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한 묘사? 별로 할 게 없다. 분명히 사람의 모습인데 그 육체가 너무나 빈약하여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다. 하지만 가느다란 몸체에 비해 발은 좀 크다. 그래서 그는 부서지거나 흔들릴지언정 쉽게 넘어지지는 않을 듯 보인다. 그 육체가 차지한 공간 속에서 그들은 정말 왜소하다. 하지만 그는 서 있다. 그는 걷는다. 그것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감동적이다. 왜일까?
언제 어느 장소에서 보든 가슴이 쿵, 울리는 작품이 있다. 내겐 자코메티의 조각이 그렇다.
작품에 대한 묘사? 별로 할 게 없다. 분명히 사람의 모습인데 그 육체가 너무나 빈약하여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다. 하지만 가느다란 몸체에 비해 발은 좀 크다. 그래서 그는 부서지거나 흔들릴지언정 쉽게 넘어지지는 않을 듯 보인다. 그 육체가 차지한 공간 속에서 그들은 정말 왜소하다. 하지만 그는 서 있다. 그는 걷는다. 그것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감동적이다. 왜일까?
그것은 사는 일이 녹록하지 않음을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자코메티 본인의 말을 따라 ‘눌리고 깎이고 덜어 내어져서’ 실제와는 전혀 다른 낯선 모습으로 서 있는 저 조각의 인물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지도 모르겠다.
왜,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어느 날 문득 멈춰 서서 하늘을 보면서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하루하루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어느 순간 느껴지는 공허함과 지독한 고독감에 몸서리친 경험. 모든 게 다 낯선 느낌. 방의 책상도 주방의 식기들도, 매일 걷던 길의 형태도,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낯설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이던 날의 느낌.
바로 그런 게 저 작은 조각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인물들은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게 아니고 서 있거나 걷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힘들어 보인다. 그게 그냥 감동적이다. 눈물이 날 만큼….
카뮈의 소설과 자코메티의 조각이 만나다
사람들은 스위스 태생의 조각가 자코메티를 ‘영혼의 기본적 실체를 담은 조각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의 조각을 사르트르나 실존주의 철학과 연결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이 작품에서 떠올리는 것은 사르트르가 아니라 카뮈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실존주의’로 연결되는 이름들이기는 하지만 사르트르의 철학서는 내게 너무 어렵고 그의 소설은 제목처럼 ‘구토’가 날 지경이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소화할 수가 없다.
하지만 카뮈는 마치 전생의 내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동일시가 되는 인물이다. 종교가 힘을 잃고 신이 사망선고를 받은 이후 신앙의 힘이라거나 믿음에 기댈 수 없게 되어 버린 인간에게 이 세계는 어느 날 우연히 내던져진 공간일 뿐, 신이 없으므로 우리는 구원받지도 못한다. 거기에는 어떤 숙명적 기대감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내 의지도 아니고 신의 뜻도 아닌 채로 순전히 우연으로 세상에 내던져졌으니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는 화를 낼 수도 없다. 화낼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상을 이렇게 만든 신이 없는데 어디에 대고 화를 낸단 말인가.
『이방인』의 뫼르소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도 신부와의 면회를 거절한다. 시간이 없는 그는 하느님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다. 사후 세계는 관심 밖이다. 그에게 확실한 것이라고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뿐이다.
“인간은 이제 자신이 우연의 산물이고, 정말로 하찮은 존재이며, 이유 없이 게임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본래 무의미한 것인데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건 자코메티가 한 말이다. 카뮈가 뫼르소의 입을 빌어 한 말인지 자코메티가 한 말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서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코메티의 조각에서 카뮈를 떠올리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다. 카뮈의 군더더기 하나 없는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와 ‘사물의 실체’에 도달하려고 깎고 깎고 또 깎아서 깡마른 모습이 된 자코메티의 조각 또한 서로 그렇게 이어져 있다.
자코메티는 이렇게 덜어 내어진 인간 형상을 통해 ‘살아 내기’ 위해 애쓰는 인간들의 고독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에서는 겉모습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삶의 진실이 아프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림, 눈물을 닦다조이한 저 | 추수밭
심리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미술평론가 조이한의 그림 심리 에세이. 고전 미술부터 현대 미술까지, 우리의 지치고 상처 난 마음을 다독여 주는 작품들을 담았다. 사랑, 결혼, 관계, 슬픔, 상처, 자살, 삶의 비극성, 외모 콤플렉스, 늙음과 죽음 등 우리 삶의 중요한 화두들을 그림을 통해 성찰한다. 모딜리아니의〈모자를 쓴 여인〉을 통해 우리는 결코 타인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는 관계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카라바조의〈나르시스〉와 마그리트의〈연인〉을 통해 자기애와 상상력이 사랑의 본질임을 말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노동자 문화운동연합에서 가수로 활동하다 199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원래는 심리학 공부를 계속할 예정이었으나 그림의 매력에 빠져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미술사와 젠더학을 공부했다. 현재 서강대 평생교육원, 인하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상상마당 등에서 일반인들을 위한 미술사 강의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녀는 그림을 해석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림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한다. 지독한 외로움을 오기로 버티던 유학 시절, 에곤 실레의 〈해바라기〉 앞에서 무너지듯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알 리 없는 오스트리아 화가가 100년 전에 그린 그림이었지만 마치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준 것처럼 위안을 받았다. 이 책에서 그녀는 단지 그림 보는 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사랑 때문에 아픈 마음, 삶의 고달픔에 지친 마음,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마음을, 덮어놓고 괜찮다고 하는 위로가 아닌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다독인다.
지은 책으로는 《천천히 그림 읽기》(공저),《그림에 갇힌 남자》,《위험한 미술관》,《혼돈의 시대를 기록한 고야》,《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뉴욕에서 예술 찾기》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이 그림은 왜 비쌀까》,《예술가란 무엇인가》(이상 공역) 등이 있다.
1989년 성신여자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에 독일로 유학하여, 1993년부터 2004년까지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미술사와 젠더학(남성학)을 공부했다. 2005년에 인하대학교, 경원대학교 대학원, 성균관대학교, 서강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서양미술사와 현대미술이론, 젠더와 미술 등을 강의했다. 현재는 한국전통문화대학 교양학부에서 ‘성과 젠더’, ‘동서미술 감상법’, 한겨레 문화센터·세종 아카데미·상..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왔던 김겨울 작가가 시인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본래 시인일지도 모르겠다. 김겨울 시인은 우화라는 이야기의 형태를 빌려, 담대하게 불가해한 인생의 의미와 슬픔이 가져다주는 힘을 노래한다. 다 읽고 나면, 이 시인의 노래를 가만히 서서 듣고 싶어질 것이다.
무기력. 전 세계를 뒤덮은 감정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코로나 팬데믹 3년이 결정적이었다. 매킨지 조사로는 세계 직장인 42%가 무기력한데 한국은 51퍼센트로 높은 편이었다. 희망은 있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가 무기력을 극복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궁금한 건 뭐든지 파헤치는 '왜왜왜 동아리' 제대로 사고쳤다?! 반려견 실종 사건을 파헤치던 동아리 아이들, 어른들이 이익을 위해 선택한 일들이 환경오염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후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세상을 바꿔나가는 개성 넘치고 활기찬 아이들의 반짝이는 이야기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