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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 꽃 같은 그대, 정혜윤 PD를 만나다

기죽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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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기억하지 않아도 마침맞은 말처럼 술술 나오는 책에 대한 정혜윤 PD의 사랑. 글도 예쁘게, 말도 예쁘게 하는,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것이 없어 무척 질투가 나는 시간이었지만 그 질투가 오히려 즐거운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은…

※ 운영자가 알립니다
이 글은 ‘정혜윤 PD와 함께하는 북 데이트’에 참석한 롤러코스터 님(blog.86chu.com/juncoo)이 쓴 글입니다.



심드렁한 게 주특기인 나는, 와인을 마시며 독자와 북 데이트를 한다는 이벤트에 눈을 반짝거리며 신청 댓글을 달고선 이내 다시 심드렁해졌다. 모니터로 보이는 글보다는 책의 촉감을 느끼면서, 또 이리저리 몸을 뒤집어가며 읽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채널예스에 올라온 정혜윤 PD의 글을 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읽지는 못 했다. 위와 같은 이유였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소개글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댓글을 달긴 했는데 뽑힐지는 의문이었다. 그의 글을 제대로 읽은 것이 없는데 뽑아줄 리도 없을 것 같고, 그래서 나의 심드렁한 마음은 ‘안 되면 말고.’ 하는 자포자기에서 나온 거였다.

그래도 일단 신청을 했으니 그의 책을 읽기는 해야겠기에 그제야 책을 구했다. 책이 온 날, 정혜윤 PD처럼 ‘침대 속 상상 여행’의 준비를 끝내고 그때까지도 심드렁해 있던 나는 “피곤과 불안과 염려와 설렘과 기대와 내일의 일을 책으로 대치해버리는 것은 나의 가장 오래된 버릇이니까.”라는 시작글을 읽는 순간, 다시 눈을 반짝거리게 되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여기도 있었네? 어? 한번 만나보고 싶어지잖아. 궁금해, 궁금해.’ 하며 ‘그녀의 갈색 피부와 부스스한 머리와 글처럼 예쁘게 말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해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런데, 그리웠던 첫사랑을 만난다 해도 이처럼 떨렸을까? 북 데이트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의 책에 점점 빠질수록(만나기 전에 책을 다 읽기 위해 길을 가면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읽었다.) 정혜윤 PD를 만난다는 게 걱정스러워졌다. 그동안 작가들의 이벤트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나름대로 간을 키우기는 했지만 말주변도 없는 데다, 열 명 남짓한 독자들뿐이니 딴 짓도 못할 테고, ‘뭘 물어봐야 하나?’ ‘너무 잘난 척 하는 사람은 아닐까?’ 등등 그 밤에 걱정해 봐야 아무 소용없는 생각으로 잠까지 설쳤다는 놀라운 사실, 정말 첫사랑을 만난다 해도 이보다는….


꽃 같은 그대를 만나다

약속장소인 대학로 W 카페에 도착하니 정혜윤 PD는 이미 와 있었다. ‘너무 빨리 온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나보다 먼저 와 있는 독자들과 관계자들! 대충 눈인사를 나누고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나 머뭇거리는데 정혜윤 PD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부스스한 머리에 끈 달린 원피스와 정말 잘 탄 듯한 피부를 가진 그가, 너무나 스스럼없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오느라고 차가 막히지 않았느냐?’ ‘닉네임은 뭐냐?’ ‘댓글에 단 책 제목이 뭐냐?’ 쉴 틈 없이 말을 건네는 그에게 대답하기 바빴고, 그러고는 궁금하던 질문을 해대며 이런저런 책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이벤트가 시작된 시간도 아니었고, 짜 놓은 극본대로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친구와 ‘그동안 잘 있었니?’ ‘요즘 어때?’와 같은 안부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자유로웠으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수다를 나누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자유롭고, 친근한 모습에서 그녀가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말도 글처럼 예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러고는 좌절! 그는 키도 컸으며, 날씬했고, 책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거렸다. 어느 곳 하나 단점을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이 피델리티』의 로브의 말을 패러디 한다면 “정혜윤 PD가 독자와 잘 지낸다면 그건 그가 가진 장점 덕분이 아니라 그가 가지지 않은 단점 때문이다.”


행사의 순서는 있었지만 이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상황이라 순서는 격식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벤트라는 명목이 있었기에 순서대로 나와 인사를 했다. 책을 펴낸 웅진지식하우스 이영미 주간의 정혜윤 PD 발굴기를 들었다. 웅진 지식하우스 외에도 여러 곳에서 출판 제의를 받은 정혜윤 PD의 마음을 잡은 것은 “많이 팔리지는 않겠지만 꾸준히 오래갈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말 한마디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혜윤 PD가 칼럼을 쓰게 된 동기를 듣게 되었다. 실크로드 여행 중에 투루판이라는 지방에서 가지고 온 귀한 포도주를 우연히 어느 분에게 선물하는 과정에서 여행 이야기가 나왔고, 자신은 여행을 책으로 떠난다는 말을 하는 도중에(이 말을 하면서 그는 『마담 보바리』의 한 장면을 이야기했다. ‘루앙’이라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두 번째 애인이자 재회한 애인과 밀회를 즐기기 위해 마차를 탄 그들이 루앙에 도착하여 멈추라고 할 때까지 멈추지 말라는 말에 마부가 루앙 거리를 미친 듯이 마차를 몰고 돌아다녔기에 ‘마담 보바리=루앙’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고 한다.) 그분께서 ‘그럼, 칼럼을 한번 써보라.’ 하여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가 칼럼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원하는 책을 공짜로 받을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책에 눈이 먼 여자랍니다. 원래는 이 주에 한 번씩 써 달라고 하는 것을 제가 책 받을 욕심에 일주일에 한 번씩 쓰겠다고 우겼죠.”


칼럼을 처음 쓸 때는 오로지 책을 공짜로 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열정으로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나’가 나오고, ‘나’의 캐릭터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어떤 식으로든 ‘나’를 노출한 적이 없었기에 칼럼 속에서 너무 ‘나’ 같은 말투가 나올 때면 겁이 났는데 그걸 제외하면 칼럼 쓰는 일이 정말 미친 듯이 즐거운 경험이었단다. 원래 수줍기도 하고, 노골적인 사람이기도 해서 좀 뒤죽박죽인 편인데 글도 그런 것 같다며 그런 글들을 사랑해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게 서로 소통하는 것 같아 너무 좋다고 했다.


기죽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해!

다음 순서는 독자들이 가지고 온 책을 교환하면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준비한 와인과 음식을 먹으면서 소개를 했는데 이때부터 정혜윤 PD는 어색한 강단 자리를 벗어나 독자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침대와 책』을 매개로 만난, 독자와 다를 게 없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신해 있었다. 책을 낸 저자라는 권위의식도 없었고, 독자라고 괜히 주눅 들 틈도 주지 않았다. 더구나 이 시간이 가장 즐거웠던 것은 정혜윤 PD의 깜찍한 제안 덕분이었다. “여러분을 기억하고 싶어요. 간단하게 소개하지 마시고, 성장과정을 이야기해 주세요.” 이리하여 저자와 독자의 구분은 저 멀리 우주 너머로 보내버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난 자리에서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모임을 자주 나가다 보니 자기소개와 같은 것엔 익숙해 있던 터라, 간단하게 할 생각으로 준비를 했는데 길게 이야기하라는 정혜윤 PD의 한 마디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어버렸다. 여태껏 이런 경우는 한 번도 당해본 적이 없었기에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한 명씩 자기소개를 그럴듯하게 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열 명이나 되는 독자들쳀 자기소개를 하느라 정혜윤 PD가 이야기할 많은 시간을 놓쳤음에도 너무나 열심히 들어주고, 질문을 하던 모습은 진정 독자와 함께 데이트를 즐기고, 독자를 배려해주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쪽지를 뽑으면서 자기소개와 가지고 온 책 소개를 했는데 희한하게도 중간쯤 정혜윤 PD의 이름이 나와 정혜윤 PD의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그는 채널예스에서 새롭게 시작한 칼럼 <정혜윤 PD의 그들은?>에 올린 자신에 관한 글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해안 농촌에서 농촌 일을 하지 않는 부모님 덕에 농사일을 거드느라 바쁜 친구들과 다르게 편하게 책이나 읽는 아이로 자랐다. 책만 읽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어머니 덕분에 책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코너에서 여름에 바다에서 쓰려고 사 둔 고무보트 속에 앉아 책을 읽었다고 한다. 『톰 소여의 모험』『빨강머리 앤』『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책에서부터 계몽사판의 위인전집, 특히 『메리 포핀스』를 읽을 땐 건방지고 퉁명스런 말투를 따라하다 엄마에게 등짝을 맞은 기억도 난다고 했다. 또 『메리 포핀스』에 나오는 한 장면을 읽으면서 ‘하늬바람’이 도대체 어떤 바람인지 궁금하여 마루에 나가 밖으로 손을 뻗어 바람을 느껴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생을 결정할 최초의 책은 서울로 대학을 간 오빠가 가지고 온 『전태일 평전』이었다. 집 옆 미나리강을 따라 걸으면서 읽었는데 어느 순간 다리가 풀리는 경험을 했단다. 그것은 그 미나리강 옆 비닐하우스에서 살던 꼽추 가족과 얽힌 사연 때문이었고, 그 미나리강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은 후에 처음으로 대학은 반드시 서울로 갈 것이며, 기자가 될 것이라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침대와 책』을 그의 목소리로 듣는 듯한 정혜윤 PD의 책과 관련한 자기소개는 그야말로 청산유수 같았다.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그가 글을 쓸 때면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없이 후다닥 써내려간다고 하더니 그 의미가 이해되고도 남았다. 『침대와 책』을 보면 책 때문에 인기 폭발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말을 그날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정혜윤 PD의 말 속엔 항상 책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책 속의 한 장면을 리얼하게 아니, 책보다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준다. 그가 말하는 책에 대한 상상과 기억은 책과의 약속과도 같고, 책에게 위로받은 것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일과도 같아서 책을 읽고 있을 때는 길을 가다가도, 차를 몰다가도, 딴 일을 하다가도 그 책의 내용을 생각한다고 한다(이 방법은 아주 좋은 듯하여, 내년부터 나도 한번 해볼 생각이다). 그러니 책을 읽고 그 책을 기억해주는 일은 책에 대한 최?의 배려인 것 같다.


최근에 정혜윤 PD가 읽은 책은 『풀 먹는 가족』『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홍까오량 가족(붉은 수수밭)』을 쓴 중국 작가인 모옌의 소설들과 『리스본행 야간열차』『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라고 한다(그는 이 책들을 이야기하면서 달랑 두 페이지의 이야기를 얼마나 맛깔스럽게 들려주던지 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독자들은 모두 그 책을 구입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서 서해안에서 하늬바람을 느끼던 소녀가 이젠 어른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소년의 이야기를 읽을 때까지 온 것처럼 그의 책 읽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는 그가 장담한 것처럼 “레이스가 잔뜩 달린 잠옷을 입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거위털 이불을 덮은 채 가냘픈 손으로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의 침대 곁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 주의 신간 정보도 빼놓지 않고 물어볼 것이다.” 여든 살 생일에.


이 글이 우리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독자의 질문은 이미 와인을 마시면서, 수다를 나누면서 먼저 묻기도 하고 대답을 했기에 많이 받지는 않았다. 그중 “책을 읽을 때 침대에서 주로 읽는 것 같은데 글을 쓸 때도 침대에서 쓰느냐?”는 독자의 물음에 “침대에서 책을 읽는다고 누워서 읽는 것은 아니고, 요가 폼으로 앉아서 읽기도 하고, 이런저런 온갖 폼을 잡으며 책을 읽는다. 그리고 침대에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며, 글을 쓸 때 자화자찬하며 쓰는 편이다. 내 글에 대해 스스로 감탄한다.(웃음)”라고 했다. 그는 책을 읽을 때면 주인공을 상상하고, 도시를 상상한다고 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는 내 글을 읽을 독자를 상상하며 쓰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만 내 옆에 독자가 있다고 생각하며 쓴단다. ‘내 말 좀 들어줘!’ 하며.


깔끔한 맛을 주던 켄달-잭슨 와인의 맛처럼 정혜윤 PD와의 만남은 아주 상큼했다. 책 좀 읽었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은 모두 정혜윤 PD의 깊고 넓은 독서력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중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권의 책이 등장하고, 그 책의 한 장면을 말로 표현하는 일은 이젠 그의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굳이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기억하지 않아도 마침맞은 말처럼 술술 나오는 책에 대한 정혜윤 PD의 사랑. 글도 예쁘게, 말도 예쁘게 하는,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것이 없어 무척 질투가 나는 시간이었지만 그 질투가 오히려 즐거운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은… 그를 만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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