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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고, 목졸려도, 역사는 진보한다! - 『청춘의 독서』 유시민

‘정치는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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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양복 차림은 TV 화면 속 그대로였다. 오전에 본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느낀 까닭은, 그가 즐겨 착용하는 노란 넥타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유시민 선생님과 인터뷰가 약속된 날 아침, 뉴스에서 그의 이름이 여러 차례 들려왔다. 전날, 드디어 국민참여당이 창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그의 모습이 몇 번 비췄는데, 순간에도 가지런한 눈썹과 짙은 눈동자에서 완고한 인상을 받았다. 채널을 바꿔가며 뉴스를 들었지만, 아무래도 언론은 창당 소식을 그리 달갑지 않은 듯 보도하고 있었다. 추위가 가셨다고 했는데도, 밖은 아직 쌀쌀해서 어깨가 움츠러드는 날이었다.

단정한 양복 차림은 TV 화면 속 그대로였다. 오전에 본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느낀 까닭은, 그가 즐겨 착용하는 노란 넥타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매체를 통해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그 노란 넥타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단한 표정으로 단상 앞에 섰을 때, 선생님의 노란색은 검은 양복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자기만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인터뷰 중간 중간, 이가 보일 정도로 활짝 웃을 때, 그 노란색은 도리어 선생님의 웃음에 온화한 느낌을 더하기도 했다.

“사진을 먼저 찍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뷰파인더 너머로 선생님을 바라보자, 웃음기가 걷힌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호한 표정이었다. 잘 나오는 각도로 찍겠다고 이리저리 카메라를 들이대자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며 그제야 웃음을 머금었다. “웃지 않으실 땐 무척 엄해 보이신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래요? 누구나 다 그렇죠.”라며 좀 더 넉넉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유시민 선생님은 답변하실 때마다 으레 “……인생이 그런 거예요.” 혹은 “권력이 그런 거예요.”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러니까 지금의 생각들은 경험에서 비롯된 거다. 『청춘의 독서』의 매력도 거기에 있다.젊은 시절에 읽은 책을 ‘겪어낸’ 사람에게서 듣는 책 이야기다. 그는 책을 겪으면서 그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치를 경험하기 전과 이후 혹은 경험과 상상 사이에 놓인 생각의 차이를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그 생각의 차이들이 고전의 다른 얼굴들을 보여주고, 이제껏 들어가 보지 못했던 고전의 다른 입구를 열어 보이기도 한다. 그 사이 혹은 차이를 만든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전은 독자의 수준에 맞게 얘기를 해 준다

책의 반응이 무척 좋습니다. 선생님 주변 사람들이나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중년층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친구들이 읽어보고는 옛날 생각난다고들 하고요. 블로그 서평이나 이런 걸 보면, 40대 이상들은 대학 다닐 때 이런 책들을 좀 읽어서, 자기가 읽었을 때의 기억과 맞춰보는 재미, 이런 게 좀 있는 것 같고요. 지금 20대들은 시대가 달라져서 이런 책들을 잘 안 읽죠. 그것에 대해서, 뭐랄까. 나는 너무 가벼운 책만 읽은 게 아닌가, 이런 류의 자책감 이런 걸 느끼는 분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근데, 그럴 필요 없는데. 약간 미안한 거거든요.

‘내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나…….’라는 부제가 붙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 시절에 품었던 책과 질문들이 지금의 선생님의 모습을 만들어온 것 같습니다. ‘스스로 현미경을 들이대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집필 전에 말씀하셨는데요. 실제 집필 과정은 어떠셨나요?

현실에서 느끼는 의문에 대해, 책 속에 답이 좀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산업화가 늦게 되고 민주주의도 늦게 되었으니까, 먼저 앞서간 나라들의 역사나 그 나라가 배출해낸 지식인들의 좋은 책을 들여다보면, 우리 문제에 대한 답도 좀 있지 않나, 싶어서 목적의식적 독서를 많이 했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목적의식에만 집착하느라, 책의 맛을 제대로 못 느꼈다는 생각이 많이 들죠.

이번에는 내가 혹시 잘못 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읽은 거죠. 삶의 체험도 30년 더 쌓였고, 여러 가지 경험도 많이 해봤고, 다른 나라에 실제 가보기도 하고, 공부도 더 하고……. 책을 읽는 자세나 독자로서 가진 배경지식이 많이 달라진 상태에서 다시 본 거죠. 그때는 괜찮은 책이 지금 보니 아닌 것도 있고, 그때보다 더 괜찮은 책도 있었어요. 고전과 같이 시간의 무게를 견디고 살아남은 책들은, 독자 수준에 맞게 얘기를 해준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처음에 50권의 목록에서 총 14권으로 추렸다고 했는데, 그때의 기준으로 삼은 게 있다면요?

지금 할 얘기가 뚜렷이 생각나는 것. 책을 다시 읽어볼 때 뚜렷하게 예전에 읽을 때와 지금 다시 읽을 때 생각의 차이가 뚜렷하게 잡히고, 그런 얘기들이 지금 시점에서 우리 현실이나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의미가 있겠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들을 선택한 거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같은 건 언론의 문제, 이를테면 언론 자유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사기업의 미디어 권력이 제대로 역할을 못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하는 문제의식이 우리 사회에 굉장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 않습니까. 현실적으로 검토할 만한 것이고,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다 그런 단계들을 거쳤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거고. 각각의 사유들이 있어요.

책의 목차 순서도 직접 결정하신 건가요?

순서는 임의적인 건데요. 발생사적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첫 책이 『죄와 벌』이기 때문에 제일 앞에 간 거고요. 제일 오랫동안 들고 읽은 책이 『역사란 무엇인가』여서 맨 뒤로 갔고, 중간에는 상호 연계성이 많아서 읽은 순서와 상관없이 배치를 했어요. 『인구론』『공산당 선언』은 아주 대척점에 있는 책인데, 연관을 지어줘야 해서 순서를 조정했어요. 멜서스나 마르크르를 다루기 전에 『유한계급론』을 다룰 수 없거든요. 쓴 사람들도 마르크스주의나 멜서스주의를 공부를 한 사람들이니까, 내용의 관련성 때문에라도 『유한계급론』은 그 뒤쪽으로 갈 수밖에 없죠.

‘내 모교는 농촌법학회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라고 하셨는데요. 농촌법학회 풍경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추억이 많으실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 공부하고 나누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78학번이니까, 76학번들이 스터디 선배님이었고요. 77학번이 조교였어요. 전통적으로 해오던 스터디 주제 순서들이 있어요. 농업, 노동문제, 여성해방, 여성 문제……. 보통 그렇게 얘기를 했죠. 선진국, 후진국 사이의 경제적 종속관계 공부라든가, 1학년 말쯤 되면 러시아, 프랑스 혁명사도 공부하고요. 일주일에 하나씩 테마를 하는데. 1학년들이 책을 한 권 나눠서 발제를 맡아요. 그것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고, 그걸 3학년 선배들이 이끌어가죠. 대개 따라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선후배 사이에 논쟁도 벌어지기도 하고요.

공부하는 장소는 2학년 선배가 사는 자취방이었어요. 월세 2만 원짜리. 봉천동 사거리 쪽에 반지하 비슷한 움막집 가게들이 지금은 다 없어졌어요. 공부가 끝나면 거기에 있던 부산 오뎅집에 자주 갔는데, 막걸리에 부침개 먹으면서 얘기를 더 했죠. 반합법적이었고. 학교의 통제는 받지 않았어요. 개중에 쓸 만하고 용기도 있고, 빠릿빠릿하고, 결심이 선 친구들에게는 임무 부여를 하죠. 유인물을 뿌리라든가 쉬운 것부터.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을 할 준비된 친구들은 서클 범위를 넘어서는 학내의 반정부투쟁조직에도 넣어주죠. 말하자면, ‘반정부 투쟁을 하는 학생 비밀조직의 신병 충원’을 위한 창구 역할이랄까요.(웃음) 그런 거 하지 않는 회원들은 공부만 하고. 3학년쯤 되면 진로 찾아서 나가고, 그렇게들 하죠.


선생님은요?

1학년 때는 고민이 많아서, 별로 적극적인 행동 하는 학생은 아니었고요. 2학년 들어가면서 뭣 좀 해야 되겠다, 나도……. 야학 같은 데 가서 교사도 하고. 유인물도 뿌리러 다니고, 학내 비밀조직에도 들어가고, 그렇게 된 거죠.(웃음)


정치와 권력에 관한 ‘보편적인 문제’

역성혁명론을 펼친 ‘맹자’를 보수주의자로 해석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비록 현실 정치에서는 실패했지만, 씩씩한 지식인으로 살아간 맹자에 대한 응원과 공감이 느껴졌는데요.

맹자를 처음 읽었을 때 이 사람은, 레볼루셔니스트다. 당대에 비춰봤을 때는 혁명적인 사상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는데, 진보 보수의 관념에 대해 오랜 기간 생각해 본 결과, 맹자는 보수가 맞아요. 근데 우리가 보통 보는 보수와는 영 다른 사람인 거죠. 보수적인 철학과 사상으로 세상을 구하려는 사람이 좌절했을 때, 실패했을 때 과연 어떻게 할까, 들여다보니까 맹자는 계속 씩씩한 거예요.(웃음) 옛날에는 맹자의 혁명적인 사상이 어필해왔는데 다시 보니까, 현실의 좌절에도, 사람들이 비아냥거림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씩씩한 지식인으로서 살아가는 맹자가 눈에 보이는 거죠. 퍽 위로가 되더라고요. 저한테도.

맹자처럼 높은 학식을 가진 것 아니지만, 나름대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해 봤는데 잘 안됐단 말이죠. ‘어떻게 살지. 이제?’ 고민하고 있을 때, 맹자를 다시 보니까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그 길을 가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그 길을 간다,’ 이렇게 돼 있더라고요. 그게 참 좋은 거예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근원적으로 보수적임에도 삶에 임하는 태도는 굉장히 진취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현실의 처절한 실패에도, 스스로 자부심을 잃지 않을 만큼, 내면의 큰 산 같은 게 있는 사람이에요. 이게 우리처럼 이렇게 된 사람들에게 위로도 되고요, 2000년 전에 맹자 같은 사람도 이런 대접을 받고도 씩씩하게 살았는데, 우리는 그에 비하면 큰 좌절은 아니잖나. 맹자가 굉장히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써 본 거죠.(웃음)


‘말만 그럴 듯할 뿐, 실천의 의지가 없었다’던 제 선왕 시절과 지금의 상황은 그다지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말조차 그럴 듯하게 하지 않는데요. 당시에 맹자가 효를 강조했듯, 오늘날의 정치에서 실현해야 할 가치는 무엇입니까?

맹자가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인이에요. 측은지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어짊의 시작이라고 얘기했잖아요. 군주를 상대로 도를 폈기 때문에 그게 제일 먼저 나온 거예요. 지금은 지식 정보화 시대고,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나눠 가지고 있는 시대라 시비지심이 굉장히 중요하죠. 지금은 국민이 주권자인 시대잖아요. 국민이 왕이라고요. 이명박 대통령은 옛날로 치면 재상쯤 되는 거고. 국민이 큰 틀에서 결정한다고요. 그러니까 선거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국민한테 버림받은 거예요. 옛날로 치면 왕에게 버림받은 거죠.

절대 권력을 가진 한 사람이 왕일 때에는 측은지심이 제일 중요했지만, 지금은 시비지심이 제일 중요해요. 왕인 국민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모든 걸 하게 되면, 세상이 아비규환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생기는 많은 문제들이, 이명박 대통령 개인적인 퍼스널리티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없진 않겠지만, 근본적으로 국민들이 원한 거예요. 선택한 거예요. 국민이 선택을 바꾸기 전까지는 절대 달라지지 않아요. 이명박 대통령이 또 나올 수 있다고요.


저도 왕인 거잖아요. (그럼요.) 근데 별로 왕 같지가 않아요. 제 의사 반영 없이 국회에서 두드리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 같고, 별로 왕같이 느껴지지가 않아요.(웃음)

제가 책에는 인용을 안 했는데, 제 선왕한테 맹자가 한 얘기가 있어요. ‘산을 뽑을 만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깃털 하나를 들 수 없는 인간처럼 행태한다’고. 왕이 마음만 먹으면 태산도 뽑을 수 있는 사람인데도, 백성들을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 양 하는 걸 빗대서 제 선왕을 훈계해요. 근데도 제 선왕은 말을 안 듣거든요. 국민들도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데요. 시비지심을 딱 가지고, 옮고 그름을 가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투표만 제대로 해도 세상이 바뀌어요. 그런데 다 대통령 탓인 것처럼 대통령을 원망하고, 나는 무력한 개인 시민이니까 내 책임이 아니야, 이러고 있는 게 제 선왕 태도와 똑같은 거거든요.


『사기』에 전쟁의 천재였으나 정치의 둔재였던 한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를 멋진 남자라고 하시는 모습에서, 선생님이 무엇보다 신의를 중요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간 선생님의 정치 경험이 『사기』 속 권력 투쟁에 많은 주석을 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신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이 사람의 죄는 잘 몰랐다는 데 있어요. 변화된 환경이 다른 행동을 요구하는데, 거기에 둔감했던 죄로 비참하게 죽은 것이거든요. 공을 그렇게 많이 세운 사람이, 비참하게 함정에 빠져 삼족을 멸하는 벌을 당하고 죽어야 했을까 생각해본 거죠. 단지 둔감했을 따름이에요. 권력이라는 것이 그만큼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한신의 예가 권력의 본질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정국 때도 그런 거 있죠. 청와대에 있는 386들이 인사를 농단하고 있다. 이래서 집권당에 있는 중신급의, 예전에는 대통령하고 친했던 분들이 공격하는 일이 생기죠. 그런 게 이상한 게 아니에요. 어느 권력에나 있는 거예요.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도 똑같은 일이 생기잖아요. 보면 대통령의 가족이나 동향, 동문 측근들이나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요. 권력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예요. 인정을 해줘야 돼요. 참여정부 때는 워낙 노무현 대통령이 미우니까, 거대 언론 쪽에서 그거 자체를 코드 인사다, 측근 인사다, 보은 인사다 해서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권력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모든 권력은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로 그룹을 형성해서 인사를 하는 거예요.

『사기』에 보면 소하가 그 일을 하잖아요. 장량 같은 사람은 한고조 휘하에 합류해서도 일체 인사에는 손을 안 대요. 권력을 잡고 나니까 멀어지려고 노력하고. 이렇게 살아남는 거죠. 그리고 한신처럼 ‘왜 내 공을 안 알아주느냐!’ 이렇게 엉기면 그때는 죽는 거죠. 지금은 눈 밖에 나서, 장관직 못 받는 정도로 완화된 거고요. 권력도 인간이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해요. 미국인들은 다르게 하겠습니까? 조지아 마피아니 뭐니 그 말이 왜 나옵니까. 이걸 지난 정부 때는 아주 나쁜 인사를 하는 것처럼 했는데 지금은 더 하죠. 근데 별말 안 하잖아요.

그러므로 권력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왜 친박 쪽은 자리를 안 주고 다 친이만 자리를 가지는지 알 수 있는 거죠. 그게 그런 거예요, 원래. 오늘날 우리가 보는, 괜찮지 않은 여러 일들이, 우리만 있는 일도 아니고 새로운 현상도 아니고. 수천 년, 수만 년 전부터 계속됐던 것이고, 그저 현재 완화되고 문명화된 형태로 나타내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돼요, 그러면 훨씬 세상이 덜 보기 싫어요.


2000년도 더 지난 옛날 중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2000년은 생물학적 진화가 일어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시기심, 권력욕, 공격성, 독점욕은 그대로 살아 있다. 제도와 문화와 의식이 진화했기에 그런 욕망의 표출이 절제되고 견제될 따름이다.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 크메르루주의 대학살, 스탈린의 대숙청, 중국의 문화대혁명, 보스니아 내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 후세인의 쿠르드족 학살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을 보면 2000년 전 중국 대륙에서 터져 나왔던 인간의 야수성은 그럴듯한 환경만 조성되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을 2000년 전으로 던져놓는다면, 그들 중에서 틀림없이 유방과 항우, 소하와 한신, 숙손통과 여태후가 나올 것이다.(p.179)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보면 언론에 대한 비판이 강한 어조로 실려 있습니다. 한때 모두가 반성문 쓰듯 노무현 대통령 특집 기사를 써놓고도, 지금 언론을 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최근에 2PM 관련 보도 문제나 한명숙 총리 사태만 봐도 그렇고요.

언론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거든요. 서로 견제하지 않으면 누구도 견제할 수 없어요. 근데 같은 동업자들이라 견제를 안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괴물이 된 거죠, 괴물이. 이것은 한 사회의 문화 수준이 결정하는 건데, 이렇게 괴물처럼 행동하는 것에 언론이 스스로 제어를 못 하고, 이것을 제어해줄 수 있는 시민사회도 존재하지 않고. 이게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은 그 현실에 대해서 대항한 거고요. 그분을 빼고는 아무도 거기에 대항할 엄두를 못 내고 있고, 지금도 대항할 사람이 앞으로도 없죠.

미디어 감시하겠다고 목소리를 내는 단체가 있는데, 그런 곳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럼요. 그 사람들이 국민들하고 소통을 하고, 알려야 바로잡을 수 있는데, 결국은 그것 또한 언론을 통해야 알릴 수 있거든요…….(허허허)

책 속에서는 두 가지 언론의 행태가 나오는데요. 베트남전의 실상을 알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그리고 황색 신문 <차이퉁>입니다. 언론 권력이 이렇게 정의를 실현할 수도 있고, 사적인 이익만 추구할 수도 있는데요. 너무 많은 것이 맞물려 있어 한두 사람의 사명감만으로는 바뀔 수 없을 것 같아요. 구조적으로 어떤 점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권력을 가지고 싸우지 않고, 시민으로, 정치인으로서, 논리의 힘만으로 대적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졌죠.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에요. 이명박 대통령처럼 권력으로 언론 뒷조사를 한다든가, 검찰권을 동원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하지 않고, 한 개인으로 한 것이거든요. 그분이 바꾼 것은 언론이 아니라, 권력과 언론과의 관계를 바꾼 거예요. 그런 건데, 비참하게…… 싸움에서…… 졌죠. 누군가 죽였다면, 결국 언론이 죽인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죠. 거진 15년 넘는 세월에 걸쳐서 한국의 거대 신문사들과 싸움을 해왔던 분이, 대통령까지 지내고 나서 죽음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단 말이에요. 그걸 다 본 사람들이 이제 누가 덤빌까. 아무도 덤빌 사람이 없죠.

그럼, 앞으로의 언론의 풍경도 그다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어요. 임금님이 눈뜨기 전에는. 국민들이 눈뜨기 전에는 방법이 없다. (눈뜬다는 것은 구독 거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요. 그것이 허위임을 깨닫고, 구독 거부든 대항을 해야 하는데, 신문들이 국민을 지배하고 있잖아요. 왕이 무고를 일삼는 몇몇 언관들에 의해서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힌 상태와 같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겁이 나죠.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대통령 지낸 사람도 그렇게 되는 판국에, 하물며 보통 사람이야. 이제 덤빌 사람이 없죠.

누가 특별히 허위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분명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대충 어느 정도는 사실이려니 여기게 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대하는 기본자세이며, 우리네 삶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다. 우리는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정보를 숨 쉬고, 왜곡과 거짓을 마시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만약 어느 힘센 신문이 자기 나름의 목적의식에 입각해 특정한 종류의 사건에 대해 고의적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 정보를 지속적으로 내보낸다면, 나는 그렇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왜곡 보도 또는 허위 보도 때문에 이익을 보거나 피해를 입는 사건 관련자나 당사자가 아니라면, 내가 거기에 왜곡과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p.270)



진보의 역사를 부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언론도 답이 없고, 정권이 이렇게 지속되어도……. 진보는 된다?

언론들이 언젠가 망할 수도 있고……. 제가 죽기 전까지 망하지는 않겠지만, 그 이후에 망할 줄 알아요?(웃음)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구체적 변화들이 일어나죠.

‘역사가 진보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이 책뿐 아니라 선생님의 삶에도 중요한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은 역사가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보시는 거죠?

그렇죠. 진보라는 게 뭐냐. 사람들마다 진보라는 개념이 달라요. 진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원인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거예요. 우리 삶을 억압하는 요인들을 보자면, 우선 물질적 결핍이 있어요. 아이티에 지진이 나니까 사람들이 약탈하고 범죄를 저지르는데 그게 그들이 원래 악당이라 그런 게 아니잖아요.(굶주림 앞에서 인간은 나약하고 비열한 짐승이 된다.(p.188))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경제적 발전, 물질적 풍요가 중요해요. 그런 것은 진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물론 무한정 갈 순 없겠지만, 삶의 지속 가능성을 확립할 정도는 되어야죠.

두 번째는 나쁜 제도, 불합리한 제도에서 오는 억압이 있어요. 신분제나 검열, 고문 제도 등에서 해방돼야죠. 인간 개인이 조금 더 자유로운 상태로 계속 발전해왔다는 것, 그런 인간의 역사는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어요. 30년 전만 해도 대통령 욕을 하면 지하실에 거꾸로 매달렸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또 하나는 불합리한 낡은 의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에요. 생각이 잘못됐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해지는 일이 너무 많아요. 머릿수건을 쓰지 않으면 죽인다든지, 바지를 입고 나왔다고 매를 때린다든지, 이런 인간을 억압하는 의식들에서 벗어나야죠. (이기적 욕망 추구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개성의 발현을 극도로 억압하는 사회는 오래 지속되기 어려우며, 지속된다 하더라도 좋은 사회라도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p.67))

일시적으로 거꾸로 가기도 하고, 자유가 목 졸리기도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그 와중에도 인간은 좀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왔다는 거죠. 역사 기록이 존재하는 시대를 통틀어봤을 때 그 방향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걸 부정하고 나면, 살맛이 별로 없죠. 이런 걸 봐서라도, 앞으로 백 년 후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상태로 살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는 거죠.


‘진보가 무엇인가’의 문제도 고전처럼 ‘누구나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진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서는 왜곡된 측면도 있지 않나 싶었고요. 혹자는 여전히 진보, 하면 좌빨이나 빨갱이라는 막말을 들이대기도 하니까요. 진보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빌 게이츠 같은 사람도 진보를 실천하는 다른 모습일 수 있을텐데요.

미국도 70년에는 히피들이 진보였고, 진보의 가치가 보편적이 되면서 부자들도 그렇게 된 거예요. 사회가 얼마나 문명화된 사회고 진보적인 사회냐는 부자들이 어떻게 하느냐 보면 알아요. 그런데 욕심을 내면 안 돼요. 우리가 미국 수준이나 유럽 수준으로 가려면 시간이 앞으로도 한참 더 걸린다고요. 그런데 50년 전하고 비교하면 그 격차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어요. 우리가 50, 60년 전 이때는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라는 꽃이 피는 게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우리가 영국이나 그런 나라보다는 좀 못하지만요. 우리도 이제 국회만 좀 말로 하는 식으로 바뀌면 대충 다 따라왔어요. 한국은 진보의 속도가 굉장히 빠른 나라예요. 생지옥이 아니에요. 아, 되게 괜찮아요. 이런 나라에서 난 거는 엄청 큰 행운이라고요. 무조건 생지옥이라고 얘기하는 건, 현실을 바로 보는 게 아니에요. 욕심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다고,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었다고, 뭔가 확 바뀌지 않는다는 거죠?

오바마 대통령이 일 년 동안 한 게 뭐예요. 의료보험 법안 하나 한 것밖에 없는데. 우리나라 건강보험법에 비교하면 형편없는 거예요. 그만큼 제도의 진화는 어려운 거라는 거예요. 세계 최강국의 권력을 가진 오바마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보험 하나 드는 걸 못해서, 수정하고 수정해서 누더기를 만들어서 겨우 지금 하는 거예요. 그걸 ‘저게 뭐야. 저게, 형편없이.’라고 말하지만, 굉장히 귀한 거예요. 그렇게 시작해서 또 그다음 대통령 누군가가 그렇게 엎어가는 거예요. 하나씩, 둘씩. 몇십 년이 걸릴 거예요.

‘근본적 변화’는 아름다운 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이르지 못하는 부분적, 점진적인 개선을 아름답지 않거나 의미 없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누구도 변화를 일으키려고 도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p.267)

노무현 대통령이 돼서 확 달라질 거다? 그 기대가 잘못된 거예요. 사회는 그렇게 확 달라질 수가 없어요. 혁명이 아닌 한은. 그죠? 양심 있는 사람은 대통령 되겠다는 결심하기가 참 힘들어요. 확 바꿀 수 없다는 걸 정치하는 사람들은 너무 잘 알거든요. 그런데 국민들한테는 확 바꾸겠다고 얘기한단 말이에요. 처음부터 거짓말이에요. 그래서 난 확 못 바꾸겠다고 공약을 하면 어떨까, 하면 다 안 된다고 그래요. 정직하게 이 정도만 하겠다고 하면 ‘왜 나왔니.’ 이렇게 되죠. 사람은 확 바꾸길 원한다는 거예요. 누구도 확 바꾸지 못해요. 정직하게 정치를 하면, 못 이겨요. 그게 또 아이러니예요.(웃음)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온 정치가 유시민

여러 문맥에서 선생님의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도드라졌습니다. 특히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사유하고 질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그런 모습이 한편 정치적으로 신뢰를 주는 면도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식인 사회의 문화는요, 임금님이 불러서 벼슬을 주면 가서 열심히 일을 해요. 백성들 먹여 살리고, 조정에 가서 어드바이스를 하다가, 당정에 밀리고 쫓겨나잖아요. 그럼 귀향 내려가서 젊은이들 가르치고 글을 써요. 그런 전형적인 인물이 다산 정약용, 고산 윤선도 선생이죠. 우리가 그분을 지식인의 모범, 관료의 모범으로 치잖아요.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는 목민관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리한 자기의 경험담이에요. 전부 다. 그런 책은 높이 받들면서, 오늘날 행정에 참여했다가, 임금님한테 미움받아 쫓겨나서 글을 쓰면 자기 자랑한다고 그래요. 물론 내 책이 다산 선생 책처럼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한때 정치를 했던 사람이 책을 쓰면, 그것까지도 다 정치적 코드로 읽어서 공격한단 말이에요. 의심해야 된다고 얘길 해요. 왜 그렇죠?

이런 고정관념은, 정치 혐오감이 빚어낸 건데요……. 제가 보기에는. 다산 선생이 목민관을 안 해 봤으면 『목민심서』를 썼겠느냐고요. 해 봤으니까 썼지.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이 책을 쓰거나 고관이 책을 쓰면 굉장히 존중해줘요. 우리나라는 안 그렇거든요. 원래 그런 지적 전통은 우리가 더 강했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국민이 자리를 주면 가서 일을 하고, 봉급 먹고 살고, 국민들한테 쫓겨나면 책을 쓰고, 그걸로 밥 먹고 살고, 그러다 국민들이 생각해보니까 ‘니 아깝다, 와서 일해라.’ 하면 또 가서 일하고. 이런 게 정말 나는 자연스럽고 아무런 갈등을 못 느끼겠어요. 이 책도 권력도 경험하고, 행정도 경험했으니, 과거의 읽었던 책을 좀 더 다르게 해석하게 됐겠죠. 만날 방에서 책만 읽고 평생을 살았으면, 이런 책은 쓰더라도 다르게 썼겠죠. 이게 더 가치 있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거예요. 인생이.


몇몇 정치인들은 선거 전후나 직후에, 책 표지에 얼굴을 크게 박아서, 차마 손도 대기 어려운…….(웃음) 그런 책을 쓰기도 하잖아요. 오히려 선생님의 경우가 다른 케이스지,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분들은 책을 팔려고 만든 게 아니고, 저는 책을 팔려고 만든 거니까. 아무래도.(웃음)

사람들은 선생님을 정치가이자 지식인이기보다는, 정치가로서 유시민, 지식인으로서 유시민, 이렇게 각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책 서평을 보면서 그런 걸 느꼈어요. 선생님이 생각하기에는 어떠세요?

같아요. 저는 뭐 인격분열을 체험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책을 쓸 때나, 국회에서 발언할 때나 똑같은 자세로 항상 해왔거든요. 책을 쓰는 거는,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안 보면 그만인데, 정치는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하고 계속 부딪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쪽은 스파크도 튀고, 서로 오물도 집어던지고, 상처를 입고 입히고 하는 거죠. 굳이 제가 책 냈다고 불쾌해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국회에서 발언을 하면 그 자체로 불쾌한 사람들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런 거지. 저 자신은 국회의원 할 때나 장관 할 때나 책을 쓸 때나 똑같아요.

글쓰기에 대해 묻고 싶은데요. 선생님께서는 늘 글 쓰는 게 즐겁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읽는 사람까지 즐겁게 하는 글쓰기에 대해 조언을 해 주신다면요?

무척 어렵게들 생각하는 것 같아요. 글쓰기가 어렵다는 건, 원고지를 폈는데 눈앞이 하얗다거나, 한글 화면을 띄워 놓으면, 앞이 막막하다던가 그런 건데……. 각자 생각이 다 있죠. 그걸 옮기면 되는 건데. 그게 도구가 익숙지 않으면 못하는 거예요. 아무리 머릿속에 좋은 집을 설계해도, 톱이나 대패를 못 다루면 집을 못 지어요. 책을 무조건 많이 읽지 않고는 글쓰기가 불가능해요. 옛날 작가 양성 과정을 보면 베껴 쓰기를 권하기도 했죠. 이런 것들이 비효율적이긴 한데 도움이 되긴 돼요.

선생님도 많이 베껴 쓰셨어요?

전 한 번도 베껴 써본 적이 없어요.(좌중 웃음)

그럼 어떻게 잘 쓰게 되셨어요?(웃음)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훈련을 좀 하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책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사람들이 고전을 재미있게 읽지 못하는 이유 중 지적 수준의 문제도 중요한 것 같아요. “바스티유의 노여움과 기쁨” “동궁 습격의 아슬아슬함” “기요틴에서 흐르는 피” 등 혁명사를 모르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우니까요. 어려운 책과 맞붙는 방법이 있다면요?

덜 무시무시한 책으로 내공을 계속 쌓아야죠. 높은 산에 바로 올라가긴 어려워요. 산악인들도 작은 봉우리부터 하나하나 정복하면서 내공을 쌓은 후에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는 거예요. 무겁지 않은 책부터 시작해서, 높은 곳에서 산소통 없이 숨 쉬는 방법을 익혀야 되죠. 왕도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지식적인 뒷받침을 받게 되면 될수록 책의 접근이 쉬워지고, 높은 내공을 요하는 책을 많이 읽게 되면, 그다음부터 다른 책들은 매우 수월해지는 거고요. 자꾸 읽다 보면 그렇게 돼요. 다른 방법은 없고, 책 읽기를 즐기면 됩니다. 진짜 머리 아프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책은 계속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건 나중에 읽으면 돼요.

선생님의 독서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유독 흥미로웠는데요. 비판적 시각은 어떻게 훈련하면 좋을까요?

생각이 깨어난다는 것은 좋은 질문을 찾는 거거든요. 어떤 의문에 부딪힐 때 그 의문을 물고 늘어져야 돼요. 예컨대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이런 추상적인 질문에 하루아침에 답을 발견할 수는 없죠. 그 질문을 계속 붙들고 가는 거예요. 어느 날 보면, 사람이 악한 것 같다가, 다른 날 보면 선한 것 같다가. 그 질문을 놓치지 않으면 돼요.

어떤 한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서 답을 발견할 수 없어요. 답이 있는 문제 같으면 아직까지 질문이 남아있을 리가 없거든요. 우리가 품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질문을 던졌지만, 말끔하게 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게 대부분이에요. 이런 질문들은 각자가 평생을 끌고 가는 거거든요. 한 시기에 답을 발견했다 할지라도,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다른 답을 발견할 수도 있고요. 그럼 다시 물음표로 가는 거고요. 사람 사는 게 그런 거 같아요. 답이 없어요. 이 책에도 나름 발견했다는 답도, 한 20년 지나서 다시 읽어보면, ‘왜 이렇게 썼을까?’ 하는 것들이 생기겠죠.


『청춘의 독서』는 딸에게 주는 책이라고 쓰셨잖아요. 따님과 비슷한 나이의 대학생들은 선생님과 많이 다른 대학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때와 같이 함께 싸울 적도 없고, 내 편도 없고요. 그때보다는 개인적인 즐거움을 탐하며 대학 시절을 보내는데요. 요즘 친구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읽히길 바라시는지요. 따님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도 궁금합니다.(웃음)

원래 꼰대들 얘기는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돼요. 근데 한 귀로라도 들어는 보라는 거죠.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런 책을 읽어라.’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 세대는 이런 문제를 고민하면서 책들을 이렇게 읽었다. 이제, ‘귀하들의 시대는 뭐냐.’라고 했을 때, ‘이런 것들도 한 번쯤은 관심을 둘 법도 하다. 이런 문제들도 중요하다.’ 정도로 권하는 거죠. 이 책에 던져진 질문들이 자기와는 무관한 것 같지만, 살면서 수없이 부딪칠 문제들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오래갈 수밖에 없는 질문들은 한번 줘 본 거죠. 우리 딸은 좀 힘들어하더라고요. ‘잘 썼네, 재미있데,’ 그러고 말더라고요.(웃음)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뭐가 남을까

이 글을 쓰던 중에 두 대통령을 보내셨습니다. 이 책 한 권이 선생님 삶에는 또 하나의 무늬로 남지 않을까 싶었는데요. 그 사건으로 인해 집필에 바뀐 점이 있을까요?

좀 슬퍼졌죠…….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고 나서, 한 달 이상 책 작업을 중단했다가 7월에 다시 시작했어요. 굉장히 슬프더라고요. 모든 게 슬프게 보였어요. 멜라니 사프카의 「the saddest thing」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너무 높은 (음정의) 노래라 흉내는 못 내겠는데. 앤 더 쌔디스트 띵~ 언더 더 썬 어버브~ 이스 투 세이 굿 바이~ 투 더 원스 유 러븐가 가사가 그래요. 가사도 슬프고, 멜로디도 굉장히 슬퍼요. 일주일 내내 그것만 틀어놓고 작업을 했어요. 요새도 좀 듣는데, 마지막에 글을 다듬는 과정에서 그런 느낌이 입혀졌을지도 모르겠어요……. 별로 씩씩한 글은 못 되죠.

김대중 대통령도, 그분이 국부 대우를 받아 마땅한 분이시거든요. 30년 넘게 반독재 투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사신 분이 대통령 되고 나서도 반쪽 대통령 취급받고, ‘빨갱이다, 호남 출신이다, 전라도다…….’ 고정관념을 뒤집어씌우고 합당한 대우를 안 했잖아요. 그런 게 굉장히 슬펐죠.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원래 좀 슬퍼져요.
(요즘은 어떠세요?) 요즘도 슬프죠. 네…….

집단적인 슬픔이고 상실이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까요. 잊어버리지 않게.

슬픔은 깊이 들어가면 개별적인 것 같아요. 제가 서울역 분향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는 걸 보고, 사람들이 왜 울까, 잘 이해를 못 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의 상실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 같아요. 근데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상실로 다가온 거예요. 어떤 가치 있는 것, 마음이 실렸던 것을 상실한 거죠. 그리고 그게 굉장히 아팠던 것 같아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집단적 상실임에도 슬픔은 다 개별적이다. 극복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는 해결이 아직 다 안 된 것 같아요. 아직도 다 못 보내드린 것 같아요.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고. 근데 시간이 가면 슬픔은 좀 잊히거든요. 그 자리에 뭐가 남을까. 그것도 각자의 마음에 달린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죠. 뭐가 남을지.



요즘, 노무현 대통령의 전기를 집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 되어 가요. 노무현 대통령 ‘자서전’이에요. 제가 대신 써드리는 거예요. 돌아가셨지만, 남기신 기록이 워낙 많기 때문에. 기록을 재구성해서 리라이팅 하는 거죠.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대통령 말씀하신 거 다 모으면 자서전 될 만한, 넘치는 분량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 맘대로 못써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고달파요. 지금까지 써본 책 중에 최고 고달파요. 4월 말에는 시중에 깔아야 하니까, 죽기 살기로 하고 있어요.

원고 검토 작업 막 들어갔는데, ‘자서전은 도저히 안 되겠다, 평전으로 바꿔.’ 하면 ‘나는’에서 ‘그는’으로 확 바꿔야 돼요.(웃음) 아직은 확정된 건 아니고. 일단, ‘나는’으로 나오는 책을 준비하는 거지요.
(무척 조심스러우시겠어요.) 그럼요. 이런 책은 생전 처음 써봤고,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거고. 한국 출판사(史)에서 전무후무한 이상한 책이 되지 않을까.

정말 아직 못 떠나보내시겠네요. 집필도 하고 계시고.

아직 그럴 여유가 없죠. 일이 남아 있거든요. 책을 쓰면서 아직도 장례식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이것도 역시 애도 기간이라고 봐야겠죠. 할 수 없죠. 뭐. 하필이면 저한테 일이 와서.(웃음) 이광재 의원처럼, 아예 다 접고 봉하마을 가서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야 뭐 책 쓰는 것인데 이 정도야 못하겠느냐.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싶어요.(웃음)

맹자가 쓸쓸한 모습을 안 보인 건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나이 들어 고향에 돌아와서 어떻게 저렇게 논리적으로 제자들하고 대화했을까. 저 같으면 기운이 빠져가지고, ‘에이, 이거 모르겠다.’ 그러고 앉아서 바둑이나 두고, 낚시나 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많이 들고, 요즘엔. 허허허.


맹자도 혼자 있을 땐 쓸쓸하지 않았을까요?

안 그랬을 것 같아요. 내면의 힘이 굉장했던 분이니까.

맹자는 항성이다. 다른 별의 빛을 받아야 자기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행성이나 위성과 달리 항성은 스스로 빛을 낸다. 진짜 별이다. (…) 그의 보수주의는 불편하지만,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호연지기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맹자는, 좌절마저도 아름다웠던, 진정한 보수주의자였다. 대장부였다, 나는 그것을 알고 나서야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p.133)


즐겁게 살자고 하는 일, 즐겁게 하고 싶어요

‘정치는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고귀한 일임에도 불구, 한국에서는 정치가 희화화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멀쩡한 사람도 국회 가면 이상해진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국회의원도 그다지 존경을 못 받고 있고요.

정치권의 사람들이 특별히 더 나쁘지 않아요. 국회의원 집단이 다른 어떤 인간 사회 집단과 견주었을 때 더 낫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절대 못하지 않아요. 제가 직접 경험해본 바로는 능력, 도덕성이 사회 평균보다 훨씬 높아요. 국회에서 국민들이 기대하는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거죠. 정치에는 개개인의 자질이라든가 성향, 도덕성을 넘어서는 집단적 문제가 있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국민들 만족을 못 시키니까 엉망으로 보이는 거죠.

정치를 조롱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알리바이로 정치를 때리는 거예요. 지식인들이 정치를 비하하고, 정치를 욕하고, 그것을 자기 지성의 표현인 것처럼 쓰는데요, 그런 지식인들이 정치를 망쳐놓는 거예요. 욕하는 국민들에게도 한번 물어보죠. 그럼 귀하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을 후원한 적이 있습니까? 귀하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정당을 위해 입당한 적이 있습니까?

괜찮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없어요. 대한민국에. 안 괜찮은 사람들은 안 괜찮은 사람들하고 잘 뭉쳐서, 뭔가 해요. 괜찮은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괜찮지.’ 하고 만다고요. 한쪽은 이해관계로 네트워크 만들고, 권력 장악하는 데 반해서, 그렇지 않은 쪽은 ‘좋네.’ 하고 만다는 거죠. 누가 이걸 바꿀 수 있겠어요. 왕이 신임을 줘야. 대신이 국정을 개혁하죠. 근데 기존 정당을 그렇게 욕하지만 어느 신생정당에 대해서 지지해 주나요, 안 해 주죠.


정치를 하면서 상처받은 얘기도 실려 있는데요. 그렇게 상처도 많이 받고, 낙담도 하셨을 텐데, 마지막 장까지 선한 인간,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그게 없으면 삶이 너무 불편하잖아요. 서로 그게 아닐지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게 낫다는 거죠. ‘인간은 악하니까.’라고 생각하고 인생을 설계하기 시작하면, 자기가 무지 고달파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악한 일들을 다 예측하고, 방어책을 강구해야 되기 때문에……. ‘악한 면도 있지만 사람이란 건 괜찮아.’ 하고 살아가면, 그래도 운이 좋으면 나쁜 일을 피해 갈 수 있고요.(웃음) 그게 훨씬 자기 맘이 편하고 좋아요. 실제로 살다 보면 좋은 사람이 더 많잖아요. 제 주변에도 그렇거든요.(웃음)

다윈의 진화론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렇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노출시켰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동물임을 과소평가하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또한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이라는 고귀한 도덕적 재능을 진화시켜온 존재임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벌거벗은 탐욕과 아귀다툼이 판치는 살벌한 야만으로 몰고 갈 위험에 빠진다.(p.220)

국민참여당이 창당했는데요. 신당 창당이 진보가 발전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괜찮은 사람들끼리 잘 뭉쳐서 같이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럼요. 그런 것도 다, 불합리한 정당 제도로부터 주권자를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인데, 당연히 진보가 있겠죠.

아침에 뉴스 보니까, 비판적인 논평이 많이 실렸더라고요.

당연하죠. 누가 찬성해주겠어요. 누가 달가워하겠어요.

어떤 것으로 승산이 있을 거라고 보세요?

올바르니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될 거라고 생각해요. 추구하는 목표가 올바르고, 방법이 좋기 때문에 지금은 힘들어도 꾸준히 해 나가면, 언젠가는 국민들이, 왕이 ‘너 와서 일해봐,’ 부르는 날이 올 거다…….

그 좋은 방법이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의 방법과는 다른 거죠?

네, 거기는 하고 싶은 게 좀 달라서……. 국민참여당은 자유주의 정당이에요. 진보자유주의. 문화가 너무너무 다르죠.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명령받는 걸 싫어해요. 우리는 진보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도 아니고, 누군가가 해야 한다고 선언해 놓은 걸 위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즐겁게 하고 싶지, 괴로운데 고통을 감내하며 해보자, 이거 아녜요. 너무 심각하고 그런 정당은 싫어요. 다 즐겁게 살자고 하는 일인데. 굉장히 리버럴한 사람들이 모인 정당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봐요.(웃음) 헌법이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게 해놨잖아요. 복수정당제, 정당 결성의 자유……. 남들이 안 해주면 자기가 직접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한다는 것은 어떤……?

보기 싫은 꼴 안 봐도 되는 나라 만들고 싶고요, 없다고 사람 좀 업신여기는 그런 것 좀 바꾸고요. 국민이 대통령 대접받는 그런 나라, 그런 건데. 뭐 몇 사람은 직업적으로 하고, 나머지는 취미 삼아 하고.(웃음) 정당 냈동이 별로 힘든 게 아니잖아요. 한 달에 당비 만 원 내주고, 가끔 인터넷 투표하고, 댓글도 쓰고, ‘이 당 괜찮다. 너도 입당해봐라.’ 친구한테 권하고, 술 먹다가 MB 욕 좀 하고, 뭐 정당 활동이 그렇게 힘든 게 아니거든요. 직업으로 할 사람들은 다르지만. 이런 사람들이 많아야 직업적으로 할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죠.

선생님은 직업인가요, 취미인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취미 생활로 할지, 아직 뭐.(웃음)

오늘 유시민 선생님 인터뷰하러 간다고 하니까, 다들 궁금해하더라고요. 선생님 서울 시장 출마하시냐고.(웃음) 뭐라고 대답하면 될까요?

아, 시민들이 별로 원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뭐 나보고 자꾸 출마하느냐고 해요.(웃음) 사람들은 그냥 재미있는 게임을 보고 싶어 하죠. 그런 심리도 있고요. 각자의 사유들이 있겠죠. 나도 내 인생이 있어서.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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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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