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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언, 임권택의 백 번째 영화 <천년학>과 만나다

음악을 하는 이유는 음악만이 지닌 매력을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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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언이 임권택 감독의 백 번째 영화 <천년학>을 만났다. ‘무국적 음악’으로 평가받는 양방언의 소리와, 가장 한국적인 풍경과 소리와 인간을 담아내고자 한 <천년학>이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지 많은 영화 팬은 궁금해 했다.

그는 이름이 두 개다. 한국에서는 그를 ‘양방언’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 그는 ‘료 쿠니히코’로 통한다. 어느 쪽이냐면 그는 일본인과 많이 닮았다. 사람은 태어나 자란 곳을 닮게 마련이다. 그의 모국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다. 그렇지만 그에게 한국은 언제나 왠지 모를 그리움이 있는 곳이다. 처음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 땅을 밟았을 때 그는 고향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임을, 그리고 자신이 돌아왔음을 느꼈다고 했다.

양방언은 2000년 11월 호암아트홀에서 첫 콘서트를 열면서 한국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공식 음악으로 지정된 ‘Frontier’(4집 앨범 『Pan-O-Rama』 수록), 드라마 <상도>의 메인 테마, 다큐멘터리 <도자기>의 음악 담당. 이성강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의 OST까지 그와 한국의 음악적 인연은 줄곧 이어졌다. 또 그가 일본에서 작업한 영화와 애니메이션 OST, 정규 앨범도 한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런 양방언이 임권택 감독의 백 번째 영화 <천년학>을 만났다. ‘무국적 음악’으로 평가받는 양방언의 소리와, 가장 한국적인 풍경과 소리와 인간을 담아내고자 한 <천년학>이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지 많은 영화 팬은 궁금해 했다. <천년학>의 개봉에 맞추어 한국을 찾은 양방언을 기자 시사회를 한 시간 앞두고 만났다.

영화 <천년학>의 음악 감독을 맡은 양방언

“한국말을 참 잘하시네요. 저는 통역을 두고 인터뷰를 해야 할 줄 알았는데요.”

“많이 는 겁니다.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한 건 9년 전부터예요. 한국 사람들과 자주 만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한국말이 늘었어요. 한국말 어려워요.”

“어떤 점이 어려운가요?”

“높임말이요.(웃음) 받침도 좀 어렵고요. 처음에 한국에서 활동할 때는 원고를 아예 외워서 인터뷰도 하고 방송도 하고 그랬어요.”

“부모님 두 분이 한국분이신데 집에서 한국말 안 사용하셨어요?”

“네. 중학교 때까지 민족학교에 다녔어요. 그때까진 한국말을 조금 했는데 고등학교를 일본 학교로 진학하면서 1999년까지는 한국말을 한마디도 안 하고 살았어요.”

“일본어가 더 편하시겠네요.”

“네. 대화하는 건 괜찮은데 글로 쓰는 건 못해요.”

“양방언 선생님의 음악을 무국적이다, 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임권택 감독님의 <천년학>은 굉장히 한국적인 영화인데 의뢰받고 망설이진 않으셨나요? 지금까지 해 온 영화 음악과는 전혀 다른 영역의 음악이잖아요.”

“감독님이 그냥 당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해라, 그 한마디만 하셨어요. 처음 작업 의뢰를 받고 다가갈 수 없는 큰 봉우리 앞에 선 느낌이었어요. 내가 과연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이 한국적인 음악에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했죠. 그러다가 촬영지에 몇 번 찾아가고 배우들과 술도 같이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음악 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조재현 씨하고도 아주 친해졌어요.”

“아직 음악을 들어보지 못해서요. 이번 음반이 어떤 색깔인지 궁금한데요.”

“전통적인 한국적 정서를 깊이 표현하고자 했어요. 한국 전통악기와 만난 것이 저에게 뜻 깊었어요. 앞으로 음악 하는 데 큰 보탬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적인 정서라는 말, 어떻게 보면 참 어려운 주제 아닌가요? 양방언 선생님께는 한국적인 정서가 어떤 걸로 느껴지시나요?”

“저는 머리가 나빠서 설명을 잘 못해요.(웃음) 한국적인 정서를 말로 표현하긴 참 어렵지요. 사람마다 생각도 다 다를 것 같고… 그렇게 분석한다고 해서 한국적인 것이 뭐다, 라고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저에게 임권택 감독님의 정서가 한국적인 정서예요. 누가 들어도 이 음악의 질감과 느낌은 한국적인 색깔이다, 이런 걸 느끼려고 했어요.”

“이번 영화 음악은 영화가 국악이다 보니, 국악기를 많이 사용하셨겠네요.”

“국악기도 많이 사용하고, 다른 악기도 많이 사용했어요.”

“판소리가 주가 되는 음악인데, 판소리나 국악에 대해서는 원래 좀 알고 계셨나요?”

“그 점이 제가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을 맡으면서 제일 고민스러운 부분이었어요. 이 영화는 음악이 테마인 영화인데 저는 국악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처음부터 국악만으로 음악을 구상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국악이면서도 국악이 전부는 아닌 그런 음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영화 음악은 영화가 주가 되기 때문에 음악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할 수 없잖아요. 자기 색깔을 죽여야 한다는 한계나 제약이 분명히 있을 텐데요.”

“물론 영화 음악은 솔로 앨범처럼 제 색깔을 낼 수 없죠. 그런데 저는 그런 영화 음악의 제약에 묶이는 걸 참을 수 없는 편이에요. 영화와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가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죠. 그리고 임권택 감독님 같은 거장과 작업을 함께한 것으로도 저는 큰 영광이에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죠. 그리고 한국인으로 이 영화에 참여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어요.”

“녹음할 때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이 영화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한데요.”

“매우 즐거웠어요. 한국적인 느낌을, 한국적인 정서를 서양인인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했는데 다들 참 좋아했어요. 한국의 임권택이라는 감독님의 백 번째 영화다, 라는 설명만으로도 다들 놀라면서 유럽에 개봉되면 꼭 영화를 보겠다고 말하더군요. 연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음악가들이 없겠지만 이번 음반을 녹음하면서 저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분들도 최선을 다해 영화에 걸맞은 멋진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천년학>의 음악은 한국 악기와 서양 악기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국악이면서 국악의 한계를 넘어 전 세계인의 음악으로 거듭났다. 왜 양방언이었을까? 처음부터 임권택 감독이 영화 음악 감독으로 그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양방언의 공연장에 간 임권택 감독은 그 음색에 반해 <천년학>의 음악 감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양방언에게 한국의 소리가 주인공인 영화 음악을 맡기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양방언의 음악을 이렇게 평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혹시 음악에 왜색적인 느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는데, 막상 음악을 들어보니 왜색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는 역시 한국인의 피를 받았고, 그 피가 면면히 살아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임권택 감독은 여러 번 기자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천년학>을 만들면서 <서편제>의 세계, 판소리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서편제>가 득음을 하기 위한 치열한 과정이라면 <천년학>은 사랑과 연민의 질긴 인연의 끈에 대한 이야기고, 평생을 이어간 사랑 이야기다. <서편제>가 한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면 <천년학>은 한을 승화시킨 이야기다.” 양방언은 이런 임권택 감독의 의도에 딱 맞아떨어지는 음악가였다.

“저는 선생님 앨범 중에서 <엠마>의 OST와 『Pan-O-Rama』를 가장 좋아하는데요. 어느 앨범이든 무척 멜로디가 아름답고 쉽게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엠마>는 애니메이션보다 음악이 더 좋았어요. 그 애니메이션 만든 감독님께 죄송한 소리지만.”

“나중에 <엠마> 감독을 만나면 그 말 꼭 전해 줄게요.(웃음) <엠마>도 곧 시즌 2가 나와요. OST도 나오고요. 저는 선율이 생명이고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누가 들어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도록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어려운 음악을 싫어하신다고 하던데요.”

“무척 싫어해요. 내가 싫어하는 음악은 마치 일회용품처럼 소비되었다가 사라지는 음악, 듣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음악, 자기만족을 위한 음악이에요. 만드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의 혼이 담기지 않는 음악은 만들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요.”

“작곡부터 연주까지 혼자서 다 하시는데 힘이 들진 않으신가요?”

“혼자서 다 하니까 앨범 하나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힘들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내 음악에 애착이 생겨요. 모두 다 자식 같고.”

“무대에서 무척 열정적인 연주로 유명하신 걸로 압니다. 다들 한 번 공연 보면 팬이 된다고 그러더군요.”

“그렇게 봐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육체적인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열심히 운동하고 있어요. 무대에서는 그저 즐겁고 신나게 하려고만 생각해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저는 머리가 안 좋아요.(웃음) 농담이 아니고 진짜 두뇌 용량이 작아서 쓸데없는 걸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그렇지만 음악가로 분명히 어떤 목표가 있고 성장에 대한 욕심은 있을 텐데요.”

“마치 계단처럼 펼쳐져 있어요. 매 순간 순간 발전해야 한다는 느끼죠.”

“계단이라는 게 올라가는 게 있으면 내려가는 것도 있잖아요. 정점에서 끝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몸으로 음악을 하는 만큼 내리막도 분명히 경험할 듯한데요.”

“그런 느낌이 올 때가 분명히 있어요. 그래서 연습이 필요한 거예요. 요즘도 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오전에는 피아노만 치면서 보내요. 일이 바빠서 연습할 시간을 내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연주가로의 연습을 꼭 빼놓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꽤 오래전부터 피아노를 쳐 오셨는데요. 양방언 선생님에게 피아노는 어떤 악기인가요?”

“히말라야 산맥이요. 피아노는 저에게 몹시 어렵고, 아주 매력적이고, 끝내 정상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런 악기예요.”

“어릴 때부터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셨어요?”

“아니요. 어릴 때는 피아노 치는 걸 창피해했어요. 제가 자랄 때만 해도 피아노는 여자 아이나 치는 악기라고 생각해서 남자 아이가 피아노를 치면 놀림감이 되었을 때니까요.”

“선생님 음악을 들어보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런 느낌이 강해요. 장르를 규정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저는 모든 음악을 다 좋아해요. 처음 음악을 들었을 때 왜 모든 소리가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 왜 이렇게 아름다울까 감동했어요. 모든 음악은 가슴으로 다가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클래식이나 재즈, 현대음악 이런 장르보다는, 듣는 순간, ‘아 좋아, 정말 아름다워’ 이렇게 느낄 수 음악을 만드는 게 제 욕심이자 목표예요. 그래서 제 음악은 쉽고 친근해요.”

“어떤 뮤지션은 자기 음악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데에 저항하는 분도 있는데요. 선생님은 자신의 음악을 ‘상품’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자기 음악이 ‘상품’으로 성립되어야 음악가가 걸어갈 수 있어요. 제 음악이 팔렸기 때문에 알려졌고 그래서 제가 작업할 수 있는 영역도 넓어졌고, 저보다 수준이 있는 사람들, 임권택 감독님 같은 분과 함께 일할 수 있었죠. 음악이 팔리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선생님에게 상업성의 의미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통로이자 가능성의 기반이네요.”

“상업성이 중요하지만 그게 가장 우선은 아니에요. 결국 음악을 하는 이유는 음악만이 지닌 매력을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서니까요.”

“일본에서 살고 계신데, 한국 책이나 영화는 자주 접하시는 편인가요?”

“많이 접하진 못해요.”

“일본 작가 중에서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시나요?”

“시바 료타로를 좋아해요.”

“아, 『료마가 간다』를 쓴 역사 소설가 말이죠?”

“네. 그런데 저는 그 사람 역사 소설(일본에서는 시대 소설이라고 하는데요)은 안 읽었어요. 일본 역사 이야기니까 별로 안 좋아해요. 그 사람이 몽골을 여행하고 쓴 여행기를 무척 좋아해요. 그 시각이 무척 따뜻하고 긍정적이어서 저도 몽골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몽골로 여행을 가기도 했고요.”

“몽골의 어떤 점이 좋으셨나요?”

“넓은 거요. 어디를 봐도 걸리는 게 없어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초원에 서 있으면 현실감이 없어져요. 그런 느낌이 참 좋죠.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지구상에는 몇 군데 안 돼요.”

인터뷰가 끝난 후 기자 시사회에서 <천년학>을 감상했다. 이때까지 그가 작업한 음악과는 색깔과 질감, 무게가 다른 소리가 화면을 채웠다. 그 안에 있던 한국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소리였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리움과 향수를 담은 소리가 머뭇거리지 않고 저 멀리 뻗어나갔다. 마치 끊어진 물길 너머로 환상의 학이 날아가듯.

양방언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경계에 선, 왜곡된 역사가 만든 소수인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거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도 일본에도 매이지 않고 더 넓고 깊은 세계인 음악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의 음악은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세계가 함께 듣는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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