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세상 낮은 곳, 아픈 곳을 중심에 두고 노래해야 하는 이유 -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이지상

‘고단한 사람들의 일상에 희망의 언어를 들려주는 가수 겸 작곡가’ 이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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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으고 다듬은 선생님의 첫 산문집입니다. 앨범만 내시던 분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또 다른 노래를 들려주신 거죠.

쿠바 독립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며, 문인이자 정치가?혁명가였던, 체 게바라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준 이 사람, 호세 마르티(Jose Marti, 1853.01.28~1895.05.19). 이런 말씀, 남겼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 그의 영향을 받은 쿠바 혁명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그 단초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불행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 안 해도 아시겠죠?

위대한 작곡가 윤이상은 이런 말씀, 했었다죠. “작곡가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심할 수 없다. 인간적인 고뇌, 압제, 부당함이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한다. (…) 고통이 존재하고, 오류가 존재하는 그곳에 나는 내 음악을 가지고 나아갈 것이다.”(『음악과 권력』 중에서) 음악 역시 한 시대의 산물로써,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준 말씀이지 싶어요.

모든 것이 정체 혹은 퇴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입니다. 음악이라고 예외일까요. 단적으로, 음악을 받아들이는 제 태도가 과거와 다릅니다. 이젠 가사를 품지 않아요. 아니 못 해요. 노래방에서처럼 가사가 눈앞에서 제시되질 않으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입니다. 아이돌의 얼굴은 선해도, 그들 음악은 이상하게 마음에 등재되질 않아요. 부러 기억하지 않아도 절로 내 몸과 마음에 각인됐던 예전 음악과 다릅니다. 매체와 청취 환경의 변화가 불러온 것도 있겠지만, 꼰대가 되어 가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음악이 혹시 세상을 품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네가 무슨 음악을 안다고 그래?’라고 타박하신다면. 그러게요. 제가 무슨 음악을 논하겠습니까마는, 삶과 세상을 노래하던 음악가, 가수들이 우리의 시야와 청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정태춘 선생님처럼, ‘이 풍진 세상, 더 이상 무엇을 노래한단 말인가’라며 칩거 아닌 칩거에 들어갔던 분도 계시고. 영화 음악이 품은 세상을 속삭여 주던 정은임 아나운서는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세상에 공명한 아프리카의 목소리 미리엄 마케바와 아르헨티나 민중의 목소리 메르세데스 소사도 세상을 떠나시고. 아아, 어쩌면 돈이 삼킨 주류 미디어가 음악을 전파하는 방식에 젖어든 제 탓도 있겠네요. 그야말로, 주류 음악만 틀어 대는 더러운 세상~

오해는 마세요. 아이돌 음악을 폄하하거나, 그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 아닙니다요~ 저 애프터스쿨도 좋아하고요, 특히 박가희! 아주 좋아 죽습니다. 하트♥♡♥ 작렬!! 음악이 좋은 아이돌,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나르샤, 아웅 예뻐요, 예뻐. 꺄아아~ 카라의 니콜은 어떻고요! 생각만 해도 므훗(!)합니다. 동방신기의 시아준수와 2PM의 김준수만 보면, 괜한 뿌듯함이(음, 이름에서 이상한 냄새가…….^^;).

그래도 세상엔 여전히 ‘다른’ 음악도 있습니다. 돈을 처바른 주류적 가치가 전파하는 음악 말고도, 세상 낮은 곳을 향한 울림이 있습니다. 작아서 잘 들리지 않을지는 몰라도, 중얼거리듯 낮은 세상과 생명을 노래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파탄 직전까지 몰린 주류 경제 구조가 아닌 다른 경제 구조가 지구상에도 있듯, 다른 삶도 존재하며, 역시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의 음악. 아주 약간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이돌은 아니지만, 성인돌도 아니지만, ‘중얼돌’이라고 붙여도 좋을, 어떤 ‘다른’ 음악. 이 마을에는 못난 놈들은 못난 놈들끼리 보듬고 삽니다. 배척하거나 분리하지 않습니다. 마을 공동체를 구성하는 누군가에게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며, 고통과 오류가 존재하는 곳에 음악이 함께 하는 그런 마을.

그곳, 사람과 사람 사이엔, ‘급’이나 ‘깜냥’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울려 살아도 부족할 세상에 무슨 무슨 급을 나눠 칼을 겨누고, 어디 그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급이나 깜냥을 나누는 게 편한 사람들이야 그렇게 해서, 자신의 우월감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겠지만, 아유, 남들 보기에 잘나서 참 좋겠습니다요, 그려. 동물도 위험에 처하면 나눠 먹고 무리에서 보듬어주건만, 아예 없는 사람들 것까지 다 털어 먹으려는 급을 보자니, 그들에게 급을 붙여 주고 싶습니다. ‘병맛급’이라고. ‘병맛’이 무슨 말이냐고요? 모르면, 찾아보시고. 그것 보고 혹 스팀 받으면, 제목에 ‘님하, 싸울래염?’ 하고 결투 신청하세요. ‘급’이 맞으면 상대해 줄게요.

참, 본론 들어가야죠. 지난 9일, 다른 노래를 청하고자, 서울 연희동의 한 옥탑 작업실 혹은 옥탑 놀이터를 찾았습니다. ‘고단한 사람들의 일상에 희망의 언어를 들려주는 가수 겸 작곡가’ 이지상 선생님을 만나 뵌 거죠. 최근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이지상 지음 | 삼인 펴냄)를 내신 것도 있고, 공산품 노래가 아닌 사람의 소리가 그리워서 찾아뵈었습니다. 그곳은 말하자면, 사람이 사는 작업실, 사람이 노는 놀이터 같은 곳이었는데, 한번 들어 보시렵니까. 당신의 귀, 열어 주세요.


사랑의 이유를 되새김질한 작업


이번 책,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으고 다듬은 선생님의 첫 산문집입니다. 앨범만 내시던 분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또 다른 노래를 들려주신 거죠. 어떤 사안이 벌어지면 머리보다 발부터 움직이고 마음이 먼저 갔던 그런 것에 대해 글로 풀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확실히 사람을 정확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그러세요. “내가 어렴풋이 사랑한 것을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유와 근거를 더 많이 만들 수 있도록 해 줬어요.”

물론 그만큼 글 쓰는 게 어려우셨대요. 노래 만드는 것보다 더. 하룻밤에 한 편 쓰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오죽하면, “글을 한 편 쓰느니 노래 다섯 곡을 숙제로 받는 게 나아요”라고 하실까요. 그래도, 책을 엮으신 것은 강의를 위한 목적도 있으셨대요. 선생님은 현재 성공회대학교에서 ‘노래로 보는 한국 사회’를 강의하고 계신데, 강의 텍스트로 삼을 만한 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품어 오고 계셨거든요.

그런데, 준비된 원고는 없지, 오디션이나 검증받는 건 생래적으로 싫어하지. 몇몇 출판사에 대뜸 책을 내겠다며 떠봤습니다. 당연, 통할 리가 있나요. 대부분 정중하게 난색을 표하는데, 이때 짜잔. 삼인출판사에서 편집자 회의를 거쳐 그렇게 하자며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나름 큰 사건이었다죠. 출판계에서 흔치 않은 일이라. 허허. 대인배끼리의 만남인가 봅니다. 무작정 책을 내겠다는 사람이나 덜컥 이를 받아 준 사람이나. 도대체 뭘 믿고! 아, 물론 약간의 친분은 있었다는 귀띔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 역시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사건이 아녔을까요. “기다림은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 선생님께서 쓰신 프롤로그의 제목입니다. 알다시피, 누구든 삶의 대부분은 기쁘지 않지요. “슬픔이 (삶의) 70~80퍼센트이죠. 나머지에서도 기분이 평안하고 기쁜 때는 5~10퍼센트 정도랄까요. 그렇다면 슬픔이 지난한 세월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희망이란 단어를 품지 않으면 안 되죠. 그런 희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라고 할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책에도 있지만, 내가 무엇을 갈망하는 순간부터 이뤄지기까지의 시간입니다. 국어사전에는 그리 안 나오지만.(웃음)”

인내는 기다림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잘 참는 사람은 많이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기다림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순간부터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의 모든 시간 혹은 행위’입니다. 그러니 wait가 아니라 hope가 맞습니다. 갈망이 현실이 되어 더 이상 바랄 필요가 없을 때가 기다림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발 딛고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은 모두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p.6)


비주류, 거의 대부분의 삶

책을 관통하는 핵심 중의 하나가 ‘비주류’입니다. 말하자면, 비주류로서 노래하고, 살아온, 아니 선택한 선생님이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것이겠죠. 물론 비주류와 소수자를 혼동하진 마세요. ‘소수자’가 차별을 받는 사람이나 약자라면, ‘비주류’는 말 그대로 주류가 아닌 사람들. 바로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되겠죠. “주류라면 명확합니다. 돈을 많이 갖고 편히 먹고살 수 있거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부류들인데, 그런 부류가 아니면 다 비주류죠. 물론 그중에서도 제가 관심을 가진 것은 소수자입니다. 소수자가 평안하지 않으면, 비주류가 평안하지 않으면, 주류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주류라고 단독으로 존재할 수는 없지요. 비주류가 있으니 주류라는 딱지도 붙일 수 있는 법이지요. 아무리 잘나도 혼자 잘난 법 없습니다. 이른바 못난 사람이 있으니까, 잘나 보이는 게지요. 그런데도 혼자 잘나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한다면 참, 네(사)가지 없는 꼬락서니랄까요. 뭣보다 선생님의 이 말씀, 꾹꾹 눌러 담습니다. “사람의 중심이 아픈 곳입니다.” 왜냐고요? 어디 몸 한군데, 아주 작은 부위라도 아팠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온몸의 신경이 그 아픈 곳을 향하고 있음, 명백하죠.

“모든 생활의 아픈 곳이 중심입니다. 사람도 그렇고, 가정도 마찬가지죠. 사회라고 왜 안 그러겠어요. 사회도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발가락이 부러진 사람이 온전한 몸이 아니듯, 발가락 부러진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온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아무런 불편이 없이 살지만, 우리보다 못사는 불편한 사람들이 있는 한, 내 마음도 편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말머리에 언급한 ‘호세 마르티’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환자 만 명에게 약을 써서 세 명만 듣는다면 그것을 약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던, 2,500년 전 춘추전국시대 묵자의 탄식을 온전한 9,997명을 놔두고 병이 난 세 명을 위해 약을 추렴하는 지혜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회 또한 미운 곳, 약한 곳, 작은 곳, 아픈 곳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p.129)

아울러, 책은 전쟁과 식민 지배 등으로 인한 역사의 한이 있음에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상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즉, 고통 받았던 민중에 대한 되새김질. 선생님께서는 “글에는 못 썼지만, ‘새로운 과거, 오래된 미래’의 생각을 했습니다. 과거사에서 몰랐던 일을 알면 새로운 과거가 되고, 그대로 모르는 채 넘어가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반성하지 않은 과거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습니다. 사회도 한 시대의 폭력으로 병든 부분이 있다면 이를 고치고 넘어가야 합니다. 설혹 고치지 못해도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노래의 힘은 세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건강의 3대 필수 요소가 ‘맑은 공기’ ‘깨끗한 물’ 그리고 ‘노래 부르기’라고. 선생님 역시 책을 통해 노래는 삶에 대한 경외의 산물이라고 하셨다죠. 그래서 여쭸습니다. ‘노래의 힘’, 말씀 좀 해 주세요! 겸손의 말씀부터 던지십니다. “다른 사람의 노래의 힘은 모르겠지만, 내 노래에 대해 근사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노래하고 작곡하지만, 다른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굳이 따지자면, 나는 내 노래 전문가일 뿐, 다른 노래를 잘 몰라요.” 흑, 그럼 저는 어떡하라고요. 선생님 노래를 듣곤 마음의 울림이 있었고, 잠시나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계를 생각했던 저는…….

그래도 노래를 계속 부를 것이란 반가운 말씀, 하십니다. “한때는 세상을 다시 세울 수 있는 도구로 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노래를 시작했어요. 근데 20년 정도 지나다 보니, 노래로 이룰 수 있는 게 없어요. 스스로 내 노래에 대한 신뢰는 못해요. 다만 한가지. 앞으로도 노래로 해야 할 것은 많습니다. 정리하자면 내 노래의 힘은 모르겠지만, 노래를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지만, 해야 할 것들은 있습니다.”

전 사실, 글보다 노래의 힘을 믿는 사람 중의 하납니다. U2의 보노와 같은 인물, 보세요. 완전 멋지죠. 노래라는 것, 사적인 경험이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철저한 상업적 기획에 의해 공산품처럼 생산되기도 하는 아이돌의 노래도 대중이나 트렌드에 부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잖아요. 물론 ‘사회적’이라는 의미에서 괴리된 측면도 있지만.

선생님도 아이돌 음악을 배척하진 않으십니다.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서라도 듣기도 하신대요. 아이돌 음악 역시 음악 산업의 일부인데, 한 가지 바람을 건네십니다. “결국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음악이고 그건 명확합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고, 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대중들에게 당신들의 돈을 빼내기 위해서 일을 한다고 말하고, 대중들도 그걸 쉽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뭣보다, 다른 음악도 존재한다는 것. 분명 획일화된 무엇이 아닌, 꼭 주류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가치가 꼭 하나인 것은 아니듯, 다른 삶이 존재하듯, 다른 음악, 있습니다. 그 다른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네 사람살이는 좀 더 세계가 넓어지고, 우주가 커지지 않을까요.

인터넷 P2P 사이트에서 돈을 지불하지 않고 음악을 다운받는 게 창작자의 의욕을 꺾고 음악을 고사시키는 행위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경외’를 품은 창작자의 욕구는 시들지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예술가의 고집과 자존은 시대와 사회적 관계로부터 부여받는 것이지 단돈 몇 푼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음악 산업이 고사하는 것이지 음악 자체가 고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업적 영역으로부터 눈을 떼게 되면 그전에 알았던 노래보다 더 많은 노래의 선율이 역동성 있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p.25)

그런 의미에서, ‘노래 듣고 울어보기’, 어때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내주는 과제명입니다. 시도해 볼 의미, 이유, 충분히 있습니다. “시 한 구절을 외우는 사람과 못 외우는 사람은, 삶에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노래의 한 구절이라도 가슴을 때리지 않으면 노래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래는 물론 감성을 일깨우는 데도 꼭 필요합니다. 노래를 그냥 듣지 말고 자세히 들으면서 노래가 가진 역사나 상황, 애절함을 함께 공유해 보세요. 반드시 어떤 지점에서 자신의 경험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고, 자신을 울릴 겁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까 언급한, 노래의 힘과도 연결됩니다. 작고 사소하지만, 어쩌면 거대한. 생활과 사고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노래 자체는 그런 힘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테면 지나친 상업적 관점 때문에 놓치고 있는 겁니다. 창작자가 삶에 충일한 상태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면, 청자도 만든 사람과 비등한 경험을 느끼고 일치시키면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당연히 있습니다. 수용자뿐 아니라 공급자가 경외라는 경험으로 만나서 눈물 흘릴 때, 가장 훌륭한 노래가 됩니다.”

그 많은 노래 중 자신의 가슴에 각인되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연장처럼 눈물이 되고 또 힘이 되는 노래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소위 ‘돈이 되는’ 일에만 몰두해 있는 대중매체를 노래정보의 원천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유통구조상 ‘사랑아! 네가 떠나서 나는 운다’류의 한정적 주제 외에 노래를 통해 더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지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가슴속 진동과 심장의 두근거림을 불러일으키는 눈물의 노래를 찾는 일은, 단순한 감정의 배설물로서가 아니라 차고 넘쳐나는 음악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쉬게 할 작은 배를 만드는 것이고, 일생을 두고 함께할 정서적 의지처를 확보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pp.240~241)

선생님이 동인으로 활동하고 계신 ‘나팔꽃’의 시노래 운동도 이에 한몫 합니다. 나팔꽃,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좋은 시 구절, 노래 구절을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인과 가수들의 앙상블. 시와 노래의 결합이면서 시너지. 이런 것이죠. “또 다른 자본 축적 수단이 된 노래에 빼앗긴 원래 노래의 시심을 회복하고,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확인하며,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해학과 풍자, 삶의 고민과 눈물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p.119)

참, 노래의 여러 힘과 의미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저는 4월이면 어쩔 수 없이 틀게 되는 노래들이 있어요. 아마, DNA의 조건 반사? 딥 퍼플의 「April」,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등을 듣곤 해요. 4월의 잔인함에 대한 각인 효과랄까요. 아, 그러고 보니, 올 4월은 날씨 때문에 참 잔인해요, 그렇죠? 뭐 그보다, 시대의 잔인함이 더 온몸을 찌르긴 해도 말입니다. “노동자의 생존을 위한 파업도,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철거민의 투쟁도, 이 땅에서 벌어지는 어떤 싸움도 공권력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면 목숨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p.37) 있는 놈들만 인간 취급하는 더러운~ 세상.


세상 낮은 곳, 당신의 눈길은 향해 있나요


알다시피, 세상은 불평등하고 높낮이가 있죠. 어릴 때 교과서엔 ‘직업에 귀천이 없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등등의 말이 찍혀 있고, 어른들도 그렇게 쫑알대지만, 훌쩍 커버리는 순간, 우리는 압니다. 이 구라쟁이들, 새빨간 거짓말이나 해 대고. 그러면서 사람들 눈길은 이상하게 세상 높은 곳으로만 향해 버립니다. 세상 낮은 곳, 안중에도 없도록 만들고, 높은 곳만 바라보게 만드는 지배 세력의 만행이 작렬하는 영향도 큽니다.

능력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효용이라는 잣대는, 알을 많이 얻기 위해 좋은 사료를 공급받는 양계장의 닭과 똑같은 방식의 삶을 인간에게 요구합니다. 무한 경쟁체제의 또 다른 말인 효용성 중심의 세계에서, 그 안에 갇힌 모든 것들은 볏 색깔이 점점 바래져 가는 줄도 모르고 알 낳기에 열심인 양계장의 닭처럼 자신의 생산력에 감탄하며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자랑스레 설파합니다.(p.103)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는, 그런 면에서 세상 낮은 곳에 대한 절절한 애정입니다. 그 애정, 읽다 보면 이 사회 시스템의 허점과 폐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스템의 전환이겠구나! 속된 말로, 돈 있는 놈만 꾸역꾸역 처먹는 지금의 구조로는 안 되겠구나. 역시나 얼마 전 만나 뵌 윤구병 선생님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분들이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지금의 구조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곧 재앙에 직면하리란 예언(!). 저는 심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번 주변을 둘러보세요. 마음 편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마음 놓고 사는 사람이 있는지. “요즘 돈 많이 받고 각광 받는 직업군이 증권맨이나 대기업에 있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조차 편하지 않아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득합니다. 경쟁을 통한 효율 중시 사회에선 사람이 중심이 아닙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려면, 피곤한 사람은 쉬어야 하고, 집 없는 사람에겐 집이 제공되고, 먹을 것 없는 사람에겐 먹을 것이 주어져야 합니다. 우린 알을 낳을 만큼 낳고 폐기되는 닭장 속의 닭이 아니잖아요.”

그런 면에서,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부 속담에 대한 ‘다른’ 해석을, 아니 잘못된 해석을 일깨웁니다. 이 속담들, 한번 봅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통념으로 해석됐던 말이죠. 하지만, 선생님은 이 속담이 실은 과정의 다양성이 훨씬 더 강조된 말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지만, 과정에 대해 중요시하지 않고 결과만 내놓길 바라는 것에 대한 일침 같은 것.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어떨까요. 미운 놈이 진짜 감정적으로 미운 그런 사람, 아니랍니다. 이 사회에서 어떤 이유로든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특히 소수자들이 살 궁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이 속담의 본질이라는 말씀. 한번 곰곰 생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온갖 부정을 해도 좋으니 오직 일등만 하라는 천박한 경쟁의 논리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으로 대치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p.58)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에서 미운 놈은 자신에게 피해를 준 나쁜 사람을 뜻한다기보다는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수자를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 누구의 이해와 도움이 없이는 정상적으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떡 하나 더 얹어주어 그 사회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공동체적 인식과 합의를 우리 조상들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으로 표현했던 겁니다.(p.129)


지금, 우리의 국가, ‘진짜’ 국가 맞나요?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공공 부조 의식의 결핍을 메우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서민들의 공공 부조 의식이나 온정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터지면 십시일반하면서 나눔을 실천하는 그 많은 인민들, 가장 보통의 인민들을 보세요. 선생님께선 문제는, 바로 정책 입안자나 힘을 가진 사람들의 의식 부재라고 지적하십니다. 사회의 아픈 부분은 누군가의 시혜가 아닌 공공 정책을 통해 치료해야 할 것임에도, 정부나 국가는 희한하게 ‘배째라’입니다. 국가가 국가의 의무를 못 하면서, 뻔뻔하게 국민은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고, 강권합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죠.

재벌에 대한 정서가 나쁜 것. 딴 이유 있겠습니까. 그들이 사회의 고마움에 대해,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지요. 자신들의 상품을 사주고, 이용해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네들이 컸지, 혼자 잘나서 그리 기업을 축조한 것으로 생각하는 뻔뻔함은 대체 무슨 몰염치랍니까.

국가가, 우리가 아는 국가가 아닌, ‘기업’ 국가로 전락한 지금. ‘천안함’ 사태는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아닐까요. 실종?사망한 대부분의 이들은, 국가 수호의 의무를 받들어 복역했음에도, 정작 국가는 국민 목숨을 지킬 의무를 방기한. 더구나 죽음에 대한 예우조차 못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이 짜증나는 혼란스러움. 선생님 말씀대로, “현 국가의 운영 방식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라는 것이 국민의 희생을 통해서 유지되는 건 아니잖아요. 정책을 통해 국민을 살게 해 줘야 하는데, 지금의 우리 국가는 그렇질 못합니다. 우리 영해에서 초계함이 가라앉았는데, 이유를 모르는 것도 그렇고, 우리 국방이 그렇게 허접이었습니까.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것 같은 은폐 의혹이 빨리 해소돼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도 국가를 신뢰하죠. 제발 신뢰를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하긴 말로 하자면 밑도 끝도 없지요. 거짓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쇼’를 했다가 3개월 만에 복귀하신 엽전 회장님을 비롯해, ‘언론’이라는 허울로 가장한 엽전 찌라시들은 또 어떻고요. 선생님의 ‘무지개’라는 노래, 권합니다. 참, ‘엽전’이 뭔 뜻이냐고요?

그러고 보면, 이 ‘엽전들’이란 말은 『허삼관 매혈기』의 “자라 대가리”처럼 찌질하고 궁상맞고 못난 것들이나 『완장』에 나오는 저수지 관리인 종술이처럼 서 푼짜리 벼슬을 조자룡의 헌 창인 양 휘두르는 어리석은 무리들, 또는 회장님 방귀 소리에 화장지 미리 갖다 바치는, 그야말로 알아서 척척 기어주는 딸랑딸랑 잔챙이 나리들의 능글맞은 웃음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p.87)


“어떻게든 되겠지”에 담긴, “적당한 갈망, 지나친 낙관”

선생님의 작업은 그렇게 계속 이어질 겁니다. 비주류, 소수자에 대한, 낮은 곳을 향한 애정. 첫 책, 글 모음집이 나왔는데, 앞으로도 선생님이 속한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글을 쓰고, 노래도 계속 부를 거랍니다. 더불어, 더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접근입니다. 잊고 있는,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지만 꼭 기억해야 할 어떤 역사들. 과제로 상정해 놓은 상태랍니다. 까레이스키와 일본군의 성 노예로 고통당한 여성들. 20세기의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세에 휘둘려 삶을 송두리째 잃어야 했던 우리의 역사, 우리의 상흔.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놓치고 있는. 계획대로 된다면야, 선생님은 오는 7월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과제 풀기에 나설 터인데, 한번 기대해 봐도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글도, 노래도, 다 선생님의 필살기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할 거라고 하십니다. “대화 상대가 맞장구를 쳐주면 좋겠지만, 안 쳐줘도 좋습니다. 혼자라도 중얼거릴 겁니다. 기억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아, 물론 밥벌이를 위해서 중요하기도 해요.(웃음) 그래도 그런 걸로 나를 규정짓고 싶진 않아요.”

아, 그리하여, 5집 앨범도 올해 말이면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실 생각이십니다. 음악은 다 준비가 됐으나 레코딩 등 여러 가지 함께 진행돼야 할 사항이 남아서 일정을 일단 그 정도로 잡으셨대요. 모쪼록 앨범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건 아닙니다. 오는 6월부터 전국의 조그만 서점 등을 중심으로 강의 콘서트, 북 콘서트가 진행될 예정이랍니다. 출판 기념회는 가을쯤? 늦게 한다고 누가 탓하겠어요.

이 모든 것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선생님 댁의 가훈에 수렴될 수도 있겠군요. 아, 이 가훈에는 함의가 당연히 있는데, 간단하게 어떤 낙관 같은 거죠. 희망을 품는 일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움직이는 것임을. 그다음 중요한 것은 낙관. “당장 안 된다고 조바심 낼 것이 아니고 꾸준히 하는 한 언젠가는 이뤄질 수 있다는 거죠. ‘독 짓는 늙은이’ 같은 심정입니다.(웃음) 사실 돈을 벌겠다고 벌리나요. 아무리 쫓아가도 안 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기왕 안 벌리는 거, 낙관을 갖고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무렴. 움직이고 싸워야죠. 적당한 갈망, 지나친 낙관. “희망의 방식으로 싸워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아름다워지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두꺼운 방호벽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소통을 가로막는 집착의 벽을 우리 스스로 허무는 희망의 싸움 말입니다. 요즘과 같은 절망의 시기에 이런 말을 드리면 욕하실까요? “적당한 갈망, 지나친 낙관.”(p.61) 다만, 이것은 조심에 주의하면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p.91)

알다시피, 쿠바 혁명도 그렇게 성공했잖아요. “승리할 때까지 Hasta la victoria Siempre.” 더불어 안타까이 사그라졌지만, 1973년 9월11일, 선거를 통해 집권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쿠데타군의 해외 망명 제의도 거절하고 칠레 민중의 영원한 대통령으로 남겠다던 이 마지막 연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내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렇게 선생님의 노래를 듣고, 글도 읽으면서, 기왕이면 노래도 함께 불러 봅시다. 아니, 그런 기회가 있느냐고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장마 무렵의 어느 날,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세어 보면서 막걸리에 파전을 곁들여, 옥탑 작업실 혹은 놀이터에서 콘서트를 가지자고. 꼭 비 오는 날. 한바탕 놀아 봅시다. 선생님이 마련해 주신다니. 까짓 거, 저도 막걸리 마시고 취하면 한 곡조 뽑아 보렵니다. 다들 취한 마당인데다, 빗소리가 제 노래에 코러스도 넣어줄 텐데, 덩달아 사람을 노래하는 일에 동참해 보렵니다. 님하, 어때요? 함께 하실래요? ^^

일단 예습도 필요하니, 선생님의 노래나 글을 보려면, 블로그 ‘이지상의 발자국’(blog.naver.com/chonchang)이나 ‘가수 이지상의 누리집’(www.poemsong.pe.kr)을 참조하시고요. 비 오는 그날, 봅시다. 우리는 그렇게 잇닿은 사람들이 될 겁니다. 다행이에요. 선생님이 계셔서, 당신이 있어서. 또한 기다릴 수 있어서.

그렇게 비가 오고, 당신이 내리는 날, 선생님의 이 노래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창밖엔 비가 내리고」(이지상 작사 / 이지상 작곡)

창밖엔 비가 내리고 늦은 침묵에 젖어서
읽다만 책장을 뒤적이는 이 뿌연 새벽
그립다 말은 못하고 애매한 웃음만 짓던
엊그제 너와의 만남을 다시 생각하면
사랑이란 얼마나 많은 기다림일까
창가에 얼룩진 눈물만큼의 세월일까
내리는 빗방울보다 더 많이 울었는데

반갑다 말을 하겠지 언젠가 널 또 만나면
으레껏 건네는 인사로만 웃고 있겠지
사랑한단 말하고픈 내 맘은 애써 감추며
아쉬운 커피 한 잔에 날 저물겠지
- 4집 <기억과 상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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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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