 있었어요. 기성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저희가 직접 소설을 쓰기도 하고, 함께 모여서 각자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그때 저는 문학이 최상의 것이고, 가장 멋지고 소중한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정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 몸에 문학의 기운을 가득 달고 다니는 걸 훈장처럼 여겼던 자칭 문학청년이었어요. 면밀하게 파악하지도 못했으면서 아는 체 하고 싶어서 여러 작가의 이름과 작품, 수상내역을 머릿속에 입력해 놓고 자랑하듯 펼쳐놓는 걸 좋아했던 때였던 것 같아요.
지금의 제가 그때의 저를 보면 너무 안쓰러워요. 문학을 하나의 환상으로써 갖고 있었던, 어렸을 때죠. 문학이 세상의 본령이고 유일한 가치라고 시야가 매몰되어 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그때보다 시야가 더 넓게 흩어진 것 같아요. 소설만을 탐독하던 제가 여러 가지 다른 책들을 제 안에 보관하게 된 게 그 증거죠. 그래도 그 시절이 없었다면 ‘유어 마인드’를 시작하지도 못했을 거고 『책등에 베이다』도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시에 어설프게 혹은 과장해서 부르짖었던 이상한 생각들이 원동력이 되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나의 말과 생각이 담기지 않은 ‘나의 책’
이로 작가가 소설가를 꿈꾸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책등에 베이다』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유려하고 감각적인 문장들을 보면서 ‘왜 조금 더 일찍 작가가 되지 않은 걸까’ 궁금할 정도였으니. 실제로 그에게는 소설가 등단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도전의 패기가 실패의 절망감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반복됐고 ‘나는 왜 좌절할 수밖에 없는지’ 고민이 짙어졌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달았다. 자신에게 ‘등단이 되느냐, 마느냐’의 선택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의 글을 직접 출간하면 된다는 인식의 전환도 이루어졌다. 그래서 독립 출판물을 직접 제작했고(이로 작가는 1인 잡지 <수상한 M>을 비롯해 다수의 독립 출판물을 발행했다), 이러한 잡지들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 필요하다고 느껴 ‘유어 마인드’를 열었다.
“지금 저희 세대나 그보다 앞선 세대도 그렇지만 다음에 이어질 세대들 역시 너무 풍요로운 때를 만나지는 못할 것 같아요. 이건 저의 확신이 아니라 저보다 훨씬 더 경제를 면밀하게 파악하는 분들이 예상하는 바예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90년대 즈음의 문화적인 풍요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려울 거라는 거죠. 창작 활동을 통해서 삶의 기반을 닦을 수 있는 때는 지나가 버렸고, 앞으로 그런 시절과 더 멀어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이제는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장인정신으로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각자의 생존법이 따로 있어야 하는 때가 오는 거죠. 나의 범위 안에서 성공하려면 내가 제조해낸 방법, 법칙, 기준으로만 승부를 봐야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책등에 베이다』 서문에서 얘기한 ‘후진하는 방법-롱프르’였던 것 같고요. 거창한 목표를 향해서 검을 빼들고 돌진하는 때가 이미 지났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제는 크게 지르면 한방에 훅 가는 때가 왔잖아요(웃음). 그러니까 작게 지르면서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전진할 수 있으려면, 조금씩 뒤로 가거나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들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책등에 베이다』도 그런 방법 중에 하나인 것 같기도 해요.”
그는 『책등에 베이다』가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키길 기대하는 ‘작용’에 대해 말했다. 이로 작가의 롱프르 『책등에 베이다』가 독자들에게는 안겨줄 ‘일보 후퇴 뒤의 일보 전진’은 어떤 모습일까.
“『책등에 베이다』에 인용된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독자들의 반응도 너무 감사하지만, 그것보다는 ‘이것에 해당하는 나의 책은 무엇인가’라고 자기 책장을 하염없이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그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론이 나올 거고, 자신만의 책들이 나올 거고, 사람들이 멋있다고 하지 않지만 나한테는 소중한 뭔가가 나올 거예요. 그것으로써 사람들한테 얘기하기 시작하면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다른 사람의 말들과는 다른 것들이 계속 생길 수 있죠.
『책등에 베이다』를 통해서 제 이야기를 인용을 통해 들려주었듯이, 독자들도 자신만의 방법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의 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내 글을 쓸 수 있구나’하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테고 ‘내 생각이 담기지 않은 내 책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또는 ‘다른 사람들의 문장을 레고처럼 조립해서 나의 작품을 만들 수도 있겠네’라고 새로운 발견을 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다양한 변주들이 생겨났으면 좋겠어요.”
소설가 등단을 준비하던 문학청년이 독립출판물 책방의 주인이 되고 ‘자신의 것이 아닌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가 되기까지, 작가 이로는 남들은 ‘이미 막이 내렸다’고 말하는 무대에 스스로 오르기를 계속했다. 그 여정에 대해 들었으니, 이제는 이유에 대해 물을 차례다. 문학의 무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속해서 ‘너는 끝났다’ 라거나 ‘너는 죽었다’ 라거나 ‘이제 거기에선 무엇도 나오지 않는다’ 라는 선고를 받은 분야이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것 이외에 뭔가를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대체 불가능한 것이었죠. 그러면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됐죠. 지금 각광받는 ‘핫한’ 공간이나 문화, 분야로 옮겨 다니기만 하는 삶은 과연 행복한 삶인가. 혹은 자신에게 진솔한 삶인가. 제게 소중한 이 분야는 여전히 ‘이제 그곳은 더 이상 각광받지 않고 9시 뉴스에는 죽어도 안 나올 거야’라는 선고를 받지만, 저에게는 그런 선고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예요. 무덤가에 살고 있다고 해서 이 곳을 포기하고 더 화려한 어떤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어떤 문화에 푹 젖어서 세 번이나 끝났다고 선고를 받은 무덤가에 살고 있다면,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제가 고민해야 되는 건 ‘여길 어떻게 벗어날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무덤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뭔가’라고 고민해 봐야 하는 거죠. 이 분야가 끝났다고 해서 당장 저 역시 끝나고 죽을 게 아니라면, 최대한 소리쳐서 이 무덤가에서도 다양한 소리들이 나오고 있다는 걸 알릴 수 있으면 매몰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 같고요. 그것이 이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깨달은 제가 할 수 있는 활동일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소설가 김중혁에게 『책등에 베이다』가 “미로 같은 책”이었다면, 시인 이제니에게 『책등에 베이다』는 “먼지들의 세계”였다. 그녀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이 내면의 공간은 화창한 한낮의 햇살 아래 떠다니는 작디작은 먼지들의 세계이다. 먼지는 빛난다. 고유하게. 드높게. 이 먼지의 빛 속에서 그는, 한 사람의 개인이 온전히 그 자신으로 존재하기 힘든 이 시대에, 왜 결국 자신이 자기 자신이어야만 하는지, 왜 자신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한다. (시인 이제니의 추천평 중에서)
‘미로’와 ‘먼지’. 작가 이로는 이 두 개의 단어가 『책등에 베이다』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완벽에 가까운 단어라고 말했다.
“김중혁 작가님께서 미로라고 이야기하신 건 『책등에 베이다』가 뚜렷한 동선이나 노선이 없는 책이라는 의미일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하라고 얘기해주지 않는 책이라는 뜻일 테고요. 저도 모순되어 있는 사람이고 작가인데 그걸 『책등에 베이다』에서 일관성 있게 포장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한 책이죠. 그렇기 때문에 책 속의 이야기들 사이에 사소한 모순이나 분열이 생긴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어떤 부분을 삭제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뚜렷한 하나의 노선을 가진 작가여야 한다’는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미로라는 말에 해당하는 이 책의 정체성이고요.『책등에 베이다』가 먼지라는 이야기는 하찮은 개인으로서의 책이라는 의미죠.”
“책날개에 적힌 제 소개를 보면 ‘무명에 쓰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저는 그 말을 고칠 마음이 전혀 없어요. 만약 『책등에 베이다』가 베스트셀러의 상위권에 오른다고 해도요(웃음). 왜냐하면 저에게는 언제나 하찮은 한 명으로서의 역할이나 마음, 기준, 생각이 있거든요. 그렇게 조연으로서 엑스트라로서의 하찮은 먼지 같은 사람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저도 궁금했어요. 만약 『책등에 베이다』의 독자들 역시 먼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먼지니까 뭔가 표현하고 발화하기가 꺼려진다’고 생각했다면, ‘먼지로서의 개인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에게는 그것이 『책등에 베이다』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이에요.”
『책등에 베이다』라는 롱프르 뒤에 이어질 작가의 ‘전진’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주춧돌에 대해 말했다. 작가 이로에게 『책등에 베이다』는 하나의 기준점이 되는 주춧돌이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이 돌 위에 다른 돌을 하나 더 얹게 될지, 그 옆에 케이크 한 조각을 놓아두거나 텐트를 펼쳐놓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는 재치 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알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책등에 베이다』를 통해 자신과 독자들에게 생길 변화들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얼굴에서 기분 좋은 설렘이 읽혔다. 그의 다음 책은 ‘이로의 언어들’로 채워져 있을까. 아니면 『책등에 베이다』가 그러했듯이 ‘다른 이의 언어들’로 가득 차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 안에 흐르고 있을 ‘작가 이로의 감성과 목소리’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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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