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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류신 “공간을 사랑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펴낸 류신 중앙대 유럽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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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유럽문화학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 류신이 조금은 독특한 서울 탐방기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을 펴냈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번 작품은 기존의 서울을 문학과 예술로 읽어내는 작품이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는 ‘이 책을 소설가 구보 씨와 산책자 발터 벤야민에게 바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류신 문학평론가에게 있어, 그리고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에게 있어 ‘구보’와 ‘벤야민’은 어떤 의미를 가진 인물들일까? 그 궁금증을 풀어줄 실마리는 작품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했다. 많은 문학적 인물들과 사상가가 있는데, 왜 ‘그들’이여야만 했을까?


ⓒ 백다흠

산책자는 구경꾼이 아니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를 시작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왜 굳이 ‘서울’이어야만 했을까요?

저는 서울에 살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대학 진학 이후 거의 매일 서울에 머물러 있었죠. 25년 넘게 고향과 타향을 시계추처럼 오갔죠. 저는 서울에 살지 않지만 서울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 서울이란 도시는 매정하고 생경했습니다. 제 유년의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서울의 풍경은 무의미했습니다. 탁한 공기와 들끓는 소음과 현란한 간판이 싫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 서울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불가피한 현실이죠. 서울은 살기도 힘들지만 떠나기도 힘든 곳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보았죠. 서울을 내 삶과 밀착시키자. 서울을 탈출할 용기가 없다면 이 속된 도시를 감수하고 받아들이자. 그래서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서울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거리 답사가 서울을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했죠. 서울의 풍경을 온몸으로 품고, 진심으로 느끼고 싶었습니다. 서울이라는 필연적인 운명을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서울에 대한 저의 애증의 기록입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구보씨와 발터 벤야민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책머리에서도 밝히셨지만, 브레히트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구보가 적은 ‘산책하기’라는 문장을 보니 더 큰 존재로 다가왔어요. 이 책을 관통하는 ‘산책’의 의미와 그 산책이 이루어지는 ‘서울’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 부탁 드립니다. 또한, 구보 씨와 발터 벤야민으로 상징되는 ‘산책자’의 모습도 어떻게 표현하고자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산책자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산책자는 비록 거리의 대중들과 함께 있지만 집단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도시 속 유목민입니다. 산책자는 도시의 유니크한 노마드입니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대로를 걷는 산책자를 근대의 대도시를 형상화하는 예술가이자 시인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산책자 구보 씨는 보들레르의 후예입니다. 산책자는 도시를 배회하면서 도시의 풍경 속에 잠재된 ‘사유이미지’를 수집하는 거리의 예술가, 즉 도시 관상학자입니다. 공간을 그냥 통과하는 자는 행인일 뿐입니다. 공간을 하나의 텍스트로 독해하려는 자가 바로 산책자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왜 산책자로 ‘구보 씨’의 시점을 택하셨나요?

박태원의 구보 씨 는 1930년대 경성을 거닐었던 한국 최초의 ‘플라뇌르’, 즉 거리 산책자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영혼을 가진 한국 국적의 도시 산책자 시점이 필요했는데, 구보 씨가 맞춤한 적임자였습니다. 현실에 편입되지 못한 예술가의 고독, 도시의 일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 행복한 삶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 등을 체현하는 인물로 구보만 한 인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구보 씨가 발터 벤야민에게 ‘공중’에 띄우는 편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보 씨가 발터 벤야민을 ‘수호천사’라고 일컫는 부분도 흥미로웠는데요. 저자께서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의 다루고자 한 발터 벤야민이 궁금합니다.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을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미국으로 망명하려던 중 국경 통과가 저지되자 1940년 9월 26일 밤 스페인 국경 마을 포르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유대계 철학자 발터 벤야민, 그가 죽기 전까지 13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프로젝트가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입니다. 그는 19세기 초반 산업 자본주의의 여명기 프랑스 파리에 등장한 새로운 쇼핑 공간인 아케이드를 미시적으로 탐사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기원을 천착했죠. 벤야민 철학의 매력은 이전의 학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거리, 건축, 일상의 자질구레한 사물들을 관상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작고 사소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자본주의의 내부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대도시 삶의 원칙을 해석하는 단초를 찾았습니다.

저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2013년 ‘여기 지금’ 서울의 맥락으로 소환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쓰고 싶었습니다. 벤야민의 눈으로 서울의 아케이드를 탐색하고 서울의 상가에서 벤야민이 머금었을 사유이미지를 따라 그려 보려고 애썼죠. 도시 관상학자 벤야민처럼, ‘서울의 얼굴’인 서울의 거리에서 현대인의 실존 양식을 식별하고 우리시대 문화의 양상과 특징과 운명을 판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이 책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21세기 서울 버전으로 읽히길 소망합니다.

벤야민은 개념으로 사고하기보다 경험으로 사유했습니다. 강단 철학자라기보다 도시 산책자였죠.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세계철학학회가 열렸을 때 벤야민은 학회장에 참석하지 않고 폼페이 시내를 걸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벤야민이 좋습니다. 벤야민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학자입니다.

인물들에 관해 명확해지니, 시점을 돌려 공간을 묻고 싶습니다. 구보 씨가 살고 있는 곳은 ‘영등포’입니다. 특별히 영등포로 설정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마지막 인터로그에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 줍니다’라는 말, 그리고 ‘구보에게 사는 곳을 확인시켜 주는 곳은 버스 정류장이었다’라는 구절로 보아 영등포가 가지는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구보의 우울한 이미지와 영등포라는 공간이 어느 정도 부합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게 영등포는 서울의 촌스러운 변방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강서 최대 상권으로 부상하면서 일대가 개벽하고 있습니다. 전근대적인 서울과 포스트 모던한 서울이 공존하는 점이 지대가 영등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주인공 구보가 사는 아파트의 이름을 장미 아파트로 설정했습니다. 지은 지 17년 된 브랜드가 없는 아파트죠. 이 장미 아파트 주변으로 최첨단 주상 복합 건물이 영등포의 요지를 차지해 나가고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재개발의 욕망으로 늘 공사 중인 작금의 서울의 풍경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에는 참으로 많은 문학 작품들이 나옵니다. 이 중에서도 ‘서울’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작품을 좀 더 깊게 읽기 위한 길잡이가 있을까요?

서울을 사는 젊은이들의 내면 풍경을 이해하기 위한 단편소설집으로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비행운』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를, 시집으로는 조동범 시인의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 사건』 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특히 조동범의 시집은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의 씨앗 역할을 톡톡히 한 책입니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을 정독하길 권합니다. 그레임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아요.


ⓒ 백다흠

시와 회화, 문자와 그림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한다

역시, 많은 작품들이 술술 나오네요. 위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독서의 기본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독서에 남다른 애정이 있으실 것 같아요.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를 봐도, 스크린만 보면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리 지루한 소설을 읽어도, 책장을 넘기면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던 것 같아요. 문자 텍스트를 통해 머릿속에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일, 요컨대 독서를 통한 상상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이미지를 던져 주는 영화보다 문자를 통해 스스로 이미지를 조합해 나가야 하는 독서 행위를 더 좋아합니다. 가장 열심히 책을 읽었던 건 독일 유학 시절이었습니다. 브레멘 대학 도서관 3층 열람실 구석자리에서 책을 읽다가 물끄러미 쳐다보던 호수를 잊을 수 없습니다. 집중과 방심이 가장 아름답게 교차되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큰 프로젝트를 끝내셔서 또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셨을 것 같습니다. 요즘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시와 회화, 문자와 그림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시가 말하는 그림이라면, 그림은 말 없는 시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유사성과 문학과 회화의 친연성을 최초로 직관한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의 잠언이, 최근 제가 붙잡고 있는 화두입니다. 이시영, 이기인, 임선기, 장석원, 강기원, 김언희, 조인호, 서상영, 김충규 시인 등의 시 세계를 알브레히트 뒤러, 반 고흐, 에곤 실레, 마크 로스코, 마르셀 뒤샹, 프란츠 마르크, 르네 마그리트, 프란시스 베이컨 등의 그림과 연동하여 새롭게 해석하는 평론을 쓰고 있습니다. ‘시처럼, 그림처럼’, 제 세 번째 문학 평론집 제목으로 품고 있는 모토입니다.

요즘 색채론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스물일곱 살에 요절한 독일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에 나타난 일곱 가지 색, 즉 검은색, 흰색, 푸른색, 붉은색, 황금색, 자주색, 녹색의 상징성을 연구하기 위해서죠. 색의 제국을 구축한 그의 시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색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괴테의 『색채론』 을 꼼꼼히 읽고 있습니다. 더불어 미술과 문학의 경계를 탐색한 레싱의 역작 『라오콘』 도 정독 중입니다.

저자님께 ‘글쓰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러시아 천재 무용가 니진스키가 남긴 일기 가운데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저는 저의 내면을 지배하는 독재자가 제게 쓰라고 명령할 때 씁니다. 그래서일까요, 글을 쓰면서 늘 쩔쩔매곤 합니다. 글을 쓸 때 행복하다고 느껴 본적은 거의 없습니다. 실존의 허기로 늘 울고 싶었습니다. 울지 않기 위해 씁니다.

마지막으로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본문 상세 페이지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의 화두는 공간입니다. 공간은 인간 실존 양식을 해독하는 실마리입니다. 독자들에게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일상 공간에 대해 애정을 갖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발품을 팔아 걸으며 그 공간의 풍경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산타워에서 올라가 서울의 야경을 본다고 진짜 서울을 알 수 없습니다. 서울의 맨 얼굴은 거리입니다. 아케이드죠. 그리고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보는 상상력도 공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죠. 예컨대 이 책의 주인공 구보는 63빌딩을 한강을 굽어보는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서울의 여신으로 해석하고, 대형 쇼핑몰이 입점해 소비 공간으로 전락한 서울역을 롯데아울렛역으로 보며, 세종문화회관의 거대한 기둥을 6개월 이상 헬스클럽에서 운동한 근육질의 다리로 새롭게 읽습니다. 공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변의 조건이 아닙니다. 스스로 새롭게 상상해 창조하는 우리 삶의 토대입니다. 공간은 실존의 근거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공간,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을 사랑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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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류신 저 | 민음사
발터 벤야민식 서울 탐방기.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에서 모티프를 얻어, 서울의 일상을 미시적으로 탐사하고, 다양한 문화 텍스트를 풍성하게 인용하며 도시 읽기를 시도했다. 독문학자이자 문학 평론가인 저자는, 서울 곳곳에 스며든 문학의 기억을 끌어내며 그 사회 문화적 함의를 해독한다. 책은 주인공 ‘구보’가 2013년의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서면서 시작되고, 자정을 지나 귀가하면서 마무리된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처럼 21세기의 구보도 하루 동안 서울 거리를 산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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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유리(문학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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