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동물 키우는 능력이 최고지만 작가가 되어버렸어요"

『사뿐사뿐 따삐르』, 『카페 림보』 저자 우리가 사는 게 정말 자연스러운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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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꿈꾼다. 작품 하나만 봐도 그것이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독자가 알아채 주기를. 이런 측면에서 보면 김한민 작가는 상당히 불리한 포지션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한민은 결정했다. 어른 책 하나, 아이들 책 하나씩 번갈아 작업하기로.


’따삐르’라는 동물을 아시나요?” 김한민 작가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 등이 굽은 동물을 좋아하는 그는 <EBS 세계테마기행> 출연 차 페루 남부의 정글 ‘마누(Manu)’에서 마주친 따삐르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사진, TV, 동물원에서 수없이 보고 에콰도르의 한 자연보호구역에서 직접 만져 보기도 했지만 김한민 작가는 야생에서 ‘따삐르’와 마주하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작은 진흙탕 앞에 진을 친 결과, 진흙을 핥아 먹기 위해 살금살금 사뿐 거리며 다가오는 따삐르를 만났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사뿐 살금살금 걸어오는 따삐르를 본 순간, 김한민 작가는 따삐르를 주인공으로 한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특유의 걸음걸이로 사냥꾼을 따돌리게 되는 따삐르의 이야기 『사뿐사뿐 따삐르』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잠깐, 김한민 작가를 어린이 동화 작가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는 현재 <한겨레>에서 ‘김한민의 감수성 전쟁’을 연재하고 있으며, 최근 그림소설
『카페 림보』을 펴내기도 했다. 『사뿐사뿐 따삐르』의 그림을 보고 『카페 림보』를 읽는다면, 김한민 작가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따삐르를 그린 작가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카페 림보』를 그린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동명 이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른 그림체. 과연 김한민 작가에게는 얼마나 많은 모습이 숨겨져 있는 걸까. 그리스 비극의 가면 제작사를 다룬 만화 『유리피데스에게』를 시작으로 유아 그림책 『웅고와 분홍돌고래』, 그림 소설 『혜성을 닮은 방』 3부작, 소설 『공간의 요정』을 썼으며, 김탁환 작가와 정재승 교수가 집필한 장편소설 『눈먼 시계공』의 그림까지. 김한민 작가는 전천후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궁금하기 짝이 없는 김한민 작가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채널예스>가 만남을 청했다. 그와 약속한 장소는 서강대 근처에 있는 문화공간 숨도. 1층에 있는 카페부터 외관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김한민 작가가 인테리어 작업에 참여한 공간이었다. 이런, 질투를 샘솟게 만드는 전방위 예술가 같으니라고! 뭔가 허술한 점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했는데 이럴 수가! 그는 달변가 기질까지 충만했다. 필시 필자가 그림과 글 작업을 동시에 하는 작가였더라면, 김한민 작가에 대한 질투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책으로 만드는 직

 

 

『사뿐사뿐 따삐르』에 관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전, 탐색 차원으로 김한민 작가를 한번 떠보았다. 당최 ‘김한민 스타일’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물음이었다. 어떠한 답변을 꺼내놓을지 사뭇 기대감이 차오르는 찰나, 김한민 작가가 이실직고 했다. “사실 저한테는 많이 불리해요. 아무도 이 작품이 김한민이였어? 라고 눈치채지 못하니까요. 하나의 스타일로 꾸준히 하면 그림만 봐도 작가 이름이 떠오를 텐데 전 그렇지 않으니까요. 불리하긴 한데 그래도 똑같은 스타일로 반복하는 게 어려워요. 다만 비슷한 결이 있다면 그림이 둥그스름하고 각지지 않았다는 것, 캐릭터가 많이 살아있고 동물을 많이 쓴다는 것 정도가 될까요? 의도한 건 아닌데 저도 제 변덕을 주체하기가 어려워요(웃음). 하지만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그에 맞는 필요한 옷이 따로 있는 것 같긴 해요.”

『혜성을 닮은 방』에서 이런 대사가 나와요. 어떤 애가 이상한 개똥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듣고 있는 꼬마가 ‘형은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좋아’라고 말해요. 저도 그랬던 거 같아요.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재밌었어요. 지금은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어렸을 때는 아이를 안 좋아했어요. 아이는 보통 아이를 좋아하진 않잖아요. 작가에겐 내 마음의 상태, 상상력의 상태가 중요한데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려면 누군가에게 읽힐지 포지셔닝을 해야 하잖아요. 제가 꺼내고 싶은 결은 두 가지가 왔다갔다하는데, 하나는 진지하고 비판적인 거고 다른 하나는 소년 같은 이야기인 거 같아요. 제 안에는 소년도 소녀도 있으니까요. 작가라는 건 자신의 정체성을 책으로 만드는 직업이 아닐까, 싶어요. 저 같은 경우엔 그 정체성이 다소 산만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하나가 파워풀하게 작용하는 사람은 그걸로 자신의 색깔을 구축할 수 있겠죠.”

그래서 김한민 작가는 결정했다. 어른 책 하나, 아이들 책 하나씩 번갈아 작업하기로.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 상상력들을 대상에 맞게 재구성해 어른, 아이 독자를 찾아가고 있다. 눈치챘겠지만. 지난해 출간한
『카페 림보』는 어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었고, 이번에 펴낸 『사뿐사뿐 따삐르』는 아이 독자들을 위한 그림 동화다. 『사뿐사뿐 따삐르』는 김한민 작가의 동화적 감수성이 흠뻑 스며든 ‘따삐르’라는 동물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따삐르’에요. 얼굴은 코가 좀 짧은 코끼리 같고, 몸통은 돼지 비슷하고, 눈은 코뿔소와 닮았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몰라요. 따삐르는 주로 남미와 동남아시아에서 사는 포유류인데, 영어식으로는 ‘테이퍼’라고도 불려요. 우리나라에선 서울동물원 남미관에서 볼 수 있어요. 따삐르는 절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물인데, 정글에서 따삐르를 봤을 때는 정말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스리랑카와 덴마크에서 살았어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 동물을 많이 키웠어요. 맨날 곤충 잡으러 다녔고요(웃음). 문제는 동물을 키우는 능력이 너무 많아져서, 친구들이 ‘아 이 동물이 좀 키우기 힘들겠다’ 싶으면 모두 저희 집으로 갖다 줬어요. 동물을 키우는 관리자 리스트도 만들어서 혼자 검사필 사인도 하고 그랬죠. 베란다에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팻말을 달고 마치 동물사육사인양 생활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스리랑카 콜롬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자란 김한민 작가는 형, 누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유년을 보냈다. 형은 성인이 돼서 동물학자가 됐고 그와 함께 ‘동물들이 함께 사는 법’이라는 부제를 단
『STOP』 시리즈를 펴내기도 했다. 7권까지 펴낸 『STOP』은 9권으로 완성될 예정이며, 김한민 작가는 현재 돌고래 재돌이에 관한 동화, 개구리를 주인공으로 한 ‘양서류의 꿈’, SBS 라디오 <최혜림의 책하고 놀자>에서 진행하고 있는 ‘김한민의 책 섬’을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이번 작품 『사뿐사뿐 따삐르』가 아이 독자들을 위한 그림책이니, 오는 5월에는 어른 독자를 위한 ‘그림 여행’을 테마로 한 책이 나온다.




자연스러움이 나의 최대 화두

김한민 작가는 고2 때까지 이과생이었다. 미술에 관심은 많았지만 작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어릴 때부터 4남매가 그림을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고, 그 중 김한민의 실력은 다소 탁월했다. 김한민 작가는 고3이 되어서야 산업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있는 걸 알게 됐고 방향을 틀었다.

“고등학생 때는 예술은 정말 천재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피카소의 약력을 읽어보니까 전 끝나 버린 것 같더라고요(웃음). 그런데 디자인은 컴퓨터 베이스로 하는 작업이라 괜찮겠다 생각했죠. 동기들은 지금 자동차디자인을 비롯해 산업디자인 쪽에서 일하고 있어요. 저처럼 활동하는 친구들은 흔치 않아요. 운 좋게 그림책을 출간하게 돼서 지금까지 이렇게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거죠.”

가끔 웹툰 작업에 대한 제의가 들어오기도 한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중 하나이니 도전할 만도 한데, 김한민 작가는 딱 잘라 말했다.
“웹툰은 아무래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위주잖아요. 저는 생각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거고요. 저랑은 안 맞는 거 같아요. 순발력도 있고 빠르게 소비돼야 하는 콘텐츠인데, 저한테는 책의 형식이 맞다고 생각해요.”

일상 속에서 종종 세상에 대한 현기증을 느낀다는 김한민 작가.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하고 있으니 인터넷과 친할 것 같지만 SNS도 하지 않고, 고작 이메일만 확인하는 정도다. 한동안 독일에서 체류한 적이 있는데, 노숙자와 도서관의 따뜻한 자리를 다투며 보냈던 일상이 그립다고 한다.

“‘요즘 대학도서관들이 일반인들에게 도서관을 개방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야속한 마음이 들어요. 일반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모교 졸업생들한테까지도 개방을 잘 안 해주더라고요. 엄청나게 좋은 책들을 쌓아놓으면서 읽지를 못하게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못됐다고 생각이 들어요. 전 도서관에 가서 책 냄새 맡으면서 한가롭게 거니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은 참 쉽지 않네요.”

김한민 작가는 대학 재학 중, 인권영화제의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디자인잡지 <아니다>를 창간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소설가 김탁환과 함께 문화계간지 <1/N>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장기 휴간 중이다. 잡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는
“순수 문화잡지가 없어지는 현실이 아쉽다. 잡지는 언제라도 또 만들고 싶은 매력적인 매체”라고 말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작업하고 있지만 제가 가진 최대의 화두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언젠가 제 작업실에 놀러 온 분이 ‘유머와 깊이’를 스페인어로 적어 놓은 액자를 보고 인상 깊다고 하시더라고요. ‘유머와 깊이’. 이 말을 좋아해요. 고미숙 선생님이 ‘유머라는 건 타인을 완전히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웃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맞는 거 같아요. 자연스러움이 뭘까, 우리가 사는 게 정말 자연스러운 걸까? 이런 고민들을 많이 해요.”

『사뿐사뿐 따삐르』에 나오는 따삐르는 날쌘 표범이 쫓아오는 걸 보고 사뿐사뿐 걸어서 위기를 피한다. 모든 동물들은 저마다 큰 소리를 뽐내느라 바쁘지만, 따삐르는 개미 한 마리 밟을까 봐, 잠든 악어를 깨울까 봐 늘 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고 움직인다. 김한민 작가는 “누군가 『사뿐사뿐 따삐르』를 읽고, 층간 소음 문제에 교육적인 동화라고 말했다”며 웃었다. 최재천 교수가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타인에게 다가갈 때 너무 함부로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김한민 작가는 세상에 좋은 문턱들이 만들어지길 바라본다.




국민여동생 왜 필요하나? 친동생이나 잘 챙기지

 

글과 그림이 조화된 픽션형 저서를 다수 발표한 김한민 작가는 현재 <한겨레>에 일러스트 칼럼 ‘감수성 전쟁’을 연재하고 있다. 『카페 림보』에 나오는 콘셉트이기도 한 ‘감수성 전쟁’. 김한민 작가는 “지금은 감수성 전쟁 아닌가. 나와 맞는 사람은 아군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군으로 칭하는.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이 감수성이 맞다고 볼 수도 없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매주 1회 연재인데 벌써 50회를 넘어섰어요. 더욱 연대감이 생길 수도 반감이 생길 수도 있는데, 혼자만의 느낌? 이런 걸 포착하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나름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데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평도 있고 ‘대부분 찬성한다’는 평도 있어요. 마음 속의 벌집을 건드리고 싶었고 사실 더 세게 나갈 수도 있는데(웃음). 너무 부담스러운 주제라며 잘린 칼럼도 몇 개 있어요.”

최근 기억에 남는 칼럼으로는 ‘국민 여동생’을 꼽았다.
“도대체 국민 여동생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김한민 작가. 국민 여동생이 무슨 가방 메는지 일일이 간섭할 시간이 있으면, 친동생이나 잘 챙겼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끼는 마음은 좋은데 공인으로서 논문을 표절한 것도 아니고 일일이 패션 같은 걸 지적하면서 음흉한 시선으로 ‘내 국민여동생 성장했네’라며 가슴을 클로즈업해 사진을 올리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면 정말 어이가 없어요. 저는 그런 여동생을 둔 적 없거든요. 왜 이렇게 합의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지난해 출간된,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림보’와 바퀴족 이야기를 다룬
『카페 림보』도 ‘감수성 전쟁’의 출발과 다르지 않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90년대 중반을 지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대한민국을 빡빡하게 만들 때, 김한민 작가는 평소 좋아하는 공간들이 하나 둘씩 모두 사라져가는 걸 목격했다. 그는 “일상에서 겪는 불친절을 거듭 느끼며 상처를 깊게 받았다. 도저히 작품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고 토로했다.

『카페 림보』는 10년 전부터 구상한 작품이었어요. 어느 순간, 대한민국의 현실이 너무 비관적으로 다가왔거든요. 환경이 오염되면 개구리가 먼저 반응을 하잖아요. 작가, 시인들은 예민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하죠. 『공간의 요정』이 수비만 했던 전초전이었다면 『카페 림보』는 다소 공격적인 성향이 있고, ‘감수성 전쟁’은 아예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죠. 느슨하게라도 공감해줄 수 있는 연대감은 있는 거 같아요. 적어도 혼자는 아니니까 버티기 덜 힘든 거죠.”

김한민 작가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까. 현재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일은 환경보호와 동물보호다. 동물원에서 동물을 보호하기보다 서식지 보호를 통해 동물들이 살아갈 공간을 마련하고, 무턱대고 캠페인을 벌이는 것보다 동물들을 진짜 마음으로 사랑하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정책보다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숲이 좋아야 나무를 지킬 수 있듯이, 김한민 작가는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밭에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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